김외득 행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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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 500
탐방로그
문시환 선생이 안장되신 남평문씨 동래 성안공파 추모공원 바로 옆에 있는 양산시 동면 법기리 500 김외득 선생 행적비를 찾아가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주모자로 일경에 피포되어 양산경찰서를 거쳐 부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재판 결과 소요죄로 실형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하신 후 서기 1934년 4월경 출감 후에도 교묘한 일경들은 항시 감찰하면서 정신개조를 시도하기 위하여 동본 서본 북본원 등에서 매월 15일 기도회를 행하고 자아반성을 강요하는 등 악랄한 방법으로 괴롭혀 일상생활에 고초가 극심하셨다. 일제 치하 36년간 특히 말기에 태평양전쟁을 치르면서 한민족을 살상하려는 일제의 단말마적인 ○○발악으로 일제에 희생된 애국동포는 부지기수였으며 일제 식민지하의 수탈의 참상은 말로서 표현할 수 없을 ○○인 ○은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있다. 공의 의거 사실은 서기 1932년(소화 7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양산 데모 사건 제하에 상세히 보도되 있으며 정부에서는 일제 치하 조국광복을 위해 투쟁한 공로를 표창하여 서기 1983년 8월 30일 국가유공자 제113호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로 대통령표창을 하셨다. 공은 1933년 경주인 김장숙 여사와 결혼하여 슬하에 동길 동화 옥선 2남 1녀를 두시고 세 자녀 모두 사회의 중견으로 기르셨고 손자 승한 승욱 손녀 주영 민영을 두시고 손자녀 모두 충실히 장성하고 있으며 다복한 가정을 이룩하시다가 김여사는 1985년 음 10월 26일 부산 장룡3동 541번지 자택에서 영면하시어 고향마을 부모님 산소 곁에 안식처를 마련하였다.
조국이 광복되자 경남 건국준비위원회 치안 담당 책임자로 광복 후의 질서유지에 헌신하셨고 범어사 신도회장을 맡으시어 많은 공덕을 쌓으셨으며 청도김씨 대종친회 회장을 역임하시면서 문사에도 애쓰셨으며 죽산제의 건립에도 많은 공적을 쌓으셨고 거주지 부산 금정 국민학교에 교재를 기증하시는 등 후배교육도 애쓰시고 불우이웃돕기 등 사회사업에도 앞장서시는 애국애족의 선봉이시다. 이곳 영원한 안식처에 비를 세워 공의 행적을 세상에 알리면서 후세에 전하오니 나라와 겨레 사랑하는 후세들이 더 많이 배출되어 이 나라를 세계만방에 더욱 빛낼지어다.
서기 1912년 10월 2일 탄신
서기 1993년 9월 30일 서거
장남 동길 자부 평택인 임효경 손녀 주영 민영
차남 동화 자부 경주인 최명수 손자 승한 승욱
장녀 옥선
서 현풍인 곽명기
서기 1987년 4월 5일 근수
남평문씨 동래 성안공파 추모공원 바로 옆 양산시 동면 법기리 500 김외득 선생 행적비를 찾아가고 있다.

김외득 선생의 묘소는 이곳에 있었지만, 서울현충원 충혼당3 320실 023호로 이장을 하셨다.
大韓民國 獨立有功者 淸道人 普德 外淂公 行蹟碑(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청도인 보덕 외득공 행적비)
공은 1912년 10월 2일 양산군 동면 석산리 736번지에서 아버님 휘 준건 어머님 연안인 차복순 여사의 세째 아들로 태어나시었다. 서기 1928년 양산보통학교를 졸업하시고 서울보성중학교에 입학하시어 독학으로 수학 중 서기 1930년 광주학생사건이 분기하자 동료 학생들과 같이 이 사건에 의거하였다는 이유로 일경에 검거되어 15일간 유치장에 구금되었다. 석방되자 수학 중인 학교는 중도 퇴학당하고 고향인 양산으로 귀향하여 선배인 이기주(전 경남지사) 김철수(전 경남지사) 김용호 이장호 제씨 등 애국지사들과 같이 일제에 항거할 목적으로 농민 노동자를 보호할 농민조합을 조직하던 중 일경에 적발되어 간부 15명이 구금당하자 국금된 간부들의 석방을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일경이 불응함으로 기조직된 농민조합의 농민 노동자 300여 명과 같이 서기 1932년 3월 15일 양산경찰서를 습격하여 경찰서를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일경들과 투쟁하다가 윤복건 농민이 사살되는 큰 소요사건이 발발했는데 공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