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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상남도 김해시 외동 1261-5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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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뫼 이윤재 선생은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투옥되신 분 중에서 효창 한징 선생과 더불어 순국하신 분이시다.
환산 선생(한뫼 이윤재 선생)의 묘소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돌산중턱에 계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한뫼 이윤재(李允宰) 선생 기념조형물
김해 출신(1888.12.25생), 호는 한뫼, 환산(桓山), 한글학자로 3.1운동에 참여하였고, 북경대학 사학과를 나온 민족주의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 1943년 12월 8일 함흥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2005년 6월 24일 기념조형물을 건립하였다.
김해 출신(1888.12.25생), 호는 한뫼, 환산(桓山), 한글학자로 3.1운동에 참여하였고, 북경대학 사학과를 나온 민족주의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로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체포. 1943년 12월 8일 함흥감옥에서 옥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숭고한 나라사랑 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2005년 6월 24일 기념조형물을 건립하였다.
국어학자로서의 업적
한뫼는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로서 최현배 등과의 만남을 통하여 국어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29년 10월 : 사전편찬 - 한뫼선생이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조직, 집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42년 가을까지 대부분 원고 완성.
1932년 5월 : 조선어학회 기관지로 「한글」을 새로 창간.
1933년 10월 : 맞춤법 통일안 제정 공포.
1934년 : 한국학 및 사학자들과 진단학회를 창립, 〈진단학보〉창간.
1936년 7월 : 표준어사정 - 제안 설명위원으로 활동한 뒤 1936년 10월 28일 발표.
1940년 6월 : 외래어 표기법 - 표기방안 확정하고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
1957년 10월 : 여섯권의 큰 사전을 완성 발간.
저서
1930년 10월 : 성웅 이순신 동아일보 연재 및 한성도서 출판.
1931년 5월 : 문예독본 상,하 합본 발간.
1933년 8월 : 대가락국 고도 김해 (신동아)
1934년 11월 : 대가락국 납능 (삼천리)
1940년 12월 : 열하일기 중 도강록 역서 외 다수.
한뫼는 한글학자 주시경의 제자로서 최현배 등과의 만남을 통하여 국어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1929년 10월 : 사전편찬 - 한뫼선생이 조선어사전 편찬위원회 조직, 집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1942년 가을까지 대부분 원고 완성.
1932년 5월 : 조선어학회 기관지로 「한글」을 새로 창간.
1933년 10월 : 맞춤법 통일안 제정 공포.
1934년 : 한국학 및 사학자들과 진단학회를 창립, 〈진단학보〉창간.
1936년 7월 : 표준어사정 - 제안 설명위원으로 활동한 뒤 1936년 10월 28일 발표.
1940년 6월 : 외래어 표기법 - 표기방안 확정하고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을 발표.
1957년 10월 : 여섯권의 큰 사전을 완성 발간.
저서
1930년 10월 : 성웅 이순신 동아일보 연재 및 한성도서 출판.
1931년 5월 : 문예독본 상,하 합본 발간.
1933년 8월 : 대가락국 고도 김해 (신동아)
1934년 11월 : 대가락국 납능 (삼천리)
1940년 12월 : 열하일기 중 도강록 역서 외 다수.
민족혼을 일깨운 교육자
한뫼 이윤재선생은 우리나라를 짊어져 나갈 젊은이들의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우리 민족의 근간인 국어와 국사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9년 : 김해의 합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
1913~17년 : 마산의 창신학교와 마산여고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음.
1919년 : 연변의 숭덕학교에서 교원으로 재직.
1925~26년 : 서울의 협성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국어독본과 국사 강의.
1929년 : 경신학교에서 교원으로 재직.
1931년 : 연희전문학교와 중앙고등보통학교 등 교직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학생을 지도 양성.
한뫼 이윤재선생은 우리나라를 짊어져 나갈 젊은이들의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우리 민족의 근간인 국어와 국사 교육을 통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9년 : 김해의 합성학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
1913~17년 : 마산의 창신학교와 마산여고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쳤음.
