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고성군 영오면 영산리 산39, 산41
- 탐방로그
-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영산리 산 25에 있다는 강영순 애국지사의 묘소를 찾아왔다. 그런데 도착해보니 산25에 있는 묘소는 강영순 선생의 부친, 강재완 선생의 묘소였다. 가는 길에 발견한 묘소 안내판의 주소는 산19였는데, 이마저도 선생의 묘소가 아니었다. 아무리 찾아도 묘소를 찾을 수가 없어 인근 마을에 사시는 강영순 선생의 며느리 분께 위치를 여쭤봤고, 흔쾌히 안내해주셨다. 여사님이 안내해주신 애국지사 묘소는 아까 발견한 안내판 바로 앞의 산등성이로 올라가서 찾을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산 25번지의 위성사진에서 본 묘소는 진주강씨는 맞지만 함자가 다른 분의 묘소였다.
이 곳은 애국지사 강영순 선생의 부친되시는, 강재완 선생의 묘소였다.
산 19번지는 다른 성씨의 묘소 끝부터 길다랗게 생긴 번지수이다.
역시 산 19번지에서도 선생의 묘소는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산 19번지라고 되어있는 묘소 안내판이 있던 곳으로 나와서 주변의 묘소들도 둘러보았다.
안내판 바로 앞에 있는 산등성이로 올라가야 했다.
애국지사의 묘소의 GPS상 주소는 산 39와 산 41로 두 개의 번지로 구성되어 있었다.
南溪 處士 晉陽 姜公 之墓(남계 처사 진양 강공 지묘)
배 유인 안동김씨 묘재 고성군 영오면 덕일산 자읍곡 자좌
愛國志士 南溪 處士 晉陽 姜公 之墓(애국지사 남계 진양 강공 지묘)
독립지사 남계 강공 묘표
대저 지사는 죽어서 구렁에 버려짐을 겁내지 않고 오직 의에 살아 고락을 계교하지 않는다더니 고 독립지사 남계 강공 휘 영순이 그러했다. 잊으려도 잊지못할 기미년 3월 온누리가 독립만세 소리로 메아리치던 그날 궐연히 서서 이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굳게 결심하고 단성의 동지 현포 이병홍과 밀의를 거듭하면서 개탄하기를 대장부 어찌 호기를 놓칠소냐 하고 곧 정촌면을 본진 삼아 원근 동지를 규합하여 빈틈 없는 준비를 완료하고 드디어 18일
대저 지사는 죽어서 구렁에 버려짐을 겁내지 않고 오직 의에 살아 고락을 계교하지 않는다더니 고 독립지사 남계 강공 휘 영순이 그러했다. 잊으려도 잊지못할 기미년 3월 온누리가 독립만세 소리로 메아리치던 그날 궐연히 서서 이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굳게 결심하고 단성의 동지 현포 이병홍과 밀의를 거듭하면서 개탄하기를 대장부 어찌 호기를 놓칠소냐 하고 곧 정촌면을 본진 삼아 원근 동지를 규합하여 빈틈 없는 준비를 완료하고 드디어 18일
독립지사 남계 강공 묘표
대저 지사는 죽어서 구렁에 버려짐을 겁내지 않고 오직 의에 살아 고락을 계교하지 않는다더니 고 독립지사 남계 강공 휘 영순이 그러했다. 잊으려도 잊지못할 기미년 3월 온누리가 독립만세 소리로 메아리치던 그날 궐연히 서서 이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굳게 결심하고 단성의 동지 현포 이병홍과 밀의를 거듭하면서 개탄하기를 대장부 어찌 호기를 놓칠소냐 하고 곧 정촌면을 본진 삼아 원근 동지를 규합하여 빈틈 없는 준비를 완료하고 드디어 18일
대저 지사는 죽어서 구렁에 버려짐을 겁내지 않고 오직 의에 살아 고락을 계교하지 않는다더니 고 독립지사 남계 강공 휘 영순이 그러했다. 잊으려도 잊지못할 기미년 3월 온누리가 독립만세 소리로 메아리치던 그날 궐연히 서서 이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굳게 결심하고 단성의 동지 현포 이병홍과 밀의를 거듭하면서 개탄하기를 대장부 어찌 호기를 놓칠소냐 하고 곧 정촌면을 본진 삼아 원근 동지를 규합하여 빈틈 없는 준비를 완료하고 드디어 18일
