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삼계동 1436-1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인류평등의 대의와 자유를 희구하는 민족적 항쟁과 조국의 독립을 만방에 고하여 민족정의를 발로한 3.1운동은 민족사내지 세계사에 빛나고 있다. 경술국치이후 이족의 압제하에 나라잃은 민족의 의분은 마침내 기미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독립선언문을 만방에 선포함으로써 독립만세의 메아리 지축을 흔들때 광무제의 인산에 참지를 방자 상경하여 중앙과 밀의 끝에 독립선언서를 의금에 감추고 적망을 피하여 마침내 동천의 불꽃이 이 고장 장유에 점화케하였으니 의남 김종훤청년이다. 공은 향리 동지를 규합하여 장유의거를 모의하였는대 범등포 갈대숲에서 신문리 외딴집에서 밀의는 거듭되여 태극기를 만들고 이동마다 밀지하여 마침내 약정한 4월 12일 정오 대청천변으로 운집한 군중은 자못 3000여명 대한독립만세소리 천지를 진동하였으니 장렬한
의거였다. 이 의거에서 동지 3인이 순사하였고 주모자들은 일헌에 피체되여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옥고를 치름으로써 끝났지만 탄희라. 민족은 불사하고 실기는 불후하나니 민국수립 20년 1967년 정미 4월12일 무계리 용두산 마루에는 장유향민의 정성으로 3.1독립운동기념탑을 제막하니 장유의거를 사실하였고 세세3.1절에는 향민이 향화를 올리고 있다. 장유면의거 주모자 일원이요 또한 3.1독립운동실록을 문고하니 김종훤지사는 본향 김해인이요 자호 야암하니 가락국 태조왕 후예이라. 중조 휘는 탁이니 고려 평리문하시중문경공의 20세손으로 1892년 임진2월 1일 본향 장유면 유하리에서 고 휘 원기공의 장남으로 출생하니 천품이 청직 강예 총혜하여 리숙에서 7년수학하여 문예일취하여 사리정론이라 당시 국세일비하고 내외정세 추이에 민감하여 뜻하는 바 있어 결연히 정주 오산학교에 입학하여 도산 안창호선생문하에서 민족개조와 조국독립을 주창하신 동화에 감명받어 형설지공하니 년급 23이라. 환향하여 장유신문의숙을 창설코 후편육영과 농민계몽에 진력하면서 장유청년회를 조직 대표하여 전국청년연맹과 제휴하며 비밀결사 대동단조직에 활액하는등 민족독립운동에 지하공작하다. 기미3.1독립운동 장유의거에서 일헌에 피검되여 모진 고문을 받았고 금산감옥에서 1년형고를 겪어니 28세때였다. 기미3.1운동이후의 민족 경애는 전락일락할것을 한탄하면서 자기 책려에 일념하여 오든바 고문여독이 38세에 시신경 고탕압으로 불?어실명하니 지사 주에??절이라. 두문불출 오직 조국독립을 기원할뿐이라. 일제의 마수 36년간 민족정기는 면면히 살아있어 마침내 을유해방을 맞이하니 53세이라. 실명체도임에도 장유면민의 중의에서 건국준비 장유면 위원장에 추대하다. 1948년 8월 15일 민국수립의 감격과 더불어 무자 9월 18일 서거하시니 향년 56이라. 장유
면 서면리 산병좌원에 장하였다. 배에 진양강씨 치희 녀 이라. 영윤에 익태 형태 정태 규태이라. 1968년 무신 3월1일 정부로부터 조국광복공로포장을 추서하다. 기미3.1운동사는 반세기를 보내고 지사의 장거 28주년 병진에 후사는 견갈지의함에서 이에 감응한 김해향민은 후원을 발의하여 취지통문함으로써 상응상조함이다. 유하리앞 정동산마에 수비하니 전통에 빛나는 3.1정신을 되새기며 지사의 유덕을 영세에 흠앙코저함이다.
야암 김종훤 지사 독립운동기적비
김종훤 지사 독립운동 기적비
김종훤(1892~1958) 지사는 1919년 4월 12일 무계리에서 약 3000명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1968년 3월 건국공로수상이 수여되고, 고을 후원회에서 장유면 유하리에 비를 세움. 1978년 3월 건립
김종훤(1892~1958) 지사는 1919년 4월 12일 무계리에서 약 3000명을 동원하여 만세 시위를 벌였다. 1968년 3월 건국공로수상이 수여되고, 고을 후원회에서 장유면 유하리에 비를 세움. 1978년 3월 건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