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재기 공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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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고성군 구만면 효락리 590-3
탐방로그
허재기(許在其) 선생의 이명은 한자가 다른 허재기(許在基)이다. 좌해 허재기선생 공적비는 폐교된 회화중학교 구만분교장 정문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서기 1968년(술신) 7월 17일
독립지사 좌해 허재기공 장의위원회
위원장 이만수 건수, 이기주 지음, 최규성 씀
경남 고성군 구만면 효락리 590-3 구 회화중구만분교(보천도예창조학교) 정문 입구에 있다는 독립지사 좌해 허재기 선생 공적비를 찾아왔다.
獨立志士 左海 許在其公 之碑(독립지사 좌해 허재기공 지비)
獨立志士 左海 許在其公 之碑(독립지사 좌해 허재기공 지비)
공은 김해김씨로 호는 좌해요 이름은 재기시니 허정근 공의 큰 아드님이시다. 을사 이후 나라의 정사가 날로 그릇됨을 통한터니 경술에 이르매 독립을 되찻고자 일어나셨다. 기미에는 동지들과 구만 국천사장에서 회화시장에서 군중을 휘동하여 독립만세를 외쳐
불렀으며 일헌들과 극한 투쟁을 하셨다. 공은 한인관리 퇴직 권고문을 작성하여 이를 살포하고 수악왜인에 망종하는 그들의 맹성을 절규하셨다. 공은 1926년 10월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이상용의 군자금 모집 지령서를 밀휴한 권인섭과 상종하여 이를 추진타가 왜경에 피체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루셨다. 공은 그후 향리에서 저연학원을 창설하고 청년동지 인재양성에 심후를 기우리다. 공은 성품이 과묵강직하여 때로 한마디 하시는 말씀이 능히 사람의 비부를 찔렀다. 다음날도 공은 간담을 상조한 동지들과 무시상종하여 동분서주 조국광복에 안좌의 여일이 없었다. 이제 공은 가셨으나 공의 거룩한 넋은 겨레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계신다. 이에 오늘 우리 사회 후학들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움은 공의 인격과 지조를 길이 추모함이다.
이 비를 보는 이 마다 옷깃을 여미고 애국하는 뜻을 더욱 굳게 할지어다.
불렀으며 일헌들과 극한 투쟁을 하셨다. 공은 한인관리 퇴직 권고문을 작성하여 이를 살포하고 수악왜인에 망종하는 그들의 맹성을 절규하셨다. 공은 1926년 10월 상해임시정부 국무령 이상용의 군자금 모집 지령서를 밀휴한 권인섭과 상종하여 이를 추진타가 왜경에 피체 대구복심법원에서 1년 6개월의 언도를 받고 옥고를 치루셨다. 공은 그후 향리에서 저연학원을 창설하고 청년동지 인재양성에 심후를 기우리다. 공은 성품이 과묵강직하여 때로 한마디 하시는 말씀이 능히 사람의 비부를 찔렀다. 다음날도 공은 간담을 상조한 동지들과 무시상종하여 동분서주 조국광복에 안좌의 여일이 없었다. 이제 공은 가셨으나 공의 거룩한 넋은 겨레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계신다. 이에 오늘 우리 사회 후학들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움은 공의 인격과 지조를 길이 추모함이다.
이 비를 보는 이 마다 옷깃을 여미고 애국하는 뜻을 더욱 굳게 할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