아침 오천 군중의 선봉이 되여 태극기 높이 들고 칠암벌을 휩쓸어 노도처럼 진주로 향하여 행진하니 그 포효소리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때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왜병을 대항함에 있어 그 7척 장신의 천부적인 膂力(여력)은 수 많은 적을 타도하였고 번번이 장검을 빼앗아 던지면서 보무도 당당히 시위를 감행하여 사기는 바야흐로 극에 달하였다. 어찌 뜻하였으랴. 문득 왜헌병이 던진 올개미에 결려 체포되니 따라서 대열 또한 유지하기 어려웠다. 지사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 3일만에 왜검으로 압송 도중 포승을 절단하고 위병을 꺼꾸러뜨린 뒤에 비봉산봉에 올라 만세를 삼창하고 강원도로 피신하였으되 여기서도 독립사상 고취에 여념이 없었으며 때때로 서울에 잠입하여 상해의 임정과도 상응하고 백범 김구주석으로부터 조직부서의 지부장직까지 임명받았다고 한다. 아아 여사한 지사의 정기와 위행은 어찌 비상한 ○○ 없이 이룩될 수 있었겠는가. 마침내 임술년 광복절에 대통령의 표창을 받기에 이르렀다. 지사는 강성 진양인으로 자는 백문이요 남계는 그 호며 은렬공의 예 한림공 안중의 15세손이고 증조의 휘는 진립이요 조의 휘는 재완이며 고의 휘는 석규이고 비는 전주 최우식의 녀로 고종 계말에 영오의 본책에서 태어나 을미에 졸하니 향년이 73이다. 묘는 고성 성산의 장등 해좌에 위치하며 배는 안동 김영규의 녀와 거창유씨요 3남은 병호 병철 병태며 5손은 석환 재환 덕환 영환 인환이고 여(餘)는 불록한다. 효자 병호가 그 묘문을 청하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상에 의거하여 지사의 지업을 약술하여 세
아침 오천 군중의 선봉이 되여 태극기 높이 들고 칠암벌을 휩쓸어 노도처럼 진주로 향하여 행진하니 그 포효소리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때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는 왜병을 대항함에 있어 그 7척 장신의 천부적인 膂力(여력)은 수 많은 적을 타도하였고 번번이 장검을 빼앗아 던지면서 보무도 당당히 시위를 감행하여 사기는 바야흐로 극에 달하였다. 어찌 뜻하였으랴. 문득 왜헌병이 던진 올개미에 결려 체포되니 따라서 대열 또한 유지하기 어려웠다. 지사는 혹독한 고문을 당한 3일만에 왜검으로 압송 도중 포승을 절단하고 위병을 꺼꾸러뜨린 뒤에 비봉산봉에 올라 만세를 삼창하고 강원도로 피신하였으되 여기서도 독립사상 고취에 여념이 없었으며 때때로 서울에 잠입하여 상해의 임정과도 상응하고 백범 김구주석으로부터 조직부서의 지부장직까지 임명받았다고 한다. 아아 여사한 지사의 정기와 위행은 어찌 비상한 ○○ 없이 이룩될 수 있었겠는가. 마침내 임술년 광복절에 대통령의 표창을 받기에 이르렀다. 지사는 강성 진양인으로 자는 백문이요 남계는 그 호며 은렬공의 예 한림공 안중의 15세손이고 증조의 휘는 진립이요 조의 휘는 재완이며 고의 휘는 석규이고 비는 전주 최우식의 녀로 고종 계말에 영오의 본책에서 태어나 을미에 졸하니 향년이 73이다. 묘는 고성 성산의 장등 해좌에 위치하며 배는 안동 김영규의 녀와 거창유씨요 3남은 병호 병철 병태며 5손은 석환 재환 덕환 영환 인환이고 여(餘)는 불록한다. 효자 병호가 그 묘문을 청하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상에 의거하여 지사의 지업을 약술하여 세
(세)상에 고한다.
광복 4천년 갑자 추분절 삭녕 최인찬 찬
함안 이진옥 서
단기 4317년 갑자 10월 일 근수
광복 4천년 갑자 추분절 삭녕 최인찬 찬
함안 이진옥 서
단기 4317년 갑자 10월 일 근수
경남 고성군 영오면 영산리 산 25에 있다는 강영순 애국지사의 묘소는 네비게이터로는 제대로 찾을 수 없어서 위성지도를 보면서 찾아왔다.
이곳에도 강영순 애국지사의 묘소 안내판이 있지만 주소가 산 25가 아닌 산 19번지이다.
지도로 확인해보니 산 25, 산 19번지는 서로 붙어있는 지역이다.
지도로 확인해보니 산 25, 산 19번지는 서로 붙어있는 지역이다.
저곳을 돌아서 끝 부분이 처음에 묘소 주소로 착각했던 번지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된 애국지사의 묘소 위치는 왼쪽 산등성이로 올라가야 나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된 애국지사의 묘소 위치는 왼쪽 산등성이로 올라가야 나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