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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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주상면 연교리 산151-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황천에서 공의 간절한 희망이 이루어져 마침내 국권을 회복하자 1980년 8월 14일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였다.
하늘을 꿰뚫어 귀신마저 울린 공의 절개와 애국심을 길이 후세에 전하여 거울삼기 바라면서 겨레의 이름으로 이 비를 세운다.
서기 1982년 월 일
경남도지사 이규효 거창군수 강대의 세움
성암사 뒤편의 사거리. 위쪽으로
시멘트길이 끝나고
산속이다.
나무 사이로 묘소가 보인다.
독립유공자 이주환의 묘(1854.11.23~1919.1.21)
경상남도 거창(居昌) 사람이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일제에게의 세금(稅金) 납부를 거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군청에서 호출되자 당시 거창군수 유상범(兪尙範)에게 「나라가 망하고 국왕이 없거늘 누구에게 세금을 바치느냐」고 꾸짖고, 「너같은 친일파는 나의 뜻을 꺽지 못한다」고 힐책하였다. 일제 헌병대가 그를 연행하여 강제로 무인(拇印)을 찍히자 귀가 후에 「자귀」로 자기의 엄지손가락을 절단해 버렸다. 1919년 1월 21일 광무황제가 서거한 소식을 듣고 흰 갓을 쓰고 선영에 참배한 다음 면사무소에 가서 호적 열람을 요구하여 찢어 버리고 거창읍 침류정(枕流亭)에서 사세시(辭世詩) 1편을 남기고 「자귀」로 목을 쳐서 자결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리어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愛國志士 陜川李公 柱煥 之墓 配 孺人 永川李氏 祔左
(애국지사 합천이공 주환 지묘 배 유인 영천이씨 부좌)
애국지사 이공 묘비문

산 높고 물 맑은 곳에 태어나 사는 사람은 마음도 곧고 맑아서 충과 의를 위하여는 목숨도 걸었다는 옛 일들은 귀에 젖어 익었다. 섬기던 임금을 잃으매 산에 숨어 고사리를 꺾어 먹고 지냈다는 중국의 고사나 두문동 72현을 들먹여 무엇하랴. 그래도 그 분들은 구차한 목숨을 끊지는 않았거늘 여기 산수정기 뛰어난 이 고장에는 왕조가 바뀔 때마다 불사이군의 의리를 지킨 분들이 계시더니 일제에 나라를 송두리채 빼앗기고 임금마저 돌아가
시니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연호 이의사가 여기에 잠들어 계신다. 공의 호는 주환 자는 인팔이요 합천인이다. 고는 병수요 비는 연안이씨로 서기 1854년 11월 23일에 주상면 연교리에서 태어나 학문을 연재 심석 양 송선생에게서 배웠고 천추에 잊지 못할 저 을사년과 경술국치에 의분을 참을 길 없어 양 선생이 각각 자결하였으니 그때 공의 심정은 어찌다 헤아리랴. 나라를 빼앗긴 지 10년 세월 칠순을 바라보던 공은 일본 관헌에게 갖은 곤욕을 받았어도 의연히 맞서서 굽히지 않고 원수의 손길이 간 것은 먹지도 입지도 않을 뿐더러 일제를 저주하며 오로지 조국광복을 염원하며 울분으로 지새우다가 고종 황제의 부음을 듣고는 백립 차림으로 주상면사무소에서 호적부를 찟고 영천가 침류정에서 서울을 향해 통곡재배한 뒤 망국한과 충국애군의 충정 어린 애절한 절세시를 남긴 채 자결하였으니 때는 1919년 2월 1일이였고 향년 66세였다. 아~ 충신의 피는 매섭고 짙은 것이어서 침류정 아래 땅은 깊고 깊게 붉었더라.
공의 순절은 만인을 숙연케 하였고 향인의 가슴 속에는 구원히 불씨를 뿌렸스니 연달아 항일의거가 번져갔고 유림에서는 그 높은 얼을 기려서 향리에 성암사를 세워 제향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