1919년 : 연변의 숭덕학교에서 교원으로 재직.
1925~26년 : 서울의 협성학교,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국어독본과 국사 강의.
1929년 : 경신학교에서 교원으로 재직.
1931년 : 연희전문학교와 중앙고등보통학교 등 교직을 역임하면서 수많은 학생을 지도 양성.
독립운동가로서의 업적
1919년 : 평안북도 연변의 숭덕학교에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교내의거에 가담, 평양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룸.
1924년 :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에 가담,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동지로 지냄.
1931년 : 만보산사건을 계기로 수양동우회사건을 조직하여 1938년 11월까지 1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룸.
1942년 : 10.1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홍원경찰서 유치장에서 1년 동안 온갖 악형을 받았으며, 치안유지법 위반죄(내란죄)로 기소되어 함흥 검사국에 이관, 수감생활.
1943년 : 12월 8일 새벽 5시 심한 고문과 추위와 주림 속에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차디찬 감방에서 향년 56세로 순국. 묘지는 1973년 봄 경복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에 이장.
1962년 : 3.1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노산 이은상」은 그의 행적을 들어 성인으로 추앙.
1919년 : 평안북도 연변의 숭덕학교에 재직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교내의거에 가담, 평양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룸.
1924년 : 도산 안창호의 흥사단에 가담,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동지로 지냄.
1931년 : 만보산사건을 계기로 수양동우회사건을 조직하여 1938년 11월까지 1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룸.
1942년 : 10.1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검거되어 홍원경찰서 유치장에서 1년 동안 온갖 악형을 받았으며, 치안유지법 위반죄(내란죄)로 기소되어 함흥 검사국에 이관, 수감생활.
1943년 : 12월 8일 새벽 5시 심한 고문과 추위와 주림 속에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차디찬 감방에서 향년 56세로 순국. 묘지는 1973년 봄 경복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에 이장.
1962년 : 3.1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노산 이은상」은 그의 행적을 들어 성인으로 추앙.
노산 이은상이 선생의 생애를 읊은 글이다.
병, 가난, 한글, 독립, 감옥, 절개, 죽음, 영생
이 말에 다신 주석 구태 찾아보고 싶소
말 중에 이 여덟 낱말이 바로 당신 팔자시지.
추모시 (1973년 노산 이은상)
삼동에 베옷 입고 냉돌에 살으셨고 철창 미룻방을 십년남아 나드시니
이 겨울 눈 속에 누우신들 차가운 줄이나 아실라고.
한뫼 이윤재(李允宰) 선생 어록비
(1888년 12월 24일 ~ 1943년 12월 8일)
우리는 꼭 바라고 나아갈 희망 한 가지가 있다.
그를 여기에서 기다랗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를 리 없다.
이 희망만은 어느 때 까지든지 꼭 이루고야 말리라는 것 까지도 잘 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이루면 잘살고 이루지 못하면 잘살지 못할 것이다.
병, 가난, 한글, 독립, 감옥, 절개, 죽음, 영생
이 말에 다신 주석 구태 찾아보고 싶소
말 중에 이 여덟 낱말이 바로 당신 팔자시지.
추모시 (1973년 노산 이은상)
삼동에 베옷 입고 냉돌에 살으셨고 철창 미룻방을 십년남아 나드시니
이 겨울 눈 속에 누우신들 차가운 줄이나 아실라고.
한뫼 이윤재(李允宰) 선생 어록비
(1888년 12월 24일 ~ 1943년 12월 8일)
우리는 꼭 바라고 나아갈 희망 한 가지가 있다.
그를 여기에서 기다랗게 말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모를 리 없다.
이 희망만은 어느 때 까지든지 꼭 이루고야 말리라는 것 까지도 잘 안다.
우리는 이 희망을 이루면 잘살고 이루지 못하면 잘살지 못할 것이다.
