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우순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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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산37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최우순선생 묘지
(위치 :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산37번지)
- 500m 전방 -
위성지도를 보면서, 마을 사이길로 마을 뒷편으로 올라왔다. 매주 좁은 길이어서 차량으로 매우 어려웠다.
더 이상 차량으로는 불가능해서, 이곳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가야한다. 저 앞 큰 나무 뒷편으로 추정이 된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니, 이쯤에서 다시 왼쪽으로 들어가야 한다. 위성지도를 보면서..
이 부근인데... 마침 쌍분이 보였다.
義士西扉崔公諱宇淳之墓艮坐配孺人盆城許氏祔左
의사 서비 최공 휘 우순지묘 배 유인 분성허씨부좌
義士西扉崔先生之墓(의사 서비 최선생지묘)

西扉(서비)는 서쪽에 있는 문이라는 뜻으로,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이 있는 동쪽이 싫어서
지금부터는 서쪽에 기거한다는 의미로 호를 새롭게 지으셨다.
義士西扉崔先生之墓(의사 서비 최선생지묘)
공의 성은 최 휘는 우순 자는 순구 호는 서비이시다. 전주최씨 시조 고려문하시중 문성공 휘 하의 23대손이고 이조 선조시 창의록훈으로 이조판서와 의민공의 시로를 받은 휘 균의 11대 손이신 공은 순조 32년 임진(1832) 6월 22일 고성 하일 학동 향제에서 탄생 유시부터 주위의 촉망을 받아왔으나 당시의 과거제도의 타락과 정치의 부패를 개탄하여 사관의 길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여 모든 경서와 사적 시문과 제자백가는 물론 천문 지리 병서에 까지 통달하신 큰 학자이시다. 병자 을사의 두해의 대흉년을 당하여 기근이 극심할때 창고의 곡식을 내여 시혜하기를 3년을 계속하니 가세가 어려운 형편에 이르렀다. 공은 추수가 2천여석의 부자이면서도 평생토록 의복은 물론 침구도 무명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심은 남을 도우기 위해서였다. 생신이나 회갑을 못하게 하시고 대효위친
공의 성은 최 휘는 우순 자는 순구 호는 서비이시다. 전주최씨 시조 고려문하시중 문성공 휘 하의 23대손이고 이조 선조시 창의록훈으로 이조판서와 의민공의 시로를 받은 휘 균의 11대 손이신 공은 순조 32년 임진(1832) 6월 22일 고성 하일 학동 향제에서 탄생 유시부터 주위의 촉망을 받아왔으나 당시의 과거제도의 타락과 정치의 부패를 개탄하여 사관의 길을 단념하고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전념하여 모든 경서와 사적 시문과 제자백가는 물론 천문 지리 병서에 까지 통달하신 큰 학자이시다. 병자 을사의 두해의 대흉년을 당하여 기근이 극심할때 창고의 곡식을 내여 시혜하기를 3년을 계속하니 가세가 어려운 형편에 이르렀다. 공은 추수가 2천여석의 부자이면서도 평생토록 의복은 물론 침구도 무명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심은 남을 도우기 위해서였다. 생신이나 회갑을 못하게 하시고 대효위친
과 가내 화목을 실천하셨고 항상 富(부)나 貴(귀)를 얻어도 驕(교)하지 말며 없는 자에게 施(시)하며 權(권)에 卑(비)하지말라고 자손들에게 교훈하시어 이를 가풍으로 삼으셨다. 병인 신미 두 양요때 국방을 위한 상소와 민비시해때는 토왜의병모부를 설치하여 천금을 드려 의병을 훈련시킨일과 안중근의 의거때나 민충정공의 순국때 비눈강개하고 추모의 시로써 조곡한 대의는 민족정기 발현의 진면목이라 핳거이다. 소위 의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됨을 본 공은 동향으로 되어있는 대문을 서향으로 옮기고 호 청사를 서비라 고치셨다. 이는 원수인 일제가 동쪽에 있으니 서쪽으로 돌아앉는다는 뜻이였다. 공의 최후 辭(사)인 霜膽偏悲烈士秋 彼蒼胡忍陸沈州 一生不變南音操 百死邢忘北望憂 竊念臣民今日義 難容天地此身謨 殷薇采采歌安適 西我山扉獨掩幽란 시만 보아도 삭풍한설에 송백같은 굳은 절개를 엿볼수가 있다. 경술년에 합방을 강행한 일제는 전국의 명망있는 유림에게 일왕의 소위 은사금이란 것을 주어 민심을 무마하는 술책을 썼다. 공에게도 은사금을 받으라고 여섯차례나 강요하다가 대의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거주하는 공을 강압적인 수단으로 헌병을 파견하여 강제로 연행코저 하므로 공은 추강같은 기개로써 내 어찌 대한의 신민으로서 왜왕에게 몸을 굽힐수없다하고 거절하자 왜헌병이 일본천황의 하사금을 감히 거절하는가 하며 총칼로써 강요하므로 공은 선비는 죽일수는 있어도 모욕할수는 없는 법인데 내 이미 년로하여 백일보행도 불편하거늘 야행으로 너의들에게 끌려갈 수는 없다고

