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
- 탐방로그
- 다솔사 안심료(安心療)와 응진전에서는 만해 한용운이 머물면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초안을 작성한 곳으로 알려져있다. 또 안심료 앞마당에는 만해가 1939년, 환갑을 맞아 심은 황금공작편백나무 세 그루가 자라고 있다. 안심료에서는 소설가 김동리가 등신불을 집필했다고 알려져있다. 김동리의 형이 김범부 선생인데 그는 다솔사에서 만해 한용운과 자주 교류가 있었던 인물이다. 자기 몸을 불태워 부처에게 제물로 바치는 <소신공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것을 우연히 전해들은 김동리가 충격을 받아 소설 등신불을 썼다고 전해진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安心寮(안심료)
萬海 韓龍雲(만해 한용운) 선사님
萬海 韓龍雲(만해 한용운) 선사님께서는 1917~1918년 이곳 안심료에 머물면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초안을 작성하셨습니다. 1939~ 효단스님, 김범부 선생님과 회갑기념 황금공장편백을 식수하셨습니다.
▶ 생애: 1879.8.29 충남 홍성 출생~1944.6.29 서울 성북동 심우장 별세 (66세)
▶ 속명: 청주한씨, 유천(裕天)
▶ 출가: 1905. 백담사에서 계를 받음.
▶ 법명: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卐海) 시인이자 승려, 항일 독립운동가.
▶ 약력:
1911. 송광사 승려궐기대회(일본 조동종 반대)
1913. 조선불교 종무원을 창설.
1917. 조선불교회 회장 역임.
1919.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3년간 투옥)
1924. 조선불교청년회 회장 취임.
1927. 신간회 결성참여 및 경성지회장.
1931.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卐黨) 당수.
1940. 창씨개명 및 청년출병 반대운동 전개.
▶ 저서: 독립선언서(공약삼장)초안작성, 불교유신론, 조선독립이유서, 님의 침묵/알 수 없어요/나의 노래/생명/사랑의 존재/행복/꿈과 근심/복종/첫키스/해당화/금강산/님의 얼굴/그를 보내며/찬송/후회/계월향/최초의 님/두견새/나의 꿈/타골의 시를 읽고/당신 가신 때/당신의 마음/명상/칠석/생의 예술/쾌락/여름밤이 길어요/사랑의 끝판/죽음/흑풍/박명,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채근담(精選講義菜根譚)
간행물: 1918. 유심, 1931. 불교,
萬海 韓龍雲(만해 한용운) 선사님께서는 1917~1918년 이곳 안심료에 머물면서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초안을 작성하셨습니다. 1939~ 효단스님, 김범부 선생님과 회갑기념 황금공장편백을 식수하셨습니다.
▶ 생애: 1879.8.29 충남 홍성 출생~1944.6.29 서울 성북동 심우장 별세 (66세)
▶ 속명: 청주한씨, 유천(裕天)
▶ 출가: 1905. 백담사에서 계를 받음.
▶ 법명: 법명은 용운(龍雲), 법호는 만해(萬海, 卐海) 시인이자 승려, 항일 독립운동가.
▶ 약력:
1911. 송광사 승려궐기대회(일본 조동종 반대)
1913. 조선불교 종무원을 창설.
1917. 조선불교회 회장 역임.
1919.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3년간 투옥)
1924. 조선불교청년회 회장 취임.
1927. 신간회 결성참여 및 경성지회장.
1931.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卐黨) 당수.
1940. 창씨개명 및 청년출병 반대운동 전개.
▶ 저서: 독립선언서(공약삼장)초안작성, 불교유신론, 조선독립이유서, 님의 침묵/알 수 없어요/나의 노래/생명/사랑의 존재/행복/꿈과 근심/복종/첫키스/해당화/금강산/님의 얼굴/그를 보내며/찬송/후회/계월향/최초의 님/두견새/나의 꿈/타골의 시를 읽고/당신 가신 때/당신의 마음/명상/칠석/생의 예술/쾌락/여름밤이 길어요/사랑의 끝판/죽음/흑풍/박명, 불교교육 불교한문독본/ 정선강의채근담(精選講義菜根譚)
간행물: 1918. 유심, 1931. 불교,
金東里(김동리) 선생님
金東里(김동리) 선생님께서는 1960~1961년 이곳 안심료에 머물면서 등신불(等身佛) 단편소설을 집필하여 1961.11 사상계 101호에 발표하였습니다.
