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김해시 내동 1037-6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己未獨立義擧紀蹟碑(기미독립의거기적비)
기적비문
민족자존의 권리와 자유평등의 대의를 밝힘은 구국제민의 의인이라 할 것이요. 한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 민족의 의불의에 달렸다 할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조국 강산과 문화유산이 이민족의 겸제로 황폐화되고 말살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중에 앞서 대국을 통찰하고 조국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은 길이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날 것이다. 단기 4252년 기미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명월관과 파고다공원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자유민임을 만방에 고함으로써 거족적인 독립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켜 근역의 방방곡곡으로 노도처럼 번져 남녀노소가 적수공권으로 일헌의 총검에 대항하니 배일적기심의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동년 6월 중순까지 삼천리 전역에 확산되어 갔다. 전통과 충절의 고장 김해에서도 항일 의분심은 고조되어 3월 하순부터 4월 중순까지 봉기하여 격렬한 항거가 있었으니 김해군 내의 의거개황을 열거하는 바이다. 김해면민 의거는 재경 유학생인 배동석이 서울 의거에 학생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귀향하였다. 그는 동지 6인과 거사를 모의하고 3월 30일밤 성내 중앙거리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주민 50 수인이 호응하였으며 거사는 군내 의거의 효시로서 각 면 지역으로 번져갔다. 2차 의거는 활천지구 청년 유지 허종식과 허병이 주동으로 마마리 한문서당 출입 유지들과 모의하고 서당학도 10여인이 조력하여 태극기를 판각 제작하고 지역민을 동원하여 4월 2일 하오 주모자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니 300여 군중이 호응하여 격렬히 시위하였다. 김해 면내 두 동에서는 4월 16일 하오경 부녀 50여인이 마을 뒤 칠산에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하니 일헌이 출동하여 총을 난사하니 4인이 중경상을 입었다. 진영
민족자존의 권리와 자유평등의 대의를 밝힘은 구국제민의 의인이라 할 것이요. 한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는 그 민족의 의불의에 달렸다 할 것이다. 경술국치 이후 조국 강산과 문화유산이 이민족의 겸제로 황폐화되고 말살의 지경에 이르렀을 때 중에 앞서 대국을 통찰하고 조국독립을 선언한 3.1운동은 길이 우리 민족사에 찬연히 빛날 것이다. 단기 4252년 기미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이 서울 명월관과 파고다공원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자유민임을 만방에 고함으로써 거족적인 독립만세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켜 근역의 방방곡곡으로 노도처럼 번져 남녀노소가 적수공권으로 일헌의 총검에 대항하니 배일적기심의 열기는 요원의 불길처럼 동년 6월 중순까지 삼천리 전역에 확산되어 갔다. 전통과 충절의 고장 김해에서도 항일 의분심은 고조되어 3월 하순부터 4월 중순까지 봉기하여 격렬한 항거가 있었으니 김해군 내의 의거개황을 열거하는 바이다. 김해면민 의거는 재경 유학생인 배동석이 서울 의거에 학생대표의 일원으로 참가하여 독립선언서를 감추고 귀향하였다. 그는 동지 6인과 거사를 모의하고 3월 30일밤 성내 중앙거리에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주민 50 수인이 호응하였으며 거사는 군내 의거의 효시로서 각 면 지역으로 번져갔다. 2차 의거는 활천지구 청년 유지 허종식과 허병이 주동으로 마마리 한문서당 출입 유지들과 모의하고 서당학도 10여인이 조력하여 태극기를 판각 제작하고 지역민을 동원하여 4월 2일 하오 주모자를 선두로 독립만세를 외치니 300여 군중이 호응하여 격렬히 시위하였다. 김해 면내 두 동에서는 4월 16일 하오경 부녀 50여인이 마을 뒤 칠산에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시위하니 일헌이 출동하여 총을 난사하니 4인이 중경상을 입었다. 진영
