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3.1운동창의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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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811-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三.一運動 彰義塔(3.1운동 창의탑)
三.一運動 彰義塔(3.1운동 창의탑)
3.1운동 창의탑
오랜 역사와 높은 문화로 동방에 빛나던 대한 그 조국이 왜적의 마수에 빼았겼으니 원통하여라. 겨레의 노한 함성 천지를 진동하고 왜적의 발악은 귀축을 닮았거니. 소가야적 옛부터 평화의 백성 어질고 순박하던 이 고장 사람들 망국의 분노로 생명을 돌보랴. 독립을 부르고 만세를 외쳤다. 아귀의 총검 앞에 맨주먹 앞가슴으로 쏠테면 쏘라고 항거한 우리 선열 불굴의 위국충정으로 거룩한 희생 장하고 의로워라. 처참도 하여라. 우리 여기 유서 깊은 길목에 삼가 선열의 의를 되새기고 본을 길이 후세에 남기고자 한 조각 돌로서 창의탑을 세운다. 고종황제 인산때 3.1운동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을 가져온 최정철 공은 동지와 함께 이 고장에서도 의거를 꾀하여 이종홍 공이 통문을 짓고 최정원 공이 이를 몰래 전하여 기미년 3월 20일 국천광장에 수천 군중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최정원 공은 독립선언문 허재기 공은 공약삼장을 각각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연이어서 최정원 공과 최낙종 공이 앞서서 군중과 배둔시장을 향하여 시위행진을 하였을때 이에 당황한 왜헌은 달려와서 총검으로 앞을 막았다. 이때에 최정주 공은 앞서서 가슴을 헤쳐 총구에 내밀어 왜헌을 위압하였다. 이 기회를 틈타 시위군중은 계속 행진하여 배둔에서 대기했든 김갑록 서찬실 김동기 공이 이끄는 군중과 합세하여 종일토록 만세를 불렀다. 그 뒤 고성읍 배만두 공 등이 행사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거사를 못하고 고문당했다.
이건 사실기
이 창의탑은 삼·일만세를 외치던 이 땅에 세워져서 장하신 애국투사들의 자취를 느껴 되새기게 하였더니 광복된 조국의 일익 발전으로 배둔 구만간 도로 확포장 공사의 접촉으로 이 탑이 옮기게 되었으며 탑의 시설 규모가 초라하여 국회의원 정순덕 군수 박찬규의 특별한 배려와 지방 유지들의 성력을 모아 배둔리 산 881의 1번지에 다시 세워졌으나 위치의 경관이 부적하여 지방 유림의 이건론에 의해 본 탑 이건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국가보훈청의 지원 본 군 군수의 부지 제공 및 재정지원과 본 추진위원회의 성력으로 이 곳 배둔소공원 내 이전 건수하다.
서기 2007년 4월 일
삼일운동창의탑 이건추진위원회 근수
三.一運動 彰義塔(3.1운동 창의탑)
주소는 경남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811-1 배둔시외버스터미널 옆 소공원 회화3.1운동 창의탑이다.
3·1운동 창의탑 -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43-1-36 / 관리자: 고성군수
일제의 조국강탈에 분격하여 거국적으로 궐기한 1919년 3월 1일 항일독립만세운동은 향토 고성에서도 분연히 일어났다. 고성의 3.1독립만세 시위 운동은 1919년 3월 20일부터 4월 3일까지 고성읍 3회, 구만면과 회화면에서 4회 모두 일곱 번이나 일어났다. 3·1운동에 참여한 향토민은 수 천명에 달했으며 당시 고성군 구만면 국천사장(菊川川場) 독립만세운동을 하다 주모자로 체포 투옥된 허재기(대통령표창, 1990) 선생을 비롯하여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일경(日警)에 체포되어 형을 받고 옥고를 치룬 분으로 기록에 남아있는 독립투사는 약 40여 명에 달한다. 3·1운동 창의탑은 이러한 우리 고장 출신 항일운동열사의 독립정신과 나라사랑 얼의 뜻을 높이 받들어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한 지역민들의 뜻이 모여 건립되었다. 당초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 881-1번지에서 세워졌으나 2007년 5월 14일 배둔리 1288-28번지로 이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