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밀양시 교동 480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이은상은 글을 짓고 유민목은 글씨를 쓰고 독립의열사 숭모비 건립위원회에서 삼가 이 비를 세우다
위원 임사록
액문 김병로 변영태 이계순 이남두 류길연 박용수
위원장 박현수 김동원 신수도 이재성, 감사 장봉달 손태규 박수익
부위원장 이헌정 이기성 이강준 백길수
총무 강해석 박익표 이상옥 박쾌수
재무 김홍득 석일정 손윤식 박수복, 장역 주재홍
위원 김종호 손경현 권태기 이유탁 김도호 박영섭
위원 임사록
액문 김병로 변영태 이계순 이남두 류길연 박용수
위원장 박현수 김동원 신수도 이재성, 감사 장봉달 손태규 박수익
부위원장 이헌정 이기성 이강준 백길수
총무 강해석 박익표 이상옥 박쾌수
재무 김홍득 석일정 손윤식 박수복, 장역 주재홍
위원 김종호 손경현 권태기 이유탁 김도호 박영섭
영남루에 있던 독립의열사 숭모비가 이곳으로 이전되었다.
獨立義烈士崇慕碑(독립의열사숭모비)
태백산 뻗은 줄기 화악산에 다시 솟고 운문, 비슬 내린 물이 들을 누벼 흐르는 곳 예가 바로 가야, 신라 오랜 전통이 서린 밀성 옛고을이라.
민족정기 영남 기백을 발휘한 인물들이 특히 이 고장에서 많이 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느냐.
조국이 그 한때 일제의 침략 아래 들었을 적에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하여 죽음도 말다 하지 않던 이 고을 의열사들 어찌 그리 장하시던고.
1919년 만세운동 해외에서 조직된 의열단의 첫번 의거가 이른바 두 차례의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인데, 먼저는 1920년 6월이요 다음은 11월의 일이었다.
첫번 사건의 주인공 백민 황상규 선생은 일찍 만주로 망명하여 폭탄을 국내로 들여보내고 따라 들어와 의거를 일으키려다가 이연에 체포되어 복역한 뒤 신간회 등 사회운동으로 일생을 보내고 1930년에 41세로써 별세했으며 당시 의열단원 이병철, 윤세주, 윤치형 선생들도
민족정기 영남 기백을 발휘한 인물들이 특히 이 고장에서 많이 난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느냐.
조국이 그 한때 일제의 침략 아래 들었을 적에 오직 조국 광복을 위하여 죽음도 말다 하지 않던 이 고을 의열사들 어찌 그리 장하시던고.
1919년 만세운동 해외에서 조직된 의열단의 첫번 의거가 이른바 두 차례의 밀양경찰서 폭탄사건인데, 먼저는 1920년 6월이요 다음은 11월의 일이었다.
첫번 사건의 주인공 백민 황상규 선생은 일찍 만주로 망명하여 폭탄을 국내로 들여보내고 따라 들어와 의거를 일으키려다가 이연에 체포되어 복역한 뒤 신간회 등 사회운동으로 일생을 보내고 1930년에 41세로써 별세했으며 당시 의열단원 이병철, 윤세주, 윤치형 선생들도
그와 함께 옥고를 같이 한 동지였으며, 특히 고인덕 의사는 출옥 후 1925년 10월 또 다시 거사를 하려다가 체포되자 옥중에서 혀를 끊어 자결하니 때에 나이 40세요.
다음 사건 주인공 최수봉 의사는 손소 만든 2개의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26세에의 젊은 나이로 대전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다시 한편 백암 윤세용 선생은 남만주로 망명하여 육군참의장으로 활약하다가 1941년에 74세로서 세상을 마치었고, 일민 손기정 선생, 김대지 선생들은 상해로 나가 한 분은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한 분은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활약하다가 다 같이 이역에서 별세했으며 단애 윤세복 선생은 남만주를 무대로 광복운동에 애쓰다가 적에게 체포되어 동지 10여 명과 밀양 출신 이원경 선생은 모두 순국하고 홀로 목단강 감옥에서 무기 복역 중 해방을 만나 고국으로 돌아와 대종교 제3세 교주로서 신도들을 지도하다가 1960년 2월에 82세로써 귀천하였으며, 그 밖에도 이 고장에는 애국지사 을강 전홍표 선생 등 많은 인물들이 계시었다.
이제 여기 이 고장의 의열사들의 사적을 대강 적었거니와 이것을 돌에 새겨 세우는 뜻은 다만 사적을 알리고자 함이 아니요. 가신 님들의 거룩한 혼을 위로하고 찬양하고 나아가 그 뜻을 길이 받들고자 함이니 이 앞을 지나는 누구나 발을 머물고 옷깃을 여미시고서 노래를 외우시라.
화악산 우러보니 푸른얼 서리었고
남강을 내다보니 붉은 뜻 뻗이었네
이 강산 이 겨레 하냥 길이 사시오리다.
서기 1965년 월 일
다음 사건 주인공 최수봉 의사는 손소 만든 2개의 폭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26세에의 젊은 나이로 대전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다시 한편 백암 윤세용 선생은 남만주로 망명하여 육군참의장으로 활약하다가 1941년에 74세로서 세상을 마치었고, 일민 손기정 선생, 김대지 선생들은 상해로 나가 한 분은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한 분은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활약하다가 다 같이 이역에서 별세했으며 단애 윤세복 선생은 남만주를 무대로 광복운동에 애쓰다가 적에게 체포되어 동지 10여 명과 밀양 출신 이원경 선생은 모두 순국하고 홀로 목단강 감옥에서 무기 복역 중 해방을 만나 고국으로 돌아와 대종교 제3세 교주로서 신도들을 지도하다가 1960년 2월에 82세로써 귀천하였으며, 그 밖에도 이 고장에는 애국지사 을강 전홍표 선생 등 많은 인물들이 계시었다.
이제 여기 이 고장의 의열사들의 사적을 대강 적었거니와 이것을 돌에 새겨 세우는 뜻은 다만 사적을 알리고자 함이 아니요. 가신 님들의 거룩한 혼을 위로하고 찬양하고 나아가 그 뜻을 길이 받들고자 함이니 이 앞을 지나는 누구나 발을 머물고 옷깃을 여미시고서 노래를 외우시라.
화악산 우러보니 푸른얼 서리었고
남강을 내다보니 붉은 뜻 뻗이었네
이 강산 이 겨레 하냥 길이 사시오리다.
서기 1965년 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