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용호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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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병정리 산14
탐방로그
산청읍 병정 마을. 민용호 의병대장의 사적을 찾았다.

병정 마을의 마을회관에 계시는 분들에게 위치를 물으니 알려주었다.

마을 입구 마을회관에서 약 200미터 정도 더 올라가서 인가가 끝나는 부분에 묘지가 보인다.

길가에서 보이는 묘소 앞으로 밭 안 쪽으로 더 들어온 곳. 왼쪽에 보이는 묘가 앞에서 보이던 묘소

마을회관을 두 번씩 오가며 알 수 있었다. 층계가 만들어져 있다고 했는데 이곳으로 보인다.

GPS 정보로는 산청군 산청읍 병정리 산 14로 나온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마을 입구 마을회관에서 약 200미터 정도 더 올라가서 인가가 끝나는 부분에 묘지가 보인다.
길가에서 보이는 묘소 앞으로 밭 안 쪽으로 더 들어온 곳. 왼쪽에 보이는 묘가 앞에서 보이던 묘소

층계가 만들어져 있는 것 처럼 보인다.
GPS 정보로는 산청군 산청읍 병정리 산 14로 나온다.
関東討倭 倡義大將 驪興閔公 諱 龍鎬 之墓(관동토왜 창의대장 여흥민공 휘 용호 지묘)
関東討倭 倡義大將 驪興閔公 龍鎬 之墓(관동토왜 창의대장 여흥민공 용호 지묘)
묘갈명 병서
산청 경호강 동쪽 병호 복호등 양좌원은 고 관동토왜 창의대장 민공의 묘소이다.
휘는 용호이며 자는 문견이요 호는 복제니 여흥인이다. 고려 농은공 휘 안부는 려말 예의판서로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중 1인으로 지리산하 대포촌에 은거하다. 기 18세손인 공은 고 현과공 휘에 지염과 비 연안이씨로 고종 기사 12월 29일에 산청군 오부에서 출생함에 기골이 장대하고 기질이 총명하여 학업이 대진하고 지용이 과인하였던바 한말의 국운이 쇠퇴하여 열강의 각축장이
된 것을 기회로 일본은 병력으로 조정을 위협하여 국가사직이 풍전등화 같음을 깨달은 공은 민족을 구하려는 큰 뜻을 품고 전국에 통문을 돌려 왜적과 싸울 것을 호소하고 적수공격으로 의기를 높이 들고 의병을 모집하여 원주를 거쳐 강릉에서 관동구군 도창의소를 설피하고 창의대장에 추재되어 1년여에 걸쳐 왜적과 싸와 수천여명을 격살하면서 전신에 총상을 입었다. 그러나 고종의 해병칙서로 울분을 참고서 의병을 해산하고 중국으로 들어가 천진 여순 등지에서 대도독 원세개와 북양대신 송경 등을 접견하고 한국의 실정을 들어 설득시켜 원조을 청했으나 미묘한 국제정세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황제의 소환칙령을 받고 귀국하여 1899년에 황명으로 국적없이 만주에 거주하는 우리 유민 10만명을 수적시키다. 경자년에 희릉참봉이 되고 임인년에 강릉 명성황후 천릉도감을 배명하였으며 계묘년에 비서원승지에 서임되 통정직에 올으다. 그러나 공은 당시 국가존망의 위기를 극복코저 친일파벌들과 투쟁하였으나 드디어 을사 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를 비분통탄하고 즉시 관직을 사퇴 다시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과 혈투 중 총상으로 하반신이 마비되어 불구의 몸으로 낙향하여 투병 중 불행이 1922년 임술 4월 24일에 33세를 일기로 망국의 한을 품은 채 한스런 일생을 마치었으니 그 충성은 비할대 없도다. 조국의 광복과 함께 대한민국 건국훈장인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배는 숙부인 하동정씨로 의관 정낙효의 딸로서 영욱 영옥 영원 3형제를 두었고 영욱이 남식 종식 수식 대식을 생하고 영옥이 원식 도훼 구은 석을 생하고 영원이 국재를 생하였으며 남식이 병우 병선 병창을 생하고 종식이 병소 병우
병길을 생하고 원식이 병철 병진을 생하였으며 병우가 진기를 생하니 기외 증현손은 많아 다
기록치 못한다. 그 증손 병우가 공의 사적을 휴대하고 묘갈명을 청하기에 여 불문으로 고사하였으나 간청임으로 어공의 위적을 약술하면서 명하여 가로대
생어명문혜여 기품당당이라 조등용문혜여 남아기상이라 항전불의혜여 봉기의병이라 혈투왜적혜여 하고신명이라 광복조국혜여 추서훈장이라 번창자손혜여 공지음덕이라 천행유문헤여 영전청사하리라
서기 1983년 계해 소춘에 김해 김용소는 삼가 짓고 쓰다
묘소에 자연석이 있는 것이 특이하다.
망부석에 보통은 조그만한 다람쥐가 한쪽은 위쪽으로, 한쪽은 아래쪽으로있는데, 이곳에는 큰 용이 망부석을 휘감고 있다.
산청읍 병정마을. 민용호 의병대장의 사적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