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희탁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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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423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의사 남재유공 희탁 유적비
의사 남재 유공 희탁 유적비
당 한말하여 영남 좌편 거창고을 위천에 독립의사가 계시니 곧 궁내부주사이신 거창유공 한제 일명 유탁이니 자는 사범이요 호는 남제이시다. 그 선대는 병부상서 문양공 전은 시조요 사헌부 환공은 증조이시며 고는 계흥이요 비는 동래정씨니 고증 을유년에 금원산아래 금곡동에서 태어나시니 기우가 왕성하고 기개는 높고 뜻이 커서 진실로 정의 있는 곳이면 언제나 솔선하니 많은 사람들이 감복하고 흔항하더라. 때는 한일합방을 당하여 기미독립운동이 전역에서 일어나 맨주먹으로 저들의 총탄을 무릅쓰고 회한없는 죽음을 맹서함은 민족의 쌓인 울분과 의열의 발로였으며 비록 일을 일시에 구제치는 못하였으나 실로 후일 광복의 기근이 되었으니 이때 거창의 위천 고을에 그 함성이 심히 높으니 일방 표솔자는 실인 즉 남재유공있으며 그 후 나라가 광복이 됨에 후인들이 그 의로움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분들 사실을 살펴 의거의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또 온 종중이 그 선조 영사정 신도비 하에

[역문]
의사 남재 유공 희탁 유적비
한말 당시 영남 좌편 거창 고을 위천에 독립의사가 계시니 곧 궁내부주사이신 거창유공 한제이니 자는 사범이요 호는 남제이시다. 그 선대는 병부상서문양공 전은 시조요 사헌부 대사헌 환공은 중조이시며 고는 계홍이요 비는 동래정씨니 고종을유년에 금원산아래 금곡동에서 태어나시니 기우가 왕성하고 기개는 높고 뜻이 커서 진실로 정의 있는 곳이면 언제나 솔선하니 많은 사람들이 감복하고 흔앙하더라. 때는 한일합병을 당하여 기미독립운동이 전역에서 일어나 맨주먹으로 저들의 총탄을 무릅쓰고 회한 없는 죽음을 맹서함은 민족의 쌓인 울분과 의열의 발로였으며 비록 일을 일시에 구제치는 못하였으나 실로 후일 광복의 기근이 되었으니 이때 거창의 위천 고을에 그 함성이 심히 높으니 일방표솔자는 실인 즉 남재유공이었으며 그 후 나라가 광복이 됨에 후인들이 그 의로움을 간절히 사모하고 그분들 사실을 살펴 의거의 사적을 기록하였으며 또 온 종중이 그 선조 영사정 신도비 아래
돌을 다음어 공의 유적비 세울것을 상약하여 의사의 유적비에 쓰일 현각문이 없는 고로 종인 경연 명수 군이 나에게 이글을 청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공과 나는 병기아 같으며 어찌 감히 마다하리요. 생각해보면 그 후에 동란을 겪으면서 문권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다행이도 그 사종이 안의읍지와 경남 3.1운동사 거창군지 이승만 대통령표창장 선균관장 박중훈 표창장 노태우 대통령 훈장 거창유씨 세보등에 역역하고 소상히 기록되어있다. 가만히 생각해보건대 공은 본대 세상에 크게 쓰일 대재량이었으나 조금도 갚음이 없었고 배일 기개가 남보다 다르더니 을사보호조약에 이르매 비분강개해서 구국지책에 매양 선봉에 섰고 태황의 비보를 듣고는 북망호곡을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고 인산 후 독립선언서 낭독후에 온 겨례가 일제히 분기한즉 고은 안의지방의 민중선봉이 되어 군중의 용기를 북돋으니 그 함성은 땅을 뒤흔들고 의기는 충천해서 저들과 다행하며 왜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저들의 총검과 싸워 연이은 살상에도 격려하고 조금도 기개가 꺾이지 않더라. 체포구금후에도 통렬히 저들을 꾸짖기를 마지아니하고 이번 기미사의 책임자임을 자임하고 다른 사람에게 연계시킴은 불가하다고 호통하니 이로 인해 전주감옥에서 3년옥고를 치르면서 갖은 고문을 겪어 몸에 온전한 살갖이 없었으나 시종 흔들리지 아니하니 모두 장하다고 하더라. 그 후 왜경의 혹심한 감시를 견디지 못한 아들은 솔권해서 세상을 숨었고 공은 풀려났으나 두문사세하고 오직 시서로 업을 삼았다. 공복후 병신 9월 초3일메 돌아가시니 금곡촌 뒷산 경좌에 장하사다. 배는 경주 이경일이오 계미년에 출생하여 계축에 돌아가셨다. 의사의 무후가 불가한 고로 종론으로 재종질 병호를 후사로 이음은 의사의 높은 절의를 오래토록 전하고저 하는 심법이라. 멸왈