세계의 신풍조가 우리 땅에 밀려들어 온 지가 멀리론 벌써 1세기, 가까이로도 3,4년
이를 결코 짧은 기간으로 볼 것이 아니다.
적으나 뜻이 있고 힘이 있었던들 우리는 결코 오늘의 처지에 있지는 아니 하였을 것이다.
동서대지에 웅비 활약하여 세계의 주인 노릇 하기엔들 무엇이 부족하였을까!
너희들은 독립을 보리라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대명 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 국민으로 떳떳이 살 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1929년 경신학교에서)
이를 결코 짧은 기간으로 볼 것이 아니다.
적으나 뜻이 있고 힘이 있었던들 우리는 결코 오늘의 처지에 있지는 아니 하였을 것이다.
동서대지에 웅비 활약하여 세계의 주인 노릇 하기엔들 무엇이 부족하였을까!
너희들은 독립을 보리라
우리가 지금 일본의 총칼 밑에 눌려 산다고 언제나 이럴 줄 알아서는 큰 잘못이다.
나는 나이도 들었고 지금 형세로는 감옥에서나 죽게 생겼지만
너희들은 대명 천지 밝은 날에 내 나라 다시 찾고
독립 국민으로 떳떳이 살 날이 꼭 올 것이다. 너희들은 틀림없이 독립을 보리라.
그러자면 지금부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 (1929년 경신학교에서)
한뫼 이윤재는 어떤 분인가?
이윤재 선생은 한글과 독립운동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한글학자요 애국지사였다. 1888년 12월 24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에서 광주이씨(李氏) 용준(容駿)과 경주이씨 임이(任伊)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소년기에 한학을 배웠으며 김해동광초등학교를 졸업, 1909년 같은 동리에 사는 연일 정씨 윤회의 장녀 달성과 결혼하고 김해 합성(合成)학교에서 잠시 교직에 종사 신학문에 뜻을 두어 대구 계성학교와 북경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마산, 영변, 정주, 서울 등지의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국어.국사를 가르쳤고,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3.1운동을 주동하여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수양동우회 조작사건으로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또한 한글운동에 일생을 바쳐 조선어사전편찬, 한글맞춤법 통일과 "한글"이란 "국어연구"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경찰에 투옥되어 함흥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1943년 12월 8일 새벽 5시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하셨다.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한글의 계몽 보급 운동을 벌인 국어학자요 교육가, 민족사학자로서 그의 활동은 모두 구국운동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정부에서는 1962년 3.1절날 국가보훈처에서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이윤재 선생은 한글과 독립운동을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난 한글학자요 애국지사였다. 1888년 12월 24일 경남 김해시 대성동에서 광주이씨(李氏) 용준(容駿)과 경주이씨 임이(任伊)의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나 소년기에 한학을 배웠으며 김해동광초등학교를 졸업, 1909년 같은 동리에 사는 연일 정씨 윤회의 장녀 달성과 결혼하고 김해 합성(合成)학교에서 잠시 교직에 종사 신학문에 뜻을 두어 대구 계성학교와 북경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 뒤 마산, 영변, 정주, 서울 등지의 여러 학교에서 교편을 잡아 국어.국사를 가르쳤고, 연희전문학교에서 강의를 맡았다.
평북 영변의 숭덕학교에서 3.1운동을 주동하여 3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수양동우회 조작사건으로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또한 한글운동에 일생을 바쳐 조선어사전편찬, 한글맞춤법 통일과 "한글"이란 "국어연구" 잡지를 발간하였으며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홍원경찰에 투옥되어 함흥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1943년 12월 8일 새벽 5시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순국하셨다. 나라를 잃은 민족에게 한글의 계몽 보급 운동을 벌인 국어학자요 교육가, 민족사학자로서 그의 활동은 모두 구국운동과 관련되지 않은 것이 없다. 정부에서는 1962년 3.1절날 국가보훈처에서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경남 김해시 외동 1261-5 나비공원 내 한뫼 이윤재 선생 유적공원 한뫼 이윤재 선생 기념조형물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