면민 의거는 청년유지 김연태와 김우현이 주동하여 동지 4인을 규합 모의하고 여래 뒷산 죽림에서 태극기와 격문을 만드는데 밤을 세웠다. 3월 31일 하오 진영장터에서 태극기를 흔들고 격문을 뿌리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니 수백 군중이 호응 시위하였다. 2차 의거는 면내 하계리 서당학도 안기호 김종만이 주동하여 학우 30여 인과 모의하고 태극기를 만들며 지역민을 동원하여 4월5일 하오 진영장터에서 태극기를 세우고 독립만세를 외치니 2000여 군중이 가세하였다. 일헌의 억압 제지에 격분한 군중은 일헌분견소를 파괴하는 등 격렬히 대항하였다. 장유면민 의거는 김종훤이 3월 1일 고종 인산에 참지하고는 서울 의거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을 감추고 귀향하였다. 유지 김병태는 김용수 이경석과 상의하여 10여 동지를 규합하였고 김승태를 총지휘자로 추대하여 거사하였으며 남지역은 김용수가 전담 지휘하였다. 원동포 갈대숲에서 거듭 밀회하여 리동마다 동원책을 두어 주민을 격려케하고 태극기와 선언문을 만들었다. 4월 12일 정오 무계리 대청천변에서 농적 나팔소리를 신호로 운집한 군중은 삼천을 해아렸다. 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위대열은 무계장터로 행진하니 놀란 일헌은 무차별 발사하여 동지 3인이 순사하였다. 격분한 군중은 일헌분견소를 포위 파괴하고 항거하자 일헌기마대가 출동하여 해산은 되었으나 조직적이고 격렬한 항쟁을 하였다. 오지면 의거는 사립동명학교 교원 이진석이 동창 재경 유학생 김연복으로부터 독립선언문을 입수하고 동창 양왕석과 동지를 규합하여 태극기와 선언문을 준비하여 4월 10일 하오 오호장날 태극기를 세우고 선언문을 배부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니 200여 군중이 호응하여 항거 시위하였다. 가락면에서는 진주농교 재학생 문위동의 주동으로 4월 13일 정오경 청년 20여 인이 봉림리 음지바위 아래 모여 독립만세를 연호하며 시위하였다. 이 밖에도 향토 출신으로서 타 지역에서 3.1운동에 참가하여 공을 세운 선열은 다수이다. 전 기명 각 지역 의거에서 주동자는 일헌에 구속되여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기소되어 옥고를 치른 열사에 한하여 독립유공선열로 이에 기명하는 바이다. 오라 국파산하재라. 일제 식민치하 36년은 민족적 수난기요 항쟁기니 우국지사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4252년 3월 20일 상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여 국권을 재정립하고 외교활동을 전개하여 왜국의 불의를 만방에 폭로하였다. 조국광복이란 민족의 염원이 한데 뭉쳐 승화된 3.1정신과 선열의 피는 맥맥히 이어저 을유 광복의 원동력이 되었고 이는 우리 민족와 함께 길이 빛날 것이다. 자에 기미운동 70주년에 즈음하여 3.1동지회 김해지부장 권영섭의 발의와 지부의 주간으로 향민의 뜻을 모아 기적비를 분성방두에 세우나니 이에 민족흥망의 감계를 찾고 3.1의거의 사실을 밝혀 의에 앞장서 살신성인하신 독립유공선열의 공적을 병기함으로써 이 고장 후손들에게 전하는 바이다.
독립유공자 김해면 배동석 임학찬 배덕수 박덕수 허병 허종식 최덕관 김석암 조병중 최계우 송세탁 송상진, 진영면 김정태 김우현 김성수 김용환 김용호, 장유면 순국자 김선오 김용이 손명조, 유공자 김승태 김종훤 김용주 이강석 조항래 조용우 최현호 김만수 안무술 이차수 정덕윤 조봉출 조용명, 오지면 이진석 박두성 심봉구 정소목 양왕석 김영두, 이북면 배치문 (목포시 의거)
독립유공자 김해면 배동석 임학찬 배덕수 박덕수 허병 허종식 최덕관 김석암 조병중 최계우 송세탁 송상진, 진영면 김정태 김우현 김성수 김용환 김용호, 장유면 순국자 김선오 김용이 손명조, 유공자 김승태 김종훤 김용주 이강석 조항래 조용우 최현호 김만수 안무술 이차수 정덕윤 조봉출 조용명, 오지면 이진석 박두성 심봉구 정소목 양왕석 김영두, 이북면 배치문 (목포시 의거)
가락면 문위동 진주농교 학생의거, 대저면 고영건 동래중교 학생의거
삼일동지회 전 김해지부장 김해 김성태 찬, 전주 이근섭 서
사단법인 삼일동지회 김해지부 립
대한민국 71년 무진 3월 1일
삼일동지회 전 김해지부장 김해 김성태 찬, 전주 이근섭 서
사단법인 삼일동지회 김해지부 립
대한민국 71년 무진 3월 1일
김해시민체육공원 야구장 주차장 내 기미독립의거 기적비가 이곳으로 이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