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194-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사 최원형 기적비
이명산의 준령지세를 받고 낙동강의 유역을 굉굉히 감돌아 곤양남산 기슭 맥사리에서 정기를 받아서 애국자 최원형 의사가 고고히 이 세상에 태어나다. 의사 최원형님은 그 본이 경주요 여러 대로 곤양 서부 맥사리에서 살았다. 님의 부명은 채술 모는 이천서씨이며 광무제 1901년 3월 13일이다. 5세에 벌써 서당에서 천자문과 사략을 읽혔으니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11세에 곤양보통학교 입학 4년의 수학을 마치고 1916년 경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인산식을 기하여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피보로 동대문경찰서에 6개월간 구금되면서 퇴학을 당했으니 님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독립선언서를 몸소 간직하여 고향인 곤양으로 돌아와 숙부 범술에게 전달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보급하며 무릇 뜻있는 사람들이 곤양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온마을 온 고을을 메아리치다. 님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옥중에 이르게 되자 갖가지 악형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 후 님은 출옥되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학하였고 그 이듬해 1921년에 숙부 범술도 일본으로 유학하여 여러 호기롭고 뛰어난 동지들을 두루 만나며 광복을 꾀하는 대열에 서다.
이명산의 준령지세를 받고 낙동강의 유역을 굉굉히 감돌아 곤양남산 기슭 맥사리에서 정기를 받아서 애국자 최원형 의사가 고고히 이 세상에 태어나다. 의사 최원형님은 그 본이 경주요 여러 대로 곤양 서부 맥사리에서 살았다. 님의 부명은 채술 모는 이천서씨이며 광무제 1901년 3월 13일이다. 5세에 벌써 서당에서 천자문과 사략을 읽혔으니 매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11세에 곤양보통학교 입학 4년의 수학을 마치고 1916년 경기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졸업을 얼마 앞두고 인산식을 기하여 기미년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여 피보로 동대문경찰서에 6개월간 구금되면서 퇴학을 당했으니 님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독립선언서를 몸소 간직하여 고향인 곤양으로 돌아와 숙부 범술에게 전달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널리 보급하며 무릇 뜻있는 사람들이 곤양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온마을 온 고을을 메아리치다. 님은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옥중에 이르게 되자 갖가지 악형에도 주저함이 없었다. 그 후 님은 출옥되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적을 알아야 한다라는 생각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청산학원 중학부에 편입학하였고 그 이듬해 1921년에 숙부 범술도 일본으로 유학하여 여러 호기롭고 뛰어난 동지들을 두루 만나며 광복을 꾀하는 대열에 서다.
1931년에 상지대학 독법과에 입학 1935년에 졸업 그 당시 왜경이 우리를 가혹하게 다루는것이 날로 심해지매 님은 독립운동에 적극투신하여 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일본 외교관계 담당으로 미영불 국사절에 활약 요시찰 인물로서 왜경에게 피검됨이 십수회에 이르고 님의 모든 동정을 정찰당하므로 멀리 미국으로 건너가 그 뜻을 이루고자 했으나 1941년 일본에서 임시정부의 자금조달계획으로 인하여 국내유지에게 자금조변차 밀서를 일본에서 귀향하는 소녀에게 비탁했으나 불행 그 밀서가 수신자에게 전달되는 도중 탄로되어 일본 동경에서 피포당하여 부산형무소에서 정치범으로 5년 징역형을 선고받다. 일본에서 거물급 독립투사가 잡혀온다라고 경남경찰부 유치장에서 수근거릴 정도로 의사의 비중은 컸다. 조선사람이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는 것이 무슨 죄가 되느냐 여러차례 불려다가 몹시 사나운 곤욕을 치르는 악랄한 고문에도 일제 유구무언했다. 아무리 심한 고문도 끝내 배후와 연루에는 묵비리로 일관되고 결심도 단독범이라면서 악형에서 악형으로 이어지다. 1942년에 옮긴 대전형무소에서 조국광복을 불과 6개월 앞둔 1945년 2월 8일에 혹한으로 옥중에서 순절하니 오호애재라 원통함이여 나라잃은 백성이 국권회복을 위하여 싸우다가 원혼이 되었으니 어찍 통탄하지 않으랴. 생자필멸이 인지상도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앞날이 양양한 40대를 일기를 유명을 달리한 님의 일념이신 조국의 광복을 눈앞에서 보지 못하고 요절하니 하늘도 땅도 산천초목까지도 어찌 무심하고 무정하지 않을소냐. 유족들 정성으로 님을 화장하여 이 고장 곤양 선영에 장례하다. 님이시여! 평안히 눈 감으시고 영면하소서
지금와서 여론이 널리 일어나온 뜻을 가져 여기 님의 사적을 기록하여 곤양성 내 한 길가에 의사님의 기적비를 건립하여 나랏 사람들의 생각을 여기에 영원하게 하노라.