▶ 생애: 1913. 경주시 성건동 출생 ~ 선산김씨, 1995. 서울에서 별세 (82세)
▶ 성명: 김시종(始鍾) 동리(東里) - 김범부 맏형이 지음
▶ 약력:
1929. 경신고보 중퇴 후, 귀향하여 각종 문학작품을 섭렵함.
1934. 시 백로/ 조선일보 당선
1935. 단편 화랑의 후예/ 조선중앙일보 당선
1936. 단편 산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61. 단편 등신불/ 사상계101호 발표, 문단 데뷔 후, 서정주 등과 〈시인부락〉 동인 활동.
▶ 작품세계:
• 초기 - 무녀도/ 황토기/ 신화/ 바위/ 화랑의 후예/ 등
토속적, 샤머니즘적, 동양적 신비의 세계에서 인간 생명의 허무적인 운명과 신비함을 추구함.
• 중기 - 윤회설/ 역마/ 지연기/ 귀환장정/ 흥남철수/
한국전쟁을 계기로 보다 더 역사 의식과 현실 의식이 강화되면서 참여 의식인 강한 작품을 창작하여 발표.
• 후기 - 등신불/까치소리/ 사반의 십자가/ 등
보다 근원적인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근대 문명에 대한 차원 높은 비판 의식을 형상화 하였다.
金東里(김동리) 선생님께서는 1960~1961년 이곳 안심료에 머물면서 등신불(等身佛) 단편소설을 집필하여 1961.11 사상계 101호에 발표하였습니다.
▶ 생애: 1913. 경주시 성건동 출생 ~ 선산김씨, 1995. 서울에서 별세 (82세)
▶ 성명: 김시종(始鍾) 동리(東里) - 김범부 맏형이 지음
▶ 약력:
1929. 경신고보 중퇴 후, 귀향하여 각종 문학작품을 섭렵함.
1934. 시 백로/ 조선일보 당선
1935. 단편 화랑의 후예/ 조선중앙일보 당선
1936. 단편 산화/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1961. 단편 등신불/ 사상계101호 발표, 문단 데뷔 후, 서정주 등과 〈시인부락〉 동인 활동.
▶ 작품세계:
• 초기 - 무녀도/ 황토기/ 신화/ 바위/ 화랑의 후예/ 등
토속적, 샤머니즘적, 동양적 신비의 세계에서 인간 생명의 허무적인 운명과 신비함을 추구함.
• 중기 - 윤회설/ 역마/ 지연기/ 귀환장정/ 흥남철수/
한국전쟁을 계기로 보다 더 역사 의식과 현실 의식이 강화되면서 참여 의식인 강한 작품을 창작하여 발표.
• 후기 - 등신불/까치소리/ 사반의 십자가/ 등
보다 근원적인 인간 구원의 문제를 다루고, 근대 문명에 대한 차원 높은 비판 의식을 형상화 하였다.
다솔사 차(茶) / 다솔사는 한국 근대 차 문화의 산실입니다.
◇ 초의선사(1786~1866) 속명: 장의순(張意恂)-초의草)
• 차 전문서 저술 - 차는 인간에게 보약과 같다
• 동다송(東頌茶) - 한국 차와 중국 차는 대등함
• 다신전(茶神傳) - 현묘하고 자극한 경지-다도(茶傳)
◇ 효당스님(1904~1979) 속명: 최범술(崔凡述)-효당(曉堂)
• 근대 차 문화의 개척자
• 한국의 차도(茶道) 저술
• 다솔사 차 밭 확장 조성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의 차 문화가 일제강점기 대부분 쇠퇴하였으나 효당스님이 다시금 일깨워 다솔사를 통해 육성발전 시키셨습니다.
