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석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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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546
탐방로그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 위치하고 있는 의암 유인석 유적지 내에는 그의 부인과 합장한 합장묘를 비롯해서 의열사, 관일약, 의병학교, 의병수련관, 의병기념관, 백범 김구 선생 친필고유비문, 순국 100주년 기념어록비 등이 세워져 있으며, 2000년 3월에 강원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병학교'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강원 춘천시 남면 가정리 546 의암 유인석 선생 유적지이다.
이곳은 항일 의병 투쟁을 주도하고 해외 독립군 기지를 개척한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한말(韓末) 의병장 의암 류인석의 묘역이다. 선생의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이다. 1842(헌종 8)년 이곳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났으며,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의 문하에 들어가 배웠다. 선생은 민족 수난 극복의 지도 이념으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을 실천한 대표적인 성리학자이며 강원 · 충청 · 황해 · 평안도 등과 중국 서간도에서 많은 구국 인재를 길러낸 교육자이다.
선생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1896년 2월 영월에서 호좌창의대장(湖左倡義大將)에 올라 제천 · 충주를 중심으로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여 친일 관료를 처단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었으나, 친일 관군(官軍)에게 패하여 황해도 · 평안도 등지로 이동하며 활동하다가 중국 통화현으로 망명하였다. 그 후 광무(고종)황제의 귀국을 권유하는 친서를 받고 일시 귀국하였다가 1898년 재차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0년 중국 청나라 의화단의 봉기로 귀국하여 국내에서 구국운동을 하다가 1908년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 · 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항일세력을 모아 1910년 6월 13도의군(十二道義軍)을 결성하고 도총재(都總裁)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8월 국권마저 빼앗기자 민의를 모아 성명회(聲明會)를 결성하고 회장에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에도 러시아 연해주, 중국 서간도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1915년 3월 14일 중국 봉천성(현, 遼寧省)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에서 서거하여 평정산(平頂山)에 안장되었다. 1935년 고향인 춘천시 남면 가정리 현 묘역으로 이장되었고,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2003년 3월에는 현 묘역이 강원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었고, 2004년 유적지 조성 사업으로 새로이 단장하였다.
묘비에는 '有明朝鮮毅庵柳先生之墓(유명조선 의암 유선생지묘)'라고 새겨져 있다.
'義烈門(의열문)'이라고 적혀있다.
'義烈祠(의열사)'라고 쓰여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