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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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111-2
탐방로그
춘천시 남면 가정리 1056-1 도로변에 유하석, 유태석, 유해동 선생의 묘 위치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보이는 큰 나무 뒤에 유하석 선생의 묘소가 위치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로 합류하니 이로부터 시작된 선생의 항일투쟁은 애국충정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혈루의 생애를 걸었다. 자부의 친정 부친인 소계 권일선의 민족사상교육은 위정척사 정신운동과 연계되어 많은 의병을 배출하여 항쟁에 참여하고 사돈 양가의 부인들은 윤희순 여사가 주도하는 안사람 의병은 군자금을 모아 화약제조와 의병활동을 도우니 남녀노소가 항일투쟁에 참여한 구국의 거사였다. 범사가 여의치 못한 전황은 중과부적의 감당키 힘든 형세였으나 이는 오직 국권수호란 대의명제 아래 신명을 바친 투쟁이었기에 승패를 초월한 민족자존의 성전이다. 국내외의 혼미한 정세는 부득이한 후일을 기약하고 회심의 서북행을 결행함에 이르니 중형과 함께 강릉을 거처 평안도 초산에 당도하여 친일개화 집권층의 반성을 촉구하는 재격 백관문을 발표하고 망명의 길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동 심양과 노령 연해주 등지에서 일편단심 구국항쟁의 민족혼을 불살으니 이역만리 타국에서 시공을 뛰어넘는 형극의 고초가 아니리요. 1897년 10월 고종황제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한 선생은 사돈인 권일선이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을 인수하여 요동으로 들어가 중형 의암에게 전달하고 일구월심 왜적을 응징할 기회를 모색 중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보를 접한 선생은 거족적인 항쟁을 결행할 목적으로 1907년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다 동년 10월 28일 향리인 가정리에서 거사를 위한 비밀회의 중 일경의 급격으로 신변이 황급함에 중형의 화를 면토록 피신시키니 잔인무도한 왜적의 무리가 자행한 방화로 선생의 생사가 백척간두에 직면함에 화염을 헤치고 나온 선생은 준엄한 소리로 만행을 질타함에 재천지원수 왜적의 무리가 휘둘은 흉검에 장렬히 순국하시니 선생의 향년이 58세라. 오평통재라. 선생께서 뿜어내신 의혈은 나라를 지키려는 온 겨레의 충혼이니 하늘이 동하고 땅이 슬퍼하여 강물도 따라울었으니 이 비통함을 어찌 필설로 형언하오리까. 재천에 계신 영령이시여. 구곡 간장 맺히고 서린 천추의 한 이제 거두시고 편안히 안식하옵소서. 삼가 영전에 머리숙여 명복을 비옵나이다. 선생이 끼치신 희생정신과 숭고한 유지는 후세에 면면히 계승되어 애국애족의 민족정기로 영원히 승화되리니 바라옵건대 다시는 이땅에 비운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고 7천만 민족의 염원인 통일광복과 번영된 나라를 이룩할 수 있는 슬기로운 지혜와 용기를 인도하옵소서. 정부는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하여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6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다. 선생의 유해는 당시 황망 중에 홍주 서면 마곡리 운회산 정좌에 안장되었고 1908년 11
로 합류하니 이로부터 시작된 선생의 항일투쟁은 애국충정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혈루의 생애를 걸었다. 자부의 친정 부친인 소계 권일선의 민족사상교육은 위정척사 정신운동과 연계되어 많은 의병을 배출하여 항쟁에 참여하고 사돈 양가의 부인들은 윤희순 여사가 주도하는 안사람 의병은 군자금을 모아 화약제조와 의병활동을 도우니 남녀노소가 항일투쟁에 참여한 구국의 거사였다. 범사가 여의치 못한 전황은 중과부적의 감당키 힘든 형세였으나 이는 오직 국권수호란 대의명제 아래 신명을 바친 투쟁이었기에 승패를 초월한 민족자존의 성전이다. 국내외의 혼미한 정세는 부득이한 후일을 기약하고 회심의 서북행을 결행함에 이르니 중형과 함께 강릉을 거처 평안도 초산에 당도하여 친일개화 집권층의 반성을 촉구하는 재격 백관문을 발표하고 망명의 길 압록강을 건너 중국 요동 심양과 노령 연해주 등지에서 일편단심 구국항쟁의 민족혼을 불살으니 이역만리 타국에서 시공을 뛰어넘는 형극의 고초가 아니리요. 1897년 10월 고종황제의 소명으로 일시 귀국한 선생은 사돈인 권일선이 모금한 독립운동자금을 인수하여 요동으로 들어가 중형 의암에게 전달하고 일구월심 왜적을 응징할 기회를 모색 중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보를 접한 선생은 거족적인 항쟁을 결행할 목적으로 1907년 국내로 잠입하여 활동하다 동년 10월 28일 향리인 가정리에서 거사를 위한 비밀회의 중 일경의 급격으로 신변이 황급함에 중형의 화를 면토록 피신시키니 잔인무도한 왜적의 무리가 자행한 방화로 선생의 생사가 백척간두에 직면함에 화염을 헤치고 나온 선생은 준엄한 소리로 만행을 질타함에 재천지원수 왜적의 무리가 휘둘은 흉검에 장렬히 순국하시니 선생의 향년이 58세라. 