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256
- 탐방로그
- 김경달 묘는 춘천시 남면 가정리 256에 있다. 가정리 263-1에 있는 묘 입구에 3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가정리 263-1 김경달 묘 입구에 3개의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애국지사 김경달 선생 묘
춘천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907년에는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탄약과 실탄을 제조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하여 경춘 도계에 있는 주길리와 경기도 양평 등 여러 곳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패배하여 군사들이 흩어지자 경달만 홀로 우뚝 서서 총을 쏘아 적병들을 무수히 죽이고 체포되었다.
적들이 항복하여 함께 일을 하면 전화위복이 된다고 말을 하자 경달은 큰소리로 "난적을 점별하고 뜻을 펼치지 못함이 한인데 어찌 너희에게 붙어살기를 도모한단 말이냐!"'라고 꾸짖자 적병들이 총을 쏘아 죽였다. 기백이 하늘을 찌르는지라 의병들 간에 호랑이 장군이라 칭하였지만 나쁜 말은 입에 담지도 않았거니와 타고난 성품이 어질어 형제 간에 우애가 남달랐으며 부모를 섬기는 효성이 지극하여 김효자라 불렸다.
중국 만주에서도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길림성에 독립군으로 편성된 백서농장 3중대장 역임. 1991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과 1980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음.
춘천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1907년에는 가정리 여의내골에서 탄약과 실탄을 제조하는 한편 군사훈련을 하여 경춘 도계에 있는 주길리와 경기도 양평 등 여러 곳에서 전투를 하였으나 패배하여 군사들이 흩어지자 경달만 홀로 우뚝 서서 총을 쏘아 적병들을 무수히 죽이고 체포되었다.
적들이 항복하여 함께 일을 하면 전화위복이 된다고 말을 하자 경달은 큰소리로 "난적을 점별하고 뜻을 펼치지 못함이 한인데 어찌 너희에게 붙어살기를 도모한단 말이냐!"'라고 꾸짖자 적병들이 총을 쏘아 죽였다. 기백이 하늘을 찌르는지라 의병들 간에 호랑이 장군이라 칭하였지만 나쁜 말은 입에 담지도 않았거니와 타고난 성품이 어질어 형제 간에 우애가 남달랐으며 부모를 섬기는 효성이 지극하여 김효자라 불렸다.
중국 만주에서도 의병 활동을 하였으며 길림성에 독립군으로 편성된 백서농장 3중대장 역임. 1991년 정부로부터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과 1980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음.
애국지사 표지 안내판
김경달 선생
(위치) 춘천시 남면 충효로 1717
← 500m 전방
김경달 선생
(위치) 춘천시 남면 충효로 1717
← 500m 전방
'金敬達 義兵將 墓所 入口(김경달 의병장 묘소 입구)'라고 새긴 표지석이 있다.
애국지사 김경달 선생 묘 (1849~1896) 의병장
義士 金海金公 敬達之墓(의사 김해김공 경달지묘)
나라가 위태로우매 스스로 나아가 왜적과 싸운 김경달 의사께서는 1896년 을미의병으로 양근 잠강싸움에서 순국하신 분이다. 김의사의 부친은 김해김공 춘식이고 모친은 선산김씨로 1849년 3월 15일에 지금의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태어났으며 세보의 이름은 현실이고 문전에 기록된 경달은 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를 극진히 모셨으며 형제간의 우애가 돈후하였고 언행에 규범이 있어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신의를 중히 여긴 김의사께서는 한말 기우러진 국운을 바로잡고자 1895년에 의병장 이소응
막하의 포군이 되어 양근 잠강전투에서 분전하다가 력진하여 의군이 모두 흩어졌으나 단신으로 왜적과 맞서 싸우다 피나 되어 수차례에 걸친 회유와 위협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왜적을 향해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싸움에 나섰던 것인데 불행히도 잡혔으니 욕되게 사느니보다는 죽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어찌 이 뜻을 고칠 수 있겠는가라고 크게 꾸짖고 적의 흉탄에 맞아 1896년 2월 8일 장열히 순국하시니 아들 윤근이 시신을 거두어 가정리 산중에 장사지냈다. 그 후 83년이 지난 1979년 3.1절과 1980년 광복절에 김의사의 행적이 창현됨을 기하여 1984년 6월 19일 가정리 산중의 묘소를 이곳으로 옮기고 김의사께서 생명을 바쳐 지킨 나라사랑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고 후세에 귀감으로 삼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84년 음 7월 9일 근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