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사천시 곤양면 남문외리 117-14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곤양 기미년 독립의거 기념비 건립 협찬자 이름
사천시 곤양면 남문외리 117-14 곤양기미독립의거기념비를 찾았다. 곤양종합시장 건너편에 있었다.
제4회 곤양 비봉내 축제 곤양 역사관
昆陽 己未年 獨立義擧 紀念碑(곤양 기미년 독립의거 기념비)
昆陽 己未年 獨立義擧 紀念碑(곤양 기미년 독립의거 기념비)
昆陽 己未年 獨立義擧 紀念碑(곤양 기미년 독립의거 기념비)
인간은 누구라도 자유를 추구하여 향유할 수 있고 국권은 국민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영예로움을 빛낼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외세의 침입에 대해 굳건한 애국심으로 의연하게 평화로운 나라를 지켜왔다. 이곳 곤양에 살아왔던 우리의 선조를 또한 나라를 겁박하고 국권을 약탈하려는 외세에 대해서는 저항과 극복으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가꾸어 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행동은 용맹스러웠고 의지는 승전의 근간이 되었다. 우리는 곤양 출신 정기룡 장군이 왜군을 격퇴하고 소탕하여,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절도사로서 역사에 충정을 남겼던 일을 기억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곤양의 애국정신이 불처럼 일어나 기미년에 독립의거를 일으켜서 서부 경남인에게 자주독립과 자주민의 권리를 일깨워 중ㅆ다. 여기에 그때의 일들을 기록한다.
1919년 3월 13일 일제에 억눌렸던 국권을 회복하려는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곤양에서 횃불처럼 피어올랐다. 송전리에 살던 김진곤은 서울의 만세의거 소식을 듣고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쓴 태극기를 만들어,객사 응취루 2층에 올라 만세를 높이 부르고, 주재소에 태극기를 투척 하였다. 그리고, 같이 역사
1919년 3월 13일 일제에 억눌렸던 국권을 회복하려는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곤양에서 횃불처럼 피어올랐다. 송전리에 살던 김진곤은 서울의 만세의거 소식을 듣고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쓴 태극기를 만들어,객사 응취루 2층에 올라 만세를 높이 부르고, 주재소에 태극기를 투척 하였다. 그리고, 같이 역사
인간은 누구라도 자유를 추구하여 향유할 수 있고 국권은 국민의 의지와 노력으로 그 영예로움을 빛낼 수 있다. 우리는 예로부터 외세의 침입에 대해 굳건한 애국심으로 의연하게 평화로운 나라를 지켜왔다. 이곳 곤양에 살아왔던 우리의 선조를 또한 나라를 겁박하고 국권을 약탈하려는 외세에 대해서는 저항과 극복으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가꾸어 왔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도 행동은 용맹스러웠고 의지는 승전의 근간이 되었다. 우리는 곤양 출신 정기룡 장군이 왜군을 격퇴하고 소탕하여,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 절도사로서 역사에 충정을 남겼던 일을 기억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곤양의 애국정신이 불처럼 일어나 기미년에 독립의거를 일으켜서 서부 경남인에게 자주독립과 자주민의 권리를 일깨워 중ㅆ다. 여기에 그때의 일들을 기록한다.
1919년 3월 13일 일제에 억눌렸던 국권을 회복하려는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곤양에서 횃불처럼 피어올랐다. 송전리에 살던 김진곤은 서울의 만세의거 소식을 듣고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쓴 태극기를 만들어,객사 응취루 2층에 올라 만세를 높이 부르고, 주재소에 태극기를 투척 하였다. 그리고, 같이 역사
1919년 3월 13일 일제에 억눌렸던 국권을 회복하려는 대한독립 만세 함성이 곤양에서 횃불처럼 피어올랐다. 송전리에 살던 김진곤은 서울의 만세의거 소식을 듣고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쓴 태극기를 만들어,객사 응취루 2층에 올라 만세를 높이 부르고, 주재소에 태극기를 투척 하였다. 그리고, 같이 역사
연구모임을 만들어 밤마다 국권 회복을 논의했던, 박계술.조효제.박삼칠.정각린.강삼문.문재규 등도 그날의 만세에 합세하였다. 14일에는 성내리에서 군중들과 더불어 만세를 불러 독립에 대한 열망이 도도하게 곤양에 퍼지게 하였다. 이후 곤양의 주민들은, 이 만세의거에 대한 강건한 의지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4월 6일, 4월 19일에는, 곤양 보통학교 생도들이 김진곤 등과 더불어 곤양 시장에서 군중을 이끌어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 정신을 이어 나갔다. 일제는 역사.문화적으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자긍심이 이어져 내려온 곤양면민들을 강압과 폭력으로 의거를 혹 짓눌러 보기도 하고, 협박과 회유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하였으나, 곤양에서 퍼지는 독립의 강건한 의지는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곤양을 최초로 서부 경남 전역으로 만세의거가 펼쳐져 나갔다. 서포 율포리 출신 최범술은 해인사에서 최원형 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우편으로 전달받아 송지환.신영법.임응주.송찬홍.이주효.송용수.박우미동 등과 독립 의거를 주도하면서 3월에 곤양 장터에서 군중과 더불어 만세를 불렀다. 4월 10일과 4월 16일에는 서포 개진학교 생도와 주민들과 더불어 서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곤명 금성리에서는 이영근이 최범술로 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4월 5일, 문양근.이영근.정원주.조개석.조관석.강재빈.이규현 등과 협심하여 금성리 주민들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7일에는 김경찬 등 주민들이 옥녀봉에서 만세를 불렀다. 오사제에서 정복와 외 많은 사람들의 만세의거가 있었다.