◇ 다솔사 차의 특징 ······· 다솔사 차는!!!
효당 최범술 스님께서 "한국의 차도"를 저술하시면서 다솔사 법당 뒤편, 자생되어온 차나무에서 체취한 차엽을 전통의 방식으로 사찰에서 직접 만든 우수한 차입니다.
◇ 초의선사(1786~1866) 속명: 장의순(張意恂)-초의草)
• 차 전문서 저술 - 차는 인간에게 보약과 같다
• 동다송(東頌茶) - 한국 차와 중국 차는 대등함
• 다신전(茶神傳) - 현묘하고 자극한 경지-다도(茶傳)
◇ 효당스님(1904~1979) 속명: 최범술(崔凡述)-효당(曉堂)
• 근대 차 문화의 개척자
• 한국의 차도(茶道) 저술
• 다솔사 차 밭 확장 조성
오랜 역사를 지닌 한국의 차 문화가 일제강점기 대부분 쇠퇴하였으나 효당스님이 다시금 일깨워 다솔사를 통해 육성발전 시키셨습니다.
◇ 다솔사 차의 특징 ······· 다솔사 차는!!!
효당 최범술 스님께서 "한국의 차도"를 저술하시면서 다솔사 법당 뒤편, 자생되어온 차나무에서 체취한 차엽을 전통의 방식으로 사찰에서 직접 만든 우수한 차입니다.
문학의 산실 '등신불'의 산실 안심료
다솔사에 안심료는 일제 강점기 때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곳이다. 한용운스님이 안심료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이며 만해 스님은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卐堂)을 조직했고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1919년 3.1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그는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이곳 안심료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이지만 한용운스님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은 유서깊은 장소이다. 또한 만해 한용운과 김범부가 분신공을 한 승려에 대한 이야기 나눔을 듣고 안심료에 마침 머물고 있던 김동리는 이 소재를 소설로 썼다.
만해 한용운은 김범부 석란사 세분이서 '소신공양'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영감을 얻었다. 이 소설이 김동리의 역작 '등신불'이다. 이곳에서 김동리는 '황토기' '바위' 등을 썼다. '공간배경으로 삼았지만 절이라는 배경분위기는 역시 다솔사를 연상하며 글을 썼고 '등신불'의 산실이 바로 '안심료'이다.
다솔사에 안심료는 일제 강점기 때 불교계 항일운동의 거점으로 민족정신을 일깨운 곳이다. 한용운스님이 안심료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이며 만해 스님은 이곳에 12년간 은거하면서 항일비밀결사단체인 만당(卐堂)을 조직했고 계몽운동, 불교정화운동 등을 펼쳤다.
1919년 3.1독립선언에 참여했던 그는 지인들과 교류하면서 이곳 안심료는 1930년대에 지은 단층의 평범한 요사이지만 한용운스님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한국 불교의 법맥을 이은 유서깊은 장소이다. 또한 만해 한용운과 김범부가 분신공을 한 승려에 대한 이야기 나눔을 듣고 안심료에 마침 머물고 있던 김동리는 이 소재를 소설로 썼다.
만해 한용운은 김범부 석란사 세분이서 '소신공양'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고 영감을 얻었다. 이 소설이 김동리의 역작 '등신불'이다. 이곳에서 김동리는 '황토기' '바위' 등을 썼다. '공간배경으로 삼았지만 절이라는 배경분위기는 역시 다솔사를 연상하며 글을 썼고 '등신불'의 산실이 바로 '안심료'이다.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86 다솔사 입구
御禁穴封表(어금혈봉표) 光緖(광서)11년 을유 구월.
광서는 청나라의 연호이고 1885년 9월, 임금의 명으로 다솔사 경내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금한 표식이다.
광서는 청나라의 연호이고 1885년 9월, 임금의 명으로 다솔사 경내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금한 표식이다.
