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시환 추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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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양산시 동면 법기리 499-1
탐방로그
양산시 동면 법기리 499-1 남평 문씨 동래 성안공파 추모공원 내 문시환 선생의 묘가 위치한다. 선생의 묘임을 알리는 안내판과 공덕비 그리고 추모비가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다. 평문씨의 집안은 매우 유명하신 가문인데, 묘비들이 모두 작고 소박하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장례 및 묘지를 소박하게 하고, 대신 후진양성을 위한 장학금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追慕碑(추모비)
일성(一聲) 文時煥公(문시환공)은 1897년 8월 12일 동래에서 始祖(시조) 多省公(다성공)의 31세로 태어나 동래 동명학교(현, 동래고교)에서 수학하던 중 조국이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수모를 당하자 중국 상해로 건너가시어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시는 한편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수학하셨는가 하면 의열단의 일원으로서 항일 구국의 의지를 몸소 실천하셨습니다. 공은 1923년 겨울 국내에 잠입하셨다가 체포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셨을 뿐 아니라 일제에 의해 형무소로 끌려가는 호송차에서도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신 구국충정의 애국지사이십니다. 광복 후 제헌국회의원, 제3대 경상남도도지사,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의 특별고문 등으로 조국 재건을 위해 활약하셨으며 흥아타이어공업(주)를 창립 운영하시면서 조국의 근대화, 산업화에도 선구자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러한 공로로 1969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으셨고, 1973년 11월 11일 이곳에 잠드셨으며,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으시니 '나라없는 설움보다 아픈 설름은 없다' 던 공의 유언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공의 서거 26주기를 맞아 문중의 뜻으로 여기 기산제에 추모비를 세우니 지나는 이는 모두 공께서 걸으신 길에 머리 숙이고 공의 뜻을 마음에 기릴 것입니다.
공이시여 평안히 쉬옵소서.
1999년 9월 24일 남평문씨 동래성 안파 문중
경모비
성암 문정의공은 시조 다성공의 29세손이며 동래 입향조인 화공의 15세손이신 희로공의 6남으로서 1907년 현 부산시 동래구에서 출생하였다. 젊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대판에 강성화학공업주식회사를 창립하여 아들 4형제를 경영에 참여케하고 공은 회장직을 맡았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고 1987년 별세하니 이곳 문중묘역에 안장하였다.
공은 1979년 어렵게 모은 거액의 사재를 문중에 희사하여 성암장학회를 조직케 함으로서 후손 교육과 문중의 긍지를 심었다. 이같이 문중의 화목과 번영을 신조로 이를 실천에 옮긴 이 숭고한 얼을 경모하고 또 길이 후손에게 가르치고자 문중은 삼가 이 비를 세운다.
1987년 5월 일 남평문씨 동래성안 문중
追慕碑(추모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