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외동 1261-5
- 탐방로그
- 김해시 외동 1261-5에 위치한 이윤재 선생 구 묘비를 찾았다. 이윤재 구 묘를 찾으러 가는 길에 같은 나비공원 내에 위치한 이윤재 조형물도 함께 볼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국학자 환산 이윤재님 무덤
공은 기원 사천 이백 이십 일년 십이월 이십 오일에 경상남도 김해에서 이용준씨의 맏 아드님으로 태어나다. 김해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김해 합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다가, 다시 대구 계성학교에서 학업을 닦은 후, 마산 창신학교, 의신여학교에서 일곱해 동안 평안북도 영변 슝덕학교에서 한 해 동안 교육에 종사하시었다. 삼일운동이 일어나자 그 곳에서 일본 관헌에게 잡히어 평양 감옥에서 삼년 동안 고초를 지난 후, 공은 큰 뜻을 품고, 즁국으로 가 국립 북경대학 사학과에서 사천 이백 오십 칠년 칠월까지 삼년 동안 역사를 연구하시고, 고국에 돌아오자 그 해 구월부터 평안북도 정주 오산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시었다. 공의 목적은 왜적의 악정으로 잊어버려가는 우리 말을 찾고 시들어가는 배달 넋을 살림에 있었다. 그리하여 사천 이백 오십 팔년 사월부터는 우리의 수도 서울로 와서 앉은 자리가 더울 사이도 없이 동으로 서으로 분주하게 협성학교 경신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의 교편을 차례로 잡으시었고 또 배재와 중앙의 두 고등
보통학교와 감리교신학교들의 교직을 겸임하기도 하시었으니, 이 여러 학교에서 공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실로 여러 만이 될것이다. 그러는 한편에 「한글」 편집을 홀로 맡아 출판하기에 골몰하시는 가운데, 그 씀이 부족하면 사천을 들여 발행을 계속하기도 하고, 혹은 전당을 잡히거나 저작권을 팔아 보태기도 하였으며, 또 「동아일보」 「조선일보」 그 밖의 신문과 잡지들에 글을 실어, 새 맞춤법을 널리 펴며, 혹은 선조들의 끼친 문화의 역사를 소개하였고, 또 사전 편찬에도 종사하였다. 청백한 공은 끼니가 없어도 태연하였다. 그리고 공은 늘 빈곤한 중에 값 없이, 또는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일만 많이 한 탓으로 때로는 빈혈증으로 졸도도 하고, 때로는 각혈로 넘어지기도 하였었다. 그러나 아무 갚음이 없고, 빈곤만이 따르는 공에게 또다시 액운이 닥쳐왔다. 사천 이백 칠십년 유월 칠일 동우회와 흥사단 사건으로 검거의 선풍이 일게 되자, 공은 서대문 감옥에서 한 해 동안 욕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 두번째 영오의 고초다. 그러나 공은 출옥하자 곧 대동출판사에서 출판물의 글과 맞춤법을 바로 잡는 일에 힘을 다 하였고, 그 뒤 기독신문사의 주필이 되어, 떨치지 못하는 교역자를 일깨우여, 여위어가는 신자들의 넋을 순결하게 하는 동시에 일반 사회보다 뒤진 교회 출판물의 한글 맞춤법을 바로 잡기에 노력하시었다. 피 흘리지 않고 우리 조선과 만주를 삼킨 왜적은 또 중국 침략전을 일으키는 한편 우리 조선 민족을 군티 없는 일본 사람으로 만들어볼량으로 학교에서 가정에서 우리 말까지 없애려고, 갖은 압박과 잔인무도한 악정을 베풀었다. 그리하여 사천 이백 칠십오년 시월 일일에 조선어학회는 이 학정에 유린을 당하게 되자, 공은 그 중심 인물로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갇히게 되었으니, 이 세번째 누설의 욕이다. 일년을 하루 같이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되었으나 공은 오히려 웃음으로 악마 같은 그들을 타이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은 그 악형과 고초로 말미암아 점점 쇠약하여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다음 해 구월 십삼일에 함흥 감옥으로 옮기게 되고, 또 예심에 붙게 되던 그 해 겨울, 곧 사천 이백 칠십 육년 십이월 팔일 찬 바람이 살을 에는 감옥 독방에서 병으로 고통하다가 의약은 커녕 따뜻한 물 한모금 얻어 마실 길 없이 한 많은 이 세상을 영원히 가시고 말았다. 공의 성격은 지극히 청렴하고 결백하였다. 지극히 인자하고 겸손하였다. 지극히 평화스러워 성내는 일이 없었다. 종교로는 예수교의 장로였으며 일생이 사업으로는 혀와 붓을 통하여서의 교육이었다. 인격 혁신과 정치 혁명을 위하여서는 해외에서 「흥사단」에 국내에 와서는 「수양동우회」애 관계하여 심력을 다하였고, 국사를 통하여 조선의 넋을 살리기 위항는 「진단학회」를 일으키었고 우리 말과 글을 바로잡기 위하여는 「조선어학회」의 중진이 되었던 것이다. 아! 슬프고 쓰린 일이다. 공이 일생을 두고 분투노력하던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보지
못하고 원수의 손에 희생되어 가시었다. 그러나 공은 저 누리에서도 원수의 몰락을 웃으면서 우리 겨레의 행운을 기뻐할 줄 믿는다. 공의 사사로의 생애를 돌아보면 오직 원갑 원주 두 아들과 아우 만재 문호를 지키고, 순경 무궁화 영애 세 딸을 두었는데, 맏이 김병제에게 가운데가 박종식에게 망내가 이혁종에게 시집 갔다. 아! 슬프다, 옷 깃을 적실뿐이다.