大陽樓(대양루)
다솔사 대양루(多率寺 大陽樓)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다솔사는 503년(신라 지중왕 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岳寺)라 불렀으며, 636년(선덕여왕 5)에 부속건물 2동을 건립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그 후 자장율사(慈藏律師), 의상대사(義湘大師) 등 고승들이 머물면서 건물을 더 짓고 영봉사(靈鳳寺)로 불렀으며,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부속건물 4동을 건립하고 다시 다솔사라 개칭하였다 한다. 그 뒤에도 다솔사는 전란 등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다.
대양루는 1748년(영조 24)에 지은 건물이다. 중심 불전인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마주보고 있는 이 건물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거나 불구(佛具)를 보관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대양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에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의 건물로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면 기둥의 간격이 3m가 넘을 정도로 위풍당당하다. 누각 아래쪽 기둥들은 뒤틀어진 고목의 밑동처럼 자연스러운 반면, 위쪽 기둥은 잘 다듬은 목재를 사용해 질서정연한 모습이어서, 같은 건물임에도 서로 다 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큰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받침기둥을 많이 사용하지 않은 채 건물 가운데에 10m가 넘는 대들보 하나만을 설치하여 엄청난 지붕의 하중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다솔사는 503년(신라 지중왕 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여 영악사(靈岳寺)라 불렀으며, 636년(선덕여왕 5)에 부속건물 2동을 건립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그 후 자장율사(慈藏律師), 의상대사(義湘大師) 등 고승들이 머물면서 건물을 더 짓고 영봉사(靈鳳寺)로 불렀으며, 신라 말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부속건물 4동을 건립하고 다시 다솔사라 개칭하였다 한다. 그 뒤에도 다솔사는 전란 등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를 하였다.
대양루는 1748년(영조 24)에 지은 건물이다. 중심 불전인 적멸보궁(寂滅寶宮)과 마주보고 있는 이 건물은 신도들에게 설법을 하거나 불구(佛具)를 보관하는 곳으로 이용되었다. 대양루는 정면 5칸 측면 4칸에 익공계(翼工系) 맞배지붕의 건물로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면 기둥의 간격이 3m가 넘을 정도로 위풍당당하다. 누각 아래쪽 기둥들은 뒤틀어진 고목의 밑동처럼 자연스러운 반면, 위쪽 기둥은 잘 다듬은 목재를 사용해 질서정연한 모습이어서, 같은 건물임에도 서로 다 른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큰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내부에 받침기둥을 많이 사용하지 않은 채 건물 가운데에 10m가 넘는 대들보 하나만을 설치하여 엄청난 지붕의 하중을 유지하고 있는 점이 이 건물의 특징이다.
寂滅寶宮(적멸보궁).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는 곳이다.
사천 다솔사(多率寺)에 대하여..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인 다솔사는 경남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절이다. 다솔사의 역사는 '곤양 지리산 영악사 중건비'에 기록되어 있는데 부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남쪽 바다에 닿아 있는 곤명은 그 진산을 지리산으로 하는데, 수백 리 흘러 곤명 북쪽에 봉우리를 맺은 봉명산에 절을 세웠다. 문창후 최치원과 지영·능민 두 스님이 거닐며 즐기던 곳이다. 신라 지증왕 4년 계미년 (503년)에 절의 역사가 시작됐으며 이름을 영악사(靈嶽寺)라 했다. 선덕여왕 5년 병신년(636년)에 자장법사가 중창(重)하여 다솔사(陀率寺)라 했다.' (중략)
다솔사(多率寺)는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대장군이 나오는 터이다. 아래 소나무 길을 통해 걸어 올라오다 보면 오른편에 어금혈 봉표(御禁穴 封標)라고 적혀 있다. 이는 어명으로 다솔사에 묘자리를 금지한다'는 의미다. 1890년 당시 지역 유지가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좋다는 말을 듣고 무덤을 만들려 하자 스님과 지역민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에 고종이 그 뜻을 받아들여 이곳에 표지석을 세웠다.