거절하시고 그날밤 촛불을 밝히고 의관을 정제하여 북향재배하고 음독순절하시니 신해(1911) 3월 19일 鷄鳴時(계명시) 였다. 향년이 80세로 대의를 위해 순국하시였다. 공의 순절을 들은 동양각국의 지사들의 조환과 국내유림 수천명이 모여 하일 춘암 후산 축자원에 예장하니 조문객의 마필이 10여리의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때 모인 조객들이 서비계를 모우고 종친들이 호응하여 갑자년(1924)에 도곡산록에 서비정을 짓고 유림들이 모아 매년
앞 비문에 나와있었던 한시 구절을 인터넷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출처 : Naver Blog '더불어 함께'

霜膽偏悲烈士秋(상담편비열사추)
열사들 비통하게 생각하는 이 때에

彼蒼胡忍陸沈州(피창호인육심주)
저 하늘은 어찌하여 나라 망하게 하는고

一生不變南音操(일생불변남음조)
일생동안 남쪽 지조 변하지 아니했는데

百死邢忘北望憂(백사형망북망우)
백번 죽어도 나라 걱정 어찌 잊겠는가

竊念臣民今日義(절념신민금일의)
저윽이 오늘 臣民의 의로움 생각해보니

難容天地此身謨(난용천지차신모)
온 세상에 이 몸 용납하기 어렵네

殷薇采采歌安適(은미채채가안적)
은나라 백이 숙제는 어디로 갔는가

西我山扉獨掩幽(서아산비독엄유)
내 山門을 서쪽으로 내고 숨어 살리라
3월 18일에 향사를 모시어 공의 의절을 추모하고 있으며 후인들이 학동마을 입구에 순의비를 세워 작은 성역을 이루고 있다. 공의 우국애절과 송죽같은 의절을 그리는 념 간절하였으나 일제의 방해 또한 집요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조국광복이 되자 대의에 순한 충절이 돼새겨져 국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자손들 역시 공의 행적외 기록치 못하다가 이제야 힘을 모아 공의 사적의 소루함의 아쉬움과 송구함을 무릅쓰고 이 돌을 세운다.
불초손 용락 근식, 조천 정직교근서, 증손 상림근수
3월 18일에 향사를 모시어 공의 의절을 추모하고 있으며 후인들이 학동마을 입구에 순의비를 세워 작은 성역을 이루고 있다. 공의 우국애절과 송죽같은 의절을 그리는 념 간절하였으나 일제의 방해 또한 집요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조국광복이 되자 대의에 순한 충절이 돼새겨져 국가로부터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자손들 역시 공의 행적외 기록치 못하다가 이제야 힘을 모아 공의 사적의 소루함의 아쉬움과 송구함을 무릅쓰고 이 돌을 세운다.
불초손 용락 근식, 조천 정직교근서, 증손 상림근수
이곳으로 올라가면 손쉽게 갈 수 있다.
고성군 하일면 춘암리 산 37 춘암마을 뒷산 순국지사 서비 최우순 선생의 묘소를 찾았다.
춘암마을. 마을의 유래
옛 문헌에 고려시대(현종9년)부터 장춘, 신기, 입암 등 지명이 기록되어있으며, 1914년 장춘과 입암의 지명을 따서 춘암리가 되었다. 현재 춘암마을는 사계절 온화한 봄날같은 성서로운 따일하는 長春본동과 새터라고도 부르는 신기마을이 있고, 선바위가 있는 입암(현 용암포)은 본동이 되었다.
마을은 경남기념물 제138호 봉수대가 있는 좌이산을 뒤로하고 청정바다 자라만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의 풍광이 빼어난 살기 좋은 장수 마을이다. 풍수지리학으로 와룡지맥의 왼쪽 귀에 해당한다는 주산 좌이산 오른쪽 어깨에서 음품골 줄기 그리고 살매등을 타고 내리뻗은 산줄기와 왼쪽어깨에서 질매등을 타고 내리 뻗은 산줄기 한가운데 마을이 자리하고 있어 좌청룡 우백호의 지세이다. 좌이산에 오르면 한려수도 뱃길의 자라만과 안장섬(질매섬)을 품은 이라스식 해안선은 가히 천하절경이다.
'다음지도'에서 묘소 위치를 파악후 혹시 부근을 RoadView를 통하여 검색결과 묘소 안내판이 있는것도 확인했다.
그런데 어느 방향인지 표시없이 500m라고 만 되어있다. 이곳의 GPS상 주소는 하일면 춘암리 512-2 춘암마을 입구 도로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