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관 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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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305-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獨立義士 咸平李公 諱 相寬 紀績碑(독립의사 함평이공 휘 상관 기적비)
독립의사 이공의 휘는 정헌이요. 관은 함평으로 고려 진무위 대장군 함풍군 휘 언이 시조요. 누전하여 증 통정대부 병조참판 휘 종수는 파선조로 공의 15대조요. 삼전하여 문과시간 지제교 휘 추근 호 죽담은 공의 12대조시다. 이전하여 무과 도총부 경력 절충장군 행용양형 부호군 휘 선지가 밀양에 존거하니 공의 10조요. 고조의 휘는 능운 호 일옹이요. 증조는 통정대부 절충장군 중추부사 오위장 휘 유봉이요. 조는 부사과 휘 택서 호 지수요. 고휘는 민주요. 비는 안동권씨 의석 녀로 공은 1890년 4월 1일 부북면 퇴로리에서 출생하여 백부 민우후로 출계하니 비는 진주유씨 원릉참봉 진성녀라. 공은 경술국치로 국권을 잃었을때 망국의 한을 품고 1918년 당년 28세에 만주 환인현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 창립자인 이시영 공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 학교를 졸업하니 이시영 공은 공에게 재정 관리역을 맡겼다. 1922년에는 밀양으로 돌아와 부인과 아들 계옥 및 동생 경헌 등 전가족을 남만주 가호강으로 옮겨 정착시키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당시 만주지역 독립군 조직은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로서 북만 동만 남만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공은 정의부 소속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부득이 상관으로 개명하고 39세때에 환인현 남구 총관이 되어 독립군 강화에 힘쓰던 중 1929년 5월 28일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가 국민부로 통합됨에 따라 공은 경제위원장 장승언의 부관으로 임명받아 재정 및 물품 조달 업무 일체를 주관하였다. 당시 지속적인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는 군자금 확보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때로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인 신빈 등 주변 11개현을 동분서주하면서 엄동설한을 물릅쓰고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1931년 12월 조선혁명당과 국민부 중앙 주요간부 30여 명이
흥경현의 여세명 집에서 전략회의를 하던 중 친일단체였던 보민회의 밀고로 현장에서 조선혁명당 집행위원 주석 이호원 군사위원회 위원장 김보안 등 13명의 주요 간부들이 왜경에 의해 체포되는 흥경사건이 일어났다. 1934년 국민부는 각군 부대장 회의를 소집하여 국민부를 조선혁명군으로 개칭하고 양세봉을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추대하고 참모장에는 김학규 조선혁명당 주석에 고이허, 재정부장에 공이 임명되어 중국 의용군과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특히 공은 군자금 확보를 위해 한인에 대하여 매호당 1년에 2원의 세금을 부과하여 군자금을 확보하는 한편 조혼 중혼 술주정 아편 흡연 도박 미신 신앙자에게 벌금을 매겨 동족간의 일체감과 애국심의 고취에도 노력하였으나 일제의 치밀한 작전과 억압으로 소기의 목적 달성이 순조롭지 못하게 되자 이에 공은 혁명군의 어려운 재정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관할지역에서는 식량의 외부 반출을 금지하고 불태환 지폐인 양표를 발행하여 조선혁명군 대원이 식대로 현금 대신 지불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양세봉 고이허 등과 협의하여 혁명군 외교관원인 최동오를 비밀리에 남경에 파견하여 국민당 정부에 항일군자금 지원을 처원하였고 1934년 6월 혁명군참모장 김학규를 다시 남경 국민당 정부에 파견함과 동시에 남경에 있던 의열단장 김원봉과 교섭하여 장개석과의 면담을 추진하는 등 밖으로는 혁명군 유지활동을 위한 외교적인 노력과 안으로는 양세봉과 함께 만주지역 한인사회 농민들은 물론 만주인들과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함으로서 지대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조선혁명군의 항일투쟁활동의 중심에는 공이 있다는 것을 탐지한 일제는 위만주국 군경과 공조하여 공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거금의 현상금과 함께 특무원을 별도로 파견하였다. 당시 남만주에서는 이상관이란 이름보다 후두부에 혹 때문에 혹뿔이 영감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었기에 공은 혹을 제거하고 얼굴에는 황산으로 마마를 만들어 일제가 알아볼 수 없도록 변신하였다. 한편 일제는 공의 가족 전원을 환인현성 헌병대에 구금하고 공의 투항을 유도하면서 온몸에 피투성이가 되도록 갖은 고문을 서슴치 않았다. 아! 슬프다. 1936년 12월 15일 동변도 특별공작부 환인지부 횡도천 공작원 정만기 박수림이가 공의 행적을 찾아내어 횡도천 경찰을 앞세워 공을 손호봉 집에서 체포하여 환인현 헌병대로 압송한 다음날 항공기편으로 봉천 북대영으로 이송한 후로는 일체의 흔적마저 없어졌으니 필시 적수에 의해 훼기 순국하였음이 분명한데 시해마저 수습치 못하였으니 분묘가 있을 리 없고 순국한 일자마저 알 수 없어 피체일을 기일로 삼고 우금봉사해 오던 중 광복 63년 만에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공의 영전에 추서되어 그 위적이 늦게나마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니 하늘이 무심치 않음이로다. 배 밀성손씨 홍수녀는 1892년생으로 만주에서 부군의 독립운동을 음양으로 돕다가 1928년 무진 5월 21일
엽세하니 묘는 타국인 만주 안동성 환인현 횡도천 촌사평 가둔 북향 안산 계좌에 안장되었다. 자에 계옥이요. 손에 웅범 태범 손녀에 정숙 손숙이며 증손에 재상 재근 병찬이요. 그 외는 다번하여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현손 태범보가 그 족형 전 밀양부시장 종범씨와 함께 밀양문화원으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일생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친 왕고를 생각하면 읍혈하지 않을 수 없어 만시지탄이나 밀양시민들이 공의 행적을 기록하여 후인들의 귀감으로 삼고자 하니 일언을 아끼지 말라고 하거늘 불문으로 이를 어찌 감당하오리마는 일찍 공을 흠모하는 한 사람으로서 고사할 수 없어 공의 행적을 위와 같이 약술하고 이어 명하노니!
국권을 상실했으니 일신을 돌 볼 겨를이 어디 있었으랴. 독립운동에 헌신하여 견위수명하니 천출의 충의로다. 일제에 피체되어 순국함에 하늘도 통탄하였으니 건국훈장 애국장이 어찌 공의 위적에 미치겠는가. 이 앞을 지나는 후인들은 경건이 옷깃을 여미고 공의 행적을 가슴에 새겨 귀감으로 삼을 지니라.
서기 2010년 입춘절 밀양문화원장 진주후인 류창목 삼가 짓다
독립의사 기적비건립위원회
위원장 밀양시장 엄용수
위원 김건식 이원기 손백식 이장범 황의중 손태곤 하덕진 전태진 권오익 박철곤 박창기 이계익 이관범 손기현 손태관 이언한 류창목 장익근 류석영 손진곤 이종범 장태철 이판범 이재기 이순행 이곤범
경남 밀양시 부북면 퇴로리 305-1 퇴로복지회관 앞 이상관 선생 기적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