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408 고성 독립운동 근거지 연화산 옥천사를 찾아가고 있다.
蓮華山玉泉寺(연화산 옥천사) 일주문
고성 옥천사 청동북(固城 玉泉寺 靑銅金鼓)
보물 제495호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옥천사 청동북은 옥천사가 소장하고 있는 1252년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반자로써 옛날에 군대나 절에서 쓰던 금속으로 만든 북의 일종이다. 청동북에 새겨진 명문에는 원래 지리산의 안양사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옥천사에 소장된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청동북이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안양사가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적어도 200년 이상의 기간동안 안양사에서 사용되다가, 안양사의 폐사되면서 옥천사로 옮겨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북의 표면 직경은 55cm, 측면 넓이는 14cm이다. 북을 두드리는 쪽에는 테두리를 포함해 5cm 넓이의 간격으로 4개의 동심원이 두터운 돋을새김 선으로 돌려 있고, 뒷면은 소리를 내기 위해 꽹과리처럼 비어있다. 표면의 정 중앙에는 많이 두드렸던 흔적과 6개의 동그란 꼭지가 돋아있고, 첫 번째와 두 번째 동심원 사이에는 겹으로 된 연꽃문이 있다. 가장자리에는 당초운문(唐草雲文)이 돋을새김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청동북의 측면에 새겨진 187자의 명문에는 제작시기, 제작자, 절과 시주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불교미술사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보물 제495호 /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연화산1로 471-9
옥천사 청동북은 옥천사가 소장하고 있는 1252년의 명문이 새겨진 청동반자로써 옛날에 군대나 절에서 쓰던 금속으로 만든 북의 일종이다. 청동북에 새겨진 명문에는 원래 지리산의 안양사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옥천사에 소장된 자세한 경위는 알 수 없으나, 청동북이 만들어진 고려시대의 안양사가 기록되고 있는 것을 볼 때, 적어도 200년 이상의 기간동안 안양사에서 사용되다가, 안양사의 폐사되면서 옥천사로 옮겨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북의 표면 직경은 55cm, 측면 넓이는 14cm이다. 북을 두드리는 쪽에는 테두리를 포함해 5cm 넓이의 간격으로 4개의 동심원이 두터운 돋을새김 선으로 돌려 있고, 뒷면은 소리를 내기 위해 꽹과리처럼 비어있다. 표면의 정 중앙에는 많이 두드렸던 흔적과 6개의 동그란 꼭지가 돋아있고, 첫 번째와 두 번째 동심원 사이에는 겹으로 된 연꽃문이 있다. 가장자리에는 당초운문(唐草雲文)이 돋을새김으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청동북의 측면에 새겨진 187자의 명문에는 제작시기, 제작자, 절과 시주자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불교미술사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성 독립운동 근거지 - 옥천사
1920년대 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 가운데 한 곳이다. 3.1운동 전후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변상태와 이주현등은 옥천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였다.
옥천사 승려 신화수와 한봉진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신화수는 1919년 4월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비멸결사 혁신단을 조직하였고, 1920년 8월 김상옥, 한훈 등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한봉진은 1920년 윤영백과 함께 옥천사를 거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옥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20년대 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 가운데 한 곳이다. 3.1운동 전후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변상태와 이주현등은 옥천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였다.
옥천사 승려 신화수와 한봉진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신화수는 1919년 4월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비멸결사 혁신단을 조직하였고, 1920년 8월 김상옥, 한훈 등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한봉진은 1920년 윤영백과 함께 옥천사를 거점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였다. 옥천사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여러 차례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玉泉寺(옥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