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낙종 창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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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107-1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태극기를 제작하는등 만반의 의거준비로 그해 3월 20일에 거사하여 최석호의 나팔소리 신호에 맞추어서 공과 몇몇 동지의 주도로 수 많은 군중은 구만 국천사장에 모여서 우렁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때마침 배둔장날이라 왜적 헌병대의 저지망을 뚫고 일로 배둔으로 행진하니 기세는 충천하였다. 배둔시장에서 구만회 화마암 개천 거류 동해 6개 면민이 합세하여 종일토록 만세를 외쳤으니 이것이 곧 국천배둔의 만세의거다. 공은 의거의 주모자로 지목받아 검거선풍이 불어닥치니 피신 상경하여 조선일보기자로 함경도에 특하되어서 민족사상을 고취하려하였으나 왜경의 감시로 뜻을 이룰수 엇으니 일년후에 적의 심장부인 동경에 뛰어들었다. 그곳에는 일제의 비호하에 우리동포의 고혈을 착취하던 친일파 박춘금을 두목으로 한 상애회의 횡포가 막심하므로 공은 분연히 이에 대항하여 동흥노동동맹을 창설하고 동포의 권익옹호투쟁에 위원장으로서 선봉에 서고 휘하의 청년부장 서상한열사와 항일의거를 감행하였으며 동경에서 최초로 한글인쇄소 삼문사를 설립하여 월간 동흥노동을 발간하고 동포사회의 유일한 지하 언론으로 동포를 계도하고 조국독립정신을 고취하려 흑자신문을 발행하였더니 왜경의 혹독한 핍박으로 폐간당하고 공은 투옥되었으며 편집을 맡았던 김택은 가혹한 고문으로 왜옥에서 희생되었으니 순의열사로 역사에 기리며 추앙한다. 공은 조국땅에서도 적지에서도 오로지 조국광복과 동포애 일념으로 불굴의 투지와 민족정기를 일깨워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시켰으며 또한 자비로운 심덕으로 빈한한 사람을 대하면 입은 옷도 서슴없이 벗어주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겼으니 왜인들도 공의 인품에 감복하였다. 왜경의 갖은 협박과 회유에도 변절치 않고 친제 봉도의 극진한 우애와 협조를 얻어서 우국애족에만 일생을 희생하였다. 아! 창천이 무심하고 명운이 유한인 조국광복을 눈앞에 둔 1945년 을유 6월 8일 쌓인 옥고성질로 사경에 직면하여 형집행정지 출감한지 한달만에 일본 피지에서 55세를 일기로 파란많은 인생을 마쳤다. 이에 광복되 그해 12월 26일에 동경에서는 재일조선인 총연맹 조선건국추진회 조선민중신문사등 범 동포단체의 합동으로 공의 추도회를 성대히 개최하여 공의 위업을 찬모하였으며 1980년 8월 14일에
제1279호로 건국포장을 추서받아 그 빛나는 업적이 세상에 알려졌다. 내가 와세다대학에 유계하여 김택의사와 함께 삼문사에서 흑자신문의 편집을 보조할때 공의 애국투지에 감화되어 민족정기를 각성한바 컸으므로 공의 추앙하였더니 공을 숭모하는 유지인사들이 공의 장지와 유업을 석면에 새겨 영세에 기리고자 하여 나에게 비문을 청하기에 독립운동사 제기록을 살피고 보고 느낀 파란만장의 행적을 적으려니 감회가 일절이라 이어서 명을 쓰노니
성경현전 글을 읽고 쌍충선조 피를 받아 위국하는 충의절은 강적에도 불굴하고 애족하는 자선심은 만동포에 널리미쳐 독립전선 선봉서서 많은 투사 배출했네 주소념원 조국광복 이개월을 앞에 두고 포한타계 서러우나 장지위업 쌓았으니 청사에서 빛나리라.
창암최공창의비 건립사실비
선열에 대한 창의포선이 후에의 귀감이 되라라하여 뜻있는 사람들이 심력을 모아 이 창의비를 세웠음
경남 고성군 회화면 당항리 임진왜란대첩 기념성역지 입구 대한독립지사 창암 최낙종 선생 창의비를 찾아왔다.
대한독립지사 창암 최공낙종 창의비
독립지사 창암 최공 낙종 창의비명 병서

공의 휘는 낙종이요 호는 창암이니 전주최씨라 고려 문하시중 시 문성공 휘 아는 시조이시며 기후 세세로 명향달사가 배출하였으며 조선조에 증이조판서 시 의민공 휘 균은 임진란에 제의숙공 휘 강과 함께 창의토적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워서 세칭 일가쌍충이라 하였으니 공의 13대조 이시며 통정대부 호 총암 휘 석진은 문학행의로서 세인의 존경을 받았으니 공의 증조이싣가. 공은 충효전가의 혈통을 이어서 1891년 정월 10일에 고성군 구만면 화림리 당산구제에서 부공 원모와 모씨 함안이씨 진후공의 따님이신 운이여사 ㅅ가이에 출생하여 재질이 총명하고 의지가 강직하여 향리 도산서원에서 한학을 전공하고 고금위인의 충의도덕을 학습하여 날로 성장하면서 향리인사들의 촉망을 크드니 그때에 국운의 쇠약을 노려서 잔악한 일본의 침략으로 망국의 한을 안고 분만하든차에 고종황제 인산을 계기로 몇몇 동지와 같이 상경하여더니 때마침 3.1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하니 그 대열에 참가하여 독립선언문을 입수해 귀향하여 동지 10여인을 규합하고 독립선언문을 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