다솔사를 포함한 봉명산 일대에는 많은 인재가 나고 거쳐 갔다. 특히 불의에 맞서 일본에 항거한 승려와 지식인이 이곳을 본거지 삼아 항일 활동을 펼쳤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다솔사를 승병기지 삼아 의병 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 적멸보궁 오른쪽에 위치한 응진전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머물며 수도한 곳이다. 만해뿐 아니라 김법린(1899~1964)과 최범술(1904~1979)이 이 곳을 기점으로 독립운동과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소설가 김동리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적멸보궁 아래 안심료에 머물며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조계종 제14교구 범어사의 말사인 다솔사는 경남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절이다. 다솔사의 역사는 '곤양 지리산 영악사 중건비'에 기록되어 있는데 부분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남쪽 바다에 닿아 있는 곤명은 그 진산을 지리산으로 하는데, 수백 리 흘러 곤명 북쪽에 봉우리를 맺은 봉명산에 절을 세웠다. 문창후 최치원과 지영·능민 두 스님이 거닐며 즐기던 곳이다. 신라 지증왕 4년 계미년 (503년)에 절의 역사가 시작됐으며 이름을 영악사(靈嶽寺)라 했다. 선덕여왕 5년 병신년(636년)에 자장법사가 중창(重)하여 다솔사(陀率寺)라 했다.' (중략)
다솔사(多率寺)는 '많은 군사를 거느린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풍수지리학적으로 보면 대장군이 나오는 터이다. 아래 소나무 길을 통해 걸어 올라오다 보면 오른편에 어금혈 봉표(御禁穴 封標)라고 적혀 있다. 이는 어명으로 다솔사에 묘자리를 금지한다'는 의미다. 1890년 당시 지역 유지가 이곳이 풍수지리적으로 좋다는 말을 듣고 무덤을 만들려 하자 스님과 지역민들이 반대 상소를 올렸다. 이에 고종이 그 뜻을 받아들여 이곳에 표지석을 세웠다.
다솔사를 포함한 봉명산 일대에는 많은 인재가 나고 거쳐 갔다. 특히 불의에 맞서 일본에 항거한 승려와 지식인이 이곳을 본거지 삼아 항일 활동을 펼쳤다. 임진왜란 때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다솔사를 승병기지 삼아 의병 활동을 한 것이 유명하다. 적멸보궁 오른쪽에 위치한 응진전은 만해 한용운 스님이 머물며 수도한 곳이다. 만해뿐 아니라 김법린(1899~1964)과 최범술(1904~1979)이 이 곳을 기점으로 독립운동과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소설가 김동리는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적멸보궁 아래 안심료에 머물며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펼쳤다고 전해지고 있다.
저 현판이 무슨 글인지 궁금해서 물어보니 竹爐之室(죽로지실)이라고 하신다.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서 곡우차를 선물받고 그 답례로 써준 글씨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가 초의선사에게서 곡우차를 선물받고 그 답례로 써준 글씨라고 한다.
만당 근거지 – 다솔사
관리번호 : 43-1-57 / 관리자 : 다솔사 / 소재지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 417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결성된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만당의 근거지이다.
불교계 청년들은 1930년 5월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호국 불교의 전통을 잇고, 한국 불교의 자주화와 대중화를 위하 만당(卐堂)을 조직하였다.
만당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만당 주도자들은 일제의 식민불교 정책에 대항하면서 다솔사를 근거지로 불교혁신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관리번호 : 43-1-57 / 관리자 : 다솔사 / 소재지 :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다솔사길 417
만해 한용운을 중심으로 결성된 불교계 항일 비밀결사 만당의 근거지이다.
불교계 청년들은 1930년 5월 한용운의 영향을 받아 호국 불교의 전통을 잇고, 한국 불교의 자주화와 대중화를 위하 만당(卐堂)을 조직하였다.
만당은 국내뿐만 아니라 일본 도쿄에도 지부를 설치하여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만당 주도자들은 일제의 식민불교 정책에 대항하면서 다솔사를 근거지로 불교혁신과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