오평통재라. 선생께서 뿜어내신 의혈은 나라를 지키려는 온 겨레의 충혼이니 하늘이 동하고 땅이 슬퍼하여 강물도 따라울었으니 이 비통함을 어찌 필설로 형언하오리까. 재천에 계신 영령이시여. 구곡 간장 맺히고 서린 천추의 한 이제 거두시고 편안히 안식하옵소서. 삼가 영전에 머리숙여 명복을 비옵나이다. 선생이 끼치신 희생정신과 숭고한 유지는 후세에 면면히 계승되어 애국애족의 민족정기로 영원히 승화되리니 바라옵건대 다시는 이땅에 비운의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고 7천만 민족의 염원인 통일광복과 번영된 나라를 이룩할 수 있는 슬기로운 지혜와 용기를 인도하옵소서. 정부는 대한민국 헌법에 의거하여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86년에 대통령 표창을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다. 선생의 유해는 당시 황망 중에 홍주 서면 마곡리 운회산 정좌에 안장되었고 1908년 11
월 21일 배 남양홍씨와 합폄하였다가 1995년 10월 10일 손 화상이 가정리 약암 독산 임좌원으로 이장하게 되니 자는 제필이요, 손은 화상이며 손녀는 여흥 민혁기 경주 정동식 전주 이재수다. 화상은 연복 연식 2남과 희숙 희자 희종 3녀를 두었고 연복은 영규 현주 1남 1녀와 연식은 웅규 용규 봉규 3남을 두었다.

을해 서기 1995년 10월 10일
후학 안동 권희동 근찬
국가보훈처 광복회 강원도지부 후원
강원도 춘천시장 배계섭 건립
춘천시 남면 가정리 1056-1 도로변에 유하석, 유태석, 유해동 선생의 묘 위치 표지석이 있다.
표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보이는 큰 나무 뒤에 유하석 선생의 묘소가 위치한다.
GPS상의 주소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산 111-2이다.
묘비에는 '愛國志士 高興 柳公 夏錫 之墓(애국지사 고흥 류공 하석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선생의 휘는 하석이요, 자는 여삼이요, 호는 산수이니 고흥인이다. 려조에 휘 청신도첨의정승 시 영밀 휘 탁 시중 시 충정 조선조에 휘 습사 조전서 시 양정은 원조요, 부제학 휘 숙은 선생의 10조이다. 휘 관 휘 영원은 고증조인데 모두 증조 봉대 동몽교관이요, 조 휘 석은 통덕랑이다. 을유 1849년 2월 28일 춘천 남면 가정에서 고 휘 중곤과 비 고령 신철모의 녀 사이에 3남으로 출생하니 백형은 우석이요, 중형은 인석으로 호는 의암이니 의군13도부총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온후하며 충효예의의 실행과 돈독한 형제 우애로 인근 유생의 칭송과 문중 어른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하니 삼강오륜을 덕목으로 한 선생의 삶은 동방의 예의를 으뜸으로 삼는 한민족의 표상이다. 암울한 국운을 분통 함원하고 있을 때 1895년 10월 천인공노할 왜적이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니 이에 통분한 선생은 효의 근원은 충임을 깨닫고 누란위기에 처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거의를 결심하니 때는 마침 모친의 상중이라 여막에서 시묘 중인 중형 의암께서 호좌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제천으로 출진하니 선생은 이듬해 1896년 1월 뜻을 같이 한 지사들과 제천 의진으
선생의 휘는 하석이요, 자는 여삼이요, 호는 산수이니 고흥인이다. 려조에 휘 청신도첨의정승 시 영밀 휘 탁 시중 시 충정 조선조에 휘 습사 조전서 시 양정은 원조요, 부제학 휘 숙은 선생의 10조이다. 휘 관 휘 영원은 고증조인데 모두 증조 봉대 동몽교관이요, 조 휘 석은 통덕랑이다. 을유 1849년 2월 28일 춘천 남면 가정에서 고 휘 중곤과 비 고령 신철모의 녀 사이에 3남으로 출생하니 백형은 우석이요, 중형은 인석으로 호는 의암이니 의군13도부총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단정하고 온후하며 충효예의의 실행과 돈독한 형제 우애로 인근 유생의 칭송과 문중 어른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하니 삼강오륜을 덕목으로 한 선생의 삶은 동방의 예의를 으뜸으로 삼는 한민족의 표상이다. 암울한 국운을 분통 함원하고 있을 때 1895년 10월 천인공노할 왜적이 국모 명성황후를 시해하니 이에 통분한 선생은 효의 근원은 충임을 깨닫고 누란위기에 처한 국권을 수호하기 위한 거의를 결심하니 때는 마침 모친의 상중이라 여막에서 시묘 중인 중형 의암께서 호좌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제천으로 출진하니 선생은 이듬해 1896년 1월 뜻을 같이 한 지사들과 제천 의진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