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17-1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을 의거 총지휘자로 추대하니 이 지방의 독립운동이 계획 추진되었던 것이다. 4월 12일 정오 십 수명의 군중들이 일시에 무계리 대청변에 모여들자 독립선언서의 낭독되고 만세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고 시위에 들어선 흥분한 군중은 왜적의 헌병분견대를 포위하였으니 이 거사의 동지 손명조 김선오 김용이 등 3명이 적의 흉탄에 절명하기까지 하였었다. 그러나 이 지방민들은 겨레의 굴욕이 죽음보다도 참기 어려움을 통감 이에 벗어나려고 독립만세를 더욱 크게 외쳤으니 그 의가 하늘에 치솟고 남음이었다. 공은 거사 즉후 많은 동지들이 체포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진 헌병대에 들어서서 적을 통렬히 질책하였으며 또 이 거사는 오직 자기 한 개인이 계획했음을 역설 다른 이를 연계시키려 하지 않았고 2년여의 옥고를 치르면서 그 모진 고문에도 시종일관 의연하여 뜻을 굽히지 않았으니 모두가 그 절개를 우러러 보았다. 공이 처음 왜적 감옥에 갇히니 모부인께서 찾아와 사내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추호도 굴하지 말라고 간곡히 분부하고 뒤에 다시 한글 만세가를 지어 격려하기도 했으니 세인이 모두 그 어머니에 그 아들이라 하여 칭찬을 마지 않았었다. 공은 옥고에 풀려난 후 우분이 병이 되어 두문사세하더니 몽상에도 그리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0년에 62세로서 그만 일생을 바쳤으니 참으로 애석하고 원통한 일이다. 아! 조국이 광복된 지도 어느덧 36년 남북의 통일을 온겨레가 갈망하는 이때 공의 겨레를 위한 자주독립정신은 후인의 거울이 됨으로 3.1동지회 김해지부에서 발의하여 공의 사적을 비에 새겨 길이 후세에 전할 뜻을 세워 동지회 권영섭 허용보가 나에게 글을 청하기에 공의 의거에 관한 문적을 상고하여 위와 같이 서술한다. 공의 휘는 승태요 자는
시여요 호는 낙운이며 본관은 김해이니 시조는 가락국 수로왕이요 원조는 김녕군 목경이다. 고는 종황이고 비는 함안조씨이며 남에 영준이다. 끝에 시 한 수로써 공의 의거정신를 기린다.
용지봉 푸른 빛은 천고에 변함없고 대청천 맑은 물은 주야로 흘러가네 의거에 앞장선 그 기개 그 정신 이 고장이 겨레에 길이 전승하리
대한민국 63년 신유 3월 1일 재령 이재호 찬, 정안 이현수 예액, 완산 이종림 서
낙운 김승태공 3.1독립운동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 립
용지봉 푸른 빛은 천고에 변함없고 대청천 맑은 물은 주야로 흘러가네 의거에 앞장선 그 기개 그 정신 이 고장이 겨레에 길이 전승하리
대한민국 63년 신유 3월 1일 재령 이재호 찬, 정안 이현수 예액, 완산 이종림 서
낙운 김승태공 3.1독립운동기적비 건립추진위원회 립
義士 金公 紀蹟 獻誠碑(의사 김공 기적 헌성비)
경남 김해시 봉황동 17-13 노인복지회관 뒤 봉황공원 의사 낙운 김승태 기적비를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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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士 洛雲 金升泰 紀績碑(의사 낙운 김승태 기적비)
지난 1919년의 3.1운동은 진정 우리 겨레가 왜적에게 국권을 빼앗긴 지 10년 드디어 자주독립을 세계만방에 선포한 대의거이었다. 서울을 위시한 이 나라 방방곡곡에서 의거의 함성이 터저나왔던 것이다. 이에 본 군 장유면에서 일어난 의거 또한 힘차고 격렬한 바 있었으니 이는 진실로 이 지방의 망사인 낙운 김승태 공이 몸소 민중의 선두에 서서 감연히 분기 지휘한 데서 온 것이었다. 공은 풍모가 준수하고 기개가 장엄하였으며 문한에 능하고 처사에 민첩하여 소시부터 향인의 추앙을 받아왔다. 공은 경술년 국치 이후 가슴에 울분을 품고 왜적의 침략행위를 통렬이 꾸짖고 거척하더니 기미년에 고종께서 갑자기 승하하시니 그 인산을 계기로 민족의 대표들이 서울에 모여서 독립을 선언할 때 인산 참예차 상경했던 지방의 김종훤 공이 비밀히 독립선언서를 간직하고 돌아와 김용주 이강석 조원래 최현호 조용우 제공들과 수차 거사할 것을 밀의하여 명망 높은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