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윤 의열투쟁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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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 1328-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경계망을 뚫고 중국으로 탈출하였다가 그해 12월 단신으로 다시 국내로 들어와 고향친구 최수봉동지와 함께 밀양 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여 일차목표를 달성하셨다. 불행하게도 최수봉동지는 일경에 체포되었고, 선생께서는 친구를 잃은 피맺힌 한을 조국광복으로 씻겠다는 강열한 일념으로 남천강 주중으로 피신하여 또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의열단 활동을 지도하였다.
선생께서는 1922년 3월 일본 육군대장 타나카 기이찍 상해를 방문할때, 이종암동지와 함께 폭탄을 제조하여 김익상과 오성륜으로 하여금 그를 폭사핟고록 지휘하였다. 이 거사는 전일본군을 경악하게 하였을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기상을 전중국 대륙에 널리 떨쳤다.
이렇듯 의열단의 실행부가 전방위 폭력항쟁을 계속적으로 감행할 수 있었던것은 선생을 비롯한 김원봉, 이종암, 한봉인, 윤자영등 5인으로 구성된 최고 참모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5인참모부는 의열단 최고 의사결정 기국로, 계획의 입안, 자금동원, 대외정치선전등 의열단의 모든 활동을 조직적으로 계획하고 총괄지휘하였다.
1924년에 이르러 일제의 전방위 압박전략으로 의열단은 극심한 자금난과 조직활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게되었다.
이러한 어려움속에서도 그해 3월 선생은 일본 총선거및 임시의회 개회를 저지하기위해 비밀결사대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생께서는 1924년 상해에서 개최된 상해청년동맹 창립에 의열단 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운동단체의 연대와 단결을 호소하였을뿐만 아니라 1925년 상해파 고려공산당 중심의 청년동맹과의 노선공방에서 민족주의 노선을 일관되게 주창하였다. 1925년 여름 의열단은 본부를 상해에서 광주로 이전하고, 1926년 초 김원봉은 의열단이 당면한 난국의 타개하기위해 다수 창단동지들의 견해와 달리 후배동지들과 함께 국민당 정치군사 간부학교인 황포군관학교에 합교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선생께서는 김원봉의 지나친 군사주의와 사회주의 편향에 반대하며, 의열단창단부터 7년간 줄기차게 지켜온 항일폭력투쟁과 민족주의 노선을 확고히 견지하여 황포군관학교 입교를 거부하였다. 역사는 약산의 군사주의 전략과 독립운동에서 사회주의의 포용도 평가해야하지만, 동시에 초산선생의 창단이념에 근거한 폭력투쟁과 독립운동에서 확고한 민족주의 노선도 당연히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후 선생께서는 창단이념에 입각한 의열단 재건을 주창하며 1926년 복건성 ?문에 계시다 천주 설봉사에 은신하였다. 선생께서는 설봉사에서 철저한 수련과 참선으로 심신을 단련하며 의열단 재건을 불태우다 1927년 10월 19일, 31세의 피끓은 젊은 나이로 한 많은 독립투사의 생애를 이억타국에서 마감하니 어찌 통한스럽고 애석한 일이 아니리오.
돌이켜보면 선생께서는 처절한 국내는 물론, 삭막한 만주벌판에서 감시심한 상해, 조국에서, 혼란스러운 광주에서, 의지할곳 없는 ?문에서, 이리 쫒기고 저리 피하면서도 불꽃같은 열정과 강철같은 의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천하시다 끝내 자신까지 모두 불태우고 가신 불세출의 애국자이셨다. 1946년 해방된 조국에 살아서 돌아온 약산 김원봉은 밀양 제일보통학교 운동장에 모인 청중들에게 선생을 지칭하여 "가장 잊히지 않는 동지"라고 말하였다 한다. 해방된 조국은 1968년 선생의 영전에 건국훈장을 추서하였다.
조국광복 60주년, 선생께서 타계하신지 77년! "초산 김상윤선생 의열투쟁기념비 건립추진위원회"는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을 계승학고 그 독립투쟁과 희생정신을 기리고자 이곳 기산리에 선생의 의열투쟁 기념비를 세운다.
보라! 여기 선생께서 남기신 조국의 독립정신과 애국애족 정신, 조선 의열단의 피 끓는 열정과 높은 기상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민족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내일을 살아갈 후손에게는 자랑스런 선조의 기상과 조국의 자부심이 자손만대에 이어질 것이니! 선생이시여! 번영하는 조국과 민족의 도약을 지켜보소서!
조국의 이름으로 왜노를 응징하노라! 의열단이 왜노에 대한 폭력 실행한 후 현장에 남긴 격문
구축왜노
의열단 최고의 이상, 구축왜노, 광복조국, 타파계급, 평등지권: 왜놈을 몰아내고, 조국을 해방시키고, 계급을 타파하고, 토지권을 평등하게 한다.
의열단 7가살 : 1. 조선총독이하 고관, 2. 군부수뇌, 3. 대만총독, 4. 매국적, 5. 친일파 거두, 6. 적탐, 7. 반민족 토호열신
의열단 파괴대상 : 1. 조선총독부, 2. 동양척식회사, 3. 매일신문사, 4. 각 경찰서, 5. 기타 왜노 중요기관
의열단 공약 10조
1.천하의 정의의 일을 먕렬히 실천한다.
2.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한다.
3.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된다.
4.단의 뜻을 우선하고 단원의 뜻에 급히 한다.
5.의백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한다.
6.언제 어디서든지 매월 1번씩 상황을 보고한다.