[역문]
돌을 다듬어 공의 유적비 세울 것을 상약하여 의사의 유적비에 쓰일 현각문이 없는 고로 종인 경연 명수 군이 나에게 이글을 청하였다. 돌이켜 보건대 공과 나는 병이가 같으며 어찌 감히 마다하리요. 생각해보면 그 후에 동란을 겪으면서 문권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다행히도 그 사증이 안의읍지와 경남 3․1운동사 거창군지 이승만 대통령 표창장 성균관장 박중훈 표창장 노태우 대통령 훈장 거창유씨 세보 등에 역역하고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공은 본대 세상에 크게 쓰일 대재량이었으나 조금도 갚음이 없었고 배일기개가 남보다 다르더니 을사보호조약에 이르매 비문강개해서 구국지책에 매양선봉에 섰고 태황의 비보를 듣고는 북망 호곡을 스스로 그치지 아니하고 인산 후 독립선언서낭독후에 온 겨레가 일제히 분기한즉 공은 안의지방의 민중선봉이 되어 군중의 용기를 북돋우니 그 함성은 땅을 뒤흔들고 의기는 충천해서 저들과 다행하며 왜 헌병 분견소를 습격하여 저들의 총검과 싸워 연이은 살상에도 격려하고 조금도 기개가 꺾이지 않더라. 체포구금 후에도 통열히 저들을 꾸짖기를 마지아니하고 이번 기미사의 책임자임을 자임하고 다른 사람에게 연계시킴은 불가하다고 호통하니 이로 인해 진주감옥에서 삼년옥고를 치르면서 갖은 고문을 겪어 몸에 온전한 살갗이 없었으나 시종 흔들리지 아니하니 모두 장하다고 하더라. 그 후 왜경의 혹심한 감시를 견디지 못한 아들은 솔권해서 세상을 숨었고 공은 풀려났으나 두문사세하고 오직 시서로 업을 삼았다. 광복 후 병신 구월초삼일에 돌아가시니 금곡촌 뒷산 경좌에 장사하다. 배는 경주 이경일이오 계미년에 출생하여 계축년에 돌아가셨다. 의사에 무후가 불가한 고로 종론으로 재종질 병호를 후사로 이음은 의사의 높은 절의를 오래토록 전하고저 하는 심법이리라. 명왈
일에는 대소가 있을지나 그 이치는 하나로다. 그 의로움은 돋보였네. 충전하는 그 함성이 미친바 크고 커서 오랑캐들 몰아내니 산하가 깨끗하고 잃었던 빛 회복되니 일월 새빛도 새롭도다. 여러 칭송이 이어지니 공은 길이 불사로다.
갑술지월 완산 이근섭 지 병부상서 문양공 34세손 유명수 근서 거창유씨 대종회 근수

[역문]
일에는 대소가 있을지나 그 이치는 하나로다. 나라위한 의리에도 그런 처지 따름이라. 기미만세 그 함성이 나라 정의 지켰도다. 위대하다. 유공이여 한 고을을 창기하고 일은 비록 구하지 못했으나 그 의로움은 돋보였네. 충천하는 그 함성이 미친바 크고 커서 오랑캐들 몰아내니 산하가 다시 깨끗하고 잃었던 빛 회복되니 일월 빛도 새롭도다. 여러 칭송 이어지니 공은 길이 불사로다. 갑술지월 완산 이근섭 지 병부상서 문양공 34세손 유명수 근서 거창유씨 대종회 근수
경남 거창군 위천면 장기리 423 창촌마을 영사정 앞.
의사 남재 유희탁 선생 유적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