기미년 곤양의 항일정신은 여러 방향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맥사리 출신 최원형은 경성고보 학생으로 최범술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고, 서울에서 3.1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고초를 당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에 자금조달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성내리 출신 조우제는 곤양과
기미년 곤양의 항일정신은 여러 방향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맥사리 출신 최원형은 경성고보 학생으로 최범술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고, 서울에서 3.1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고초를 당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에 자금조달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성내리 출신 조우제는 곤양과
연구모임을 만들어 밤마다 국권 회복을 논의했던, 박계술.조효제.박삼칠.정각린.강삼문.문재규 등도 그날의 만세에 합세하였다. 14일에는 성내리에서 군중들과 더불어 만세를 불러 독립에 대한 열망이 도도하게 곤양에 퍼지게 하였다. 이후 곤양의 주민들은, 이 만세의거에 대한 강건한 의지를 끊임없이 이어갔다. 4월 6일, 4월 19일에는, 곤양 보통학교 생도들이 김진곤 등과 더불어 곤양 시장에서 군중을 이끌어 만세를 부르며, 독립의 정신을 이어 나갔다. 일제는 역사.문화적으로, 국가에 대한 애국심과 자긍심이 이어져 내려온 곤양면민들을 강압과 폭력으로 의거를 혹 짓눌러 보기도 하고, 협박과 회유로 민족정기를 말살하려 하였으나, 곤양에서 퍼지는 독립의 강건한 의지는 막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곤양을 최초로 서부 경남 전역으로 만세의거가 펼쳐져 나갔다. 서포 율포리 출신 최범술은 해인사에서 최원형 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우편으로 전달받아 송지환.신영법.임응주.송찬홍.이주효.송용수.박우미동 등과 독립 의거를 주도하면서 3월에 곤양 장터에서 군중과 더불어 만세를 불렀다. 4월 10일과 4월 16일에는 서포 개진학교 생도와 주민들과 더불어 서포에서 독립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곤명 금성리에서는 이영근이 최범술로 부터 독립선언서를 입수하고, 4월 5일, 문양근.이영근.정원주.조개석.조관석.강재빈.이규현 등과 협심하여 금성리 주민들과 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7일에는 김경찬 등 주민들이 옥녀봉에서 만세를 불렀다. 오사제에서 정복와 외 많은 사람들의 만세의거가 있었다.
기미년 곤양의 항일정신은 여러 방향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맥사리 출신 최원형은 경성고보 학생으로 최범술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고, 서울에서 3.1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고초를 당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에 자금조달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성내리 출신 조우제는 곤양과
기미년 곤양의 항일정신은 여러 방향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맥사리 출신 최원형은 경성고보 학생으로 최범술에게 독립선언서를 우송하고, 서울에서 3.1 독립만세에 참여하여 고초를 당하였다. 그 뒤 임시정부에 자금조달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전념하다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성내리 출신 조우제는 곤양과
인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전국적으로 활동하면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제 관공서에 폭탄 투척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미년 이후, 곤양은 곤명 서포지역과 더불어 한편으로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문맹퇴치, 농민활동도 이어나갔다. 다솔사에서는, 전국적으로 활동하던 만당을 통한 항일운동이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헌신하였던 분들로서 이름도 행적도 알려지지 않거나, 자료가 확보되지 않아 여기에 기록되지 못한 분들이 맣이 있다. 그러나, 그분들의 큰 희생도 이 기념비 깊은 곳에서 빛을 밝히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 숭고한 그들의 행적과 이름을 기록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제에 저항한 모든 분의 의로운 분노를 승화시켜 이곳 곤양에 애국과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지표로, 기미년 독립의거 10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를 우뚝 세운다.
2020년 2월 일 문학박사 수산 이은식 짓다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헌신하였던 분들로서 이름도 행적도 알려지지 않거나, 자료가 확보되지 않아 여기에 기록되지 못한 분들이 맣이 있다. 그러나, 그분들의 큰 희생도 이 기념비 깊은 곳에서 빛을 밝히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 숭고한 그들의 행적과 이름을 기록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제에 저항한 모든 분의 의로운 분노를 승화시켜 이곳 곤양에 애국과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지표로, 기미년 독립의거 10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를 우뚝 세운다.
2020년 2월 일 문학박사 수산 이은식 짓다
인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하고, 전국적으로 활동하면서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제 관공서에 폭탄 투척 등의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미년 이후, 곤양은 곤명 서포지역과 더불어 한편으로 문화운동을 전개하여, 문맹퇴치, 농민활동도 이어나갔다. 다솔사에서는, 전국적으로 활동하던 만당을 통한 항일운동이 있었다.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헌신하였던 분들로서 이름도 행적도 알려지지 않거나, 자료가 확보되지 않아 여기에 기록되지 못한 분들이 맣이 있다. 그러나, 그분들의 큰 희생도 이 기념비 깊은 곳에서 빛을 밝히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 숭고한 그들의 행적과 이름을 기록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제에 저항한 모든 분의 의로운 분노를 승화시켜 이곳 곤양에 애국과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지표로, 기미년 독립의거 10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를 우뚝 세운다.
2020년 2월 일 문학박사 수산 이은식 짓다
일제 치하에서, 나라를 찾기 위해 헌신하였던 분들로서 이름도 행적도 알려지지 않거나, 자료가 확보되지 않아 여기에 기록되지 못한 분들이 맣이 있다. 그러나, 그분들의 큰 희생도 이 기념비 깊은 곳에서 빛을 밝히고 있음을 우리는 잊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에 숭고한 그들의 행적과 이름을 기록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일제에 저항한 모든 분의 의로운 분노를 승화시켜 이곳 곤양에 애국과 평화와 자유를 상징하는 지표로, 기미년 독립의거 100주년을 맞아 이 기념비를 우뚝 세운다.
2020년 2월 일 문학박사 수산 이은식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