기원 사천 이백 칠십 구년 사월 육일 / 벗 한결 김윤경 지음 / 봄뫼 이각경 씀 / 환산 장의준비회 세움
기원 사천 이백 칠십 구년 사월 육일 / 벗 한결 김윤경 지음 / 봄뫼 이각경 씀 / 환산 장의준비회 세움
한뫼 이윤재 선생 묘비를 여기에 세운 사유
한뫼 선생은
● 1943.12.08. 함흥감옥에서 순국한 후 곧 동지들이 장의위원회를 구성하여 광주 이씨의 선향인 경기도 광주에 안장하였다.
● 1946.04.06. 위 장의위원회는 선생의 애국심과 한글사랑의 정신을 후세에 영원히 남기기 위해 묘전에 비를 삼가 세웠다.
● 1973. 선생의 묘소는 유족이 경북 달성군 다사면 마천산에 이장을 하였고
● 2013.09.28. 선생의 유해는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영원히 안장되었지만 묘비는 현충원 규정상 함께 옮길 수 없어 마천산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67년 세월을 함께한 묘비가 야산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은 선생을 기리고 존경하는 많은 분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였고 이러한 연유로 하여 한글학회와 유족 분들이 묘비를 선생의 고향인 김해의 한뫼 선생 조형물 곁에 세울 것을 희망하였는데 한뫼 선생 기념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김해문화원이 이러한 소중한 뜻을 받들어 경남동부보훈지청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세우게 되었다.
2016.10.04. 김해문화원
한뫼 선생은
● 1943.12.08. 함흥감옥에서 순국한 후 곧 동지들이 장의위원회를 구성하여 광주 이씨의 선향인 경기도 광주에 안장하였다.
● 1946.04.06. 위 장의위원회는 선생의 애국심과 한글사랑의 정신을 후세에 영원히 남기기 위해 묘전에 비를 삼가 세웠다.
● 1973. 선생의 묘소는 유족이 경북 달성군 다사면 마천산에 이장을 하였고
● 2013.09.28. 선생의 유해는 국립 대전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영원히 안장되었지만 묘비는 현충원 규정상 함께 옮길 수 없어 마천산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67년 세월을 함께한 묘비가 야산에 홀로 서 있다는 사실은 선생을 기리고 존경하는 많은 분들에게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하였고 이러한 연유로 하여 한글학회와 유족 분들이 묘비를 선생의 고향인 김해의 한뫼 선생 조형물 곁에 세울 것을 희망하였는데 한뫼 선생 기념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김해문화원이 이러한 소중한 뜻을 받들어 경남동부보훈지청의 도움을 받아 여기에 세우게 되었다.
2016.10.04. 김해문화원
한뫼.환산 선생의 묘비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비문으로서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깊은 문화재이다. 비문을 지은이는 한글학자요 독립운동가인 한결 김윤경 선생(1894~1969)이 지었고 글은 최초의 여성 기자이면서 한글 궁서체의 대가인 봄뫼 이각경 여사(1897~미상)가 썼다.
이 곳을 찾은 후손들이여! 민족혼이 담긴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모진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한없이 당당했던 애국지사 한뫼 이윤재 선생의 태산같이 높고 큰 뜻을 영원히 기억하길 바란다.
이 곳을 찾은 후손들이여! 민족혼이 담긴 우리말과 글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제의 모진 고문과 죽음 앞에서도 한없이 당당했던 애국지사 한뫼 이윤재 선생의 태산같이 높고 큰 뜻을 영원히 기억하길 바란다.
경남 김해시 외동 1261-5 나비공원 내 한뫼 이윤재 선생 구 묘비를 찾아왔다.
이윤재 구 묘를 찾으러 가는 길에 같은 나비공원 내에 위치한 이윤재 조형물을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