7.언제 어디서든지 모이도록 요청하면 꼭 응한다.
8.죽지않고 살아있어 단의 뜻을 이루도록 한다.
9.한 사람은 다수를 위하여, 다수는 한 사람을 위하여 헌신한다.
10.단의 뜻에 배반한 자는 척살 한다.

의열단 선언문(조선혁명선언) 요약은 독립기념관에 있는 탐방앨범을 보시길..

독립기념관 독립유공자들의 애국시, 어록비, 임시정부성립선서문, 한국광복군 선언문, 대한독립군 선언문
의열단 창단 애국지사
고문 황상규(백민) 1890년 경남 밀양 광복단원
고문 김대지(일봉) 1891년 경남 밀양 임시정부간부
후원 윤치형(김시화) 1893년 경남 밀양 밀양 만세시위 주도
후원 이수택(이일몽) 1891년 경남 밀양 광복단원
단장 김원봉(약산) 1898년 경남 밀양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김상윤(김옥) 1897년 경남 밀양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이성우 1899년 경남 밀양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한봉근(금산) 1891년 경남 밀양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한봉인 1898년 경남 밀양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윤세주(윤소룡) 1901년 경남 밀양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서상락 1893년 경북 달성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이종암(양건호) 1896년 경북 달성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신철휴(신환동) 1898년 경북 고령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권준(권중환) 1895년 경북 상주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강세우 1901년 함남 상수 길림 신흥무관학교
단원 배중세(배동선) 1893년 경남 창원 대동청년단
단원 곽재기(곽경) 1893년 충북 청주 대동청년단
경남 밀양시 상남면 기산리 1328-1 항일애국지사 초산 김상윤 선생 의열투쟁기념비를 찾아왔다.
애국선열 초산 김상윤 선생
광주김씨의 후예로 호는 초산이고 이곳 경남 밀양 출신.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 단체인 조선 의열단 창단을 주도하였다.특히 의열단의 최고 의결기구인 5인 참모부의 중심인물로 만주, 북경, 상해등지에서 침략자 일본을 응징할 무력투쟁의 계획수립, 자금조달, 폭탄제조, 단원교육, 거사지휘등 맹렬한 독립운동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1919.10 신흥무관학교 수료, 1919.11 조선의열단 창단, 1920.6 밀양폭탄 반입사건 수행, 1920.12 밀양경찰서 투탄 지원
1922.3 황포탄 다나까대장 저격지원, 1924.3 일본총선 비밀결사대 조직, 1924.5 상해 청년동맹 의열단 대표 참가, 1925.7 상해 청년동맹 민족주의 주창
항일독립투사 초산 김상윤 선생 의열투쟁 기념비
이 비는 광주김씨 22세손으로 이곳 기산리에서 1897년에 태어나신 독립운동가 초산 김상윤선생의 항일 의열투쟁 기념비이다. 선생은 1919년 밀양의 선각자이신 백민 황상규, 일봉 김대지 선생의 지도아래 밀양 동화학교를 거쳐 중국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동문수학한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한봉근, 한봉인 등 고향 친구와 항일 무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을 창단한 13인 중의 한 분이시다. 최수봉동지와 함께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고 다나까 대장 저격사건 등 의열단의 거사활동을 총괄 지휘하는 5인 참모부의 일원으로 초기 의열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분이시다. 1924년 상해 청년동맹결성이 의열단 대표로 참여하여 188인의 발기인 중 한 분으로 독립운동단체의 연대와 단겱을 호소하고 민족주의 노선을 주장한 선도적 독립운동가이셨다.
선생은 1927년 혈기 왕성한 31세에 이역 중국땅에서 순국하시기까지 짧은 생을 불꽃같은 열정과 강철같은 의지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천하시다가 끝내 자신까지 모두 태우신 불세출의 애국자이셨다.
해방 후 번영하는 조국은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선생은 경주인으로 휘는 상윤이고 호는 초산이며 이명은 옥(玉) 또는 옥(鈺)으로 썼다. 1897년 10월 7일(음력 9월 12일) 이곳 기산리에서 광주 김공 휘 태영과 유인 밀성박씨의 5남매중 3남으로 태어나셨다.
남달리 영특하고 총명했던 선생께서는 1910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되자 14세의 소년임에도 종남산에 올라 대성통곡하였다 하니 이는 선생의 남다른 조국애의 발현이었으리라. 선생은 밀양의 선각자 정홍표선생이 세운 동화학교에서 김대지, 황상규선생의 지도하에 고우 약산 김원봉과 함게 민족독립사상을 연마하였다. 이어 선생께서는 서울 중앙학교를 거쳐 중국 길림성 유하현에 이회영, 이시영선생이 세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고, 이종암동지등과 함께 군사학과 폭탄제조기술등을 습득하였다. 기미년 3.1운동이 가시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비폭력운동의 한계를 젉감하고, 그 해 동짓달 초아흐렛날 신흥무관학교에서 동문수학한 김원봉, 김상윤, 이종암, 윤세주등 13인이 황상규, 김대지선생을 고문으로 모시고, 항일폭력저항단체를 결성하니, 그것이 바로 일제의 전표과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조선의열단 창단이었다. 창단 이듬해인 1920년 의열단은 밀양경찰서를 첫번째 폭파대상으로 결정하고 상해로부터 무기반입을 줃고한 사건이 폭로된 6월에 다수 동지듥이 체포 투옥되었으나, 선생께서는 신출귀몰하게 삼엄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