夫人一生(부인일생) 誰則無死(수칙무사) 死而得○(사이득○) 斯爲美耳(사위미이) 堂堂崔公(당당최공) 生丁不辰(생정불진) 愛自弱冠(애자약관) 志節嶙峋(지절인순) 憤涕盈衿(분체영금) 挺身直前(정신직전) 誓與日賊(서여일적) 不共一天(불공일천) 斧吭鉅腹(부항거복) 任爾恣虐(임이자학) 惟此寸丹(유차촌단) 百死靡鑠(백사미삭) 身殄魂愉(신진혼투) 上訢蒼旻(상흔창민) 蒼旻悔禍(창민회화) 權域回春(권역회춘) 肆揭義績(사게의적) 昭示衆萬(소시중만) 君則何有(군칙하유) 爲於民勸(위어민권)
광복의사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무신 1968년 광복절 유당 김종하 작 을축 윤 8월 광산후인 김영건 서
지금와서 여론이 널리 일어나온 뜻을 가져 여기 님의 사적을 기록하여 곤양성 내 한 길가에 의사님의 기적비를 건립하여 나랏 사람들의 생각을 여기에 영원하게 하노라.
夫人一生(부인일생) 誰則無死(수칙무사) 死而得○(사이득○) 斯爲美耳(사위미이) 堂堂崔公(당당최공) 生丁不辰(생정불진) 愛自弱冠(애자약관) 志節嶙峋(지절인순) 憤涕盈衿(분체영금) 挺身直前(정신직전) 誓與日賊(서여일적) 不共一天(불공일천) 斧吭鉅腹(부항거복) 任爾恣虐(임이자학) 惟此寸丹(유차촌단) 百死靡鑠(백사미삭) 身殄魂愉(신진혼투) 上訢蒼旻(상흔창민) 蒼旻悔禍(창민회화) 權域回春(권역회춘) 肆揭義績(사게의적) 昭示衆萬(소시중만) 君則何有(군칙하유) 爲於民勸(위어민권)
광복의사 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 무신 1968년 광복절 유당 김종하 작 을축 윤 8월 광산후인 김영건 서
1977년 건국포장 추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4년 향토 선영에서 국립묘지로 천장하다. 금반 님의 독립운동에 관한 정신과 남의 숭고한 독립정신과 거룩한 발자취는 우리들의 귀감으로 삼는다는 취지에서 님의 기적비를 개수비하여 이 곳 곤양면 사무소 앞으로 이전 건립하여 만인들의 마음속에 길이 새겨두고자 한다.
을축 1995년 10월 일 의사 기적비 개수 건립추진위원회 일동
유족 삭녕 최귀태 장남 영용 자부 김양식 차남 삼용 자부 강현숙 장녀 환자 서 존페롤트 차녀 옥자 서 김복기 손 태웅 손부 이혜경 자손 태상 태진 손녀 은정 손서 정연철 차손녀 연규 증손 우영 미성 외손 타니엘 프레드릭 김정민 김남석 김남진 외증손 정나영 정윤수
을축 1995년 10월 일 의사 기적비 개수 건립추진위원회 일동
유족 삭녕 최귀태 장남 영용 자부 김양식 차남 삼용 자부 강현숙 장녀 환자 서 존페롤트 차녀 옥자 서 김복기 손 태웅 손부 이혜경 자손 태상 태진 손녀 은정 손서 정연철 차손녀 연규 증손 우영 미성 외손 타니엘 프레드릭 김정민 김남석 김남진 외증손 정나영 정윤수
옆에는 많은 비석들이 있었다.
경남 사천시 곤양면 성내리 194-1 곤양면 행정복지센터 앞 의사 최원형 기적비를 찾아왔다.
의사 최원형 기적비
관리번호: 43-1-5 / 관리자 : 문중대표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 기적비는 최원형(崔垣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10월에 건립하였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는 3·1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여 만세시위를 폈으며 이로 인해 강제 퇴학을 당하였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에서도 학업 외에 일본을 방문한 외 국인들에게 대한민국의 실상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이를 조국독립의 호기로 생각한 그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자 일본에서 귀향하는 한 소녀를 통하여 고향친구이며 자산가인 정재홍(鄭在洪)에게 독립운동 자금 5천원을 송금해 달라는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이 일경에 밀고됨으로 인해 1942년 2월 일본에서 피체되어 경남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그는 1942년 6월 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8일 대전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관리번호: 43-1-5 / 관리자 : 문중대표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이 기적비는 최원형(崔垣亨: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5년 10월에 건립하였다.
1919년 경성고등보통학교 4학년에 재학중이던 그는 3·1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여 만세시위를 폈으며 이로 인해 강제 퇴학을 당하였다.
일본을 이기기 위해서는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1921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으며 일본에서도 학업 외에 일본을 방문한 외 국인들에게 대한민국의 실상을 알리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41년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이를 조국독립의 호기로 생각한 그는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고자 일본에서 귀향하는 한 소녀를 통하여 고향친구이며 자산가인 정재홍(鄭在洪)에게 독립운동 자금 5천원을 송금해 달라는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이 일경에 밀고됨으로 인해 1942년 2월 일본에서 피체되어 경남경찰서로 압송되었다고 한다.
그는 1942년 6월 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8일 대전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義士 崔垣亨 紀績碑(의사 최원형 기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