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1062
- 탐방로그
- 광복운동 모임장소 오례서원 원정비는 경남 거창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悟禮書院 重建記(오례서원 중건기)
悟禮書院 重建 上樑文(오례서원 중건 상량문)
悟禮書院 原韻(오례서원 원운)
悟禮祠(오례사)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1062 면우 곽종석, 백산 안희제, 문파 최준 선생이 모여서 광복운동 논의했다는 오례서원을 찾아가고 있다.
오례마을 유래
백촌 김문기 선생의 현손인 영사공께서 여섯째 아들 장수를 데리고 영동군 미그리에서 살다가 백촌 선생께서 단종 복위운동을 하시다 처형되자 삼족을 멸한다 하여 피난처를 찾아서 거창군 신원면 덕신리 매봉산 아래 근터에 숨어 지내다 웃터에 녀려오셔 거주하시다가 현마을로 내려와 자리 잡으셨다. 마을 앞 조상걸에 돌로 조상을 모셨으니 세월이 흘러 돌 모은 것이 수해로 얿어지자 마을 안정을 위하여 현제 마을 앞 당산에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예전에는 조산말이라고 불렸으나 중유리 예동에 사시던 면우 곽종석 선생께서 연수사에 공부하러 다니시다 가끔 들리시면서 이 마을은 예을 꺠달았다 하면서 悟禮(오례)마을이라고 이름 지어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던 중 달산공파 종중 형덕공께서 어른들을 모신 자리에서 작은 서재를 지어 집안사람들에게 한학을 시키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니깐 윤권공을 비롯한 달신공파 종중 어른들께서 받아드리자 서재 터는 내가 희사하겠노라 하며 집을 짓게 되어 시작하자 목수분들이 집을 자꾸만 키워서 지어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종파 상규공 계파 형장공께서 이렇게 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동참하여 덕은공파 종중서재를 세우자 간청하니 맏아들이 지금의 서원이 서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하여 모덕제 현판을 걸고 윤권 형장 형배 상규 영규공을 비롯한 종중 어른들께서 각 고을 선비를 모셔 유계를 치러 오던 중 거창에 이참사를 비롯한 유림선비님들이 본 손에 청하기를 단종 복위 운동을 하시다가 처형당하신 백촌 김문기 선생과 아드님이 아버지를 따라 자결하신 여병제 현석공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지어 제례를 지내자고 청하여 본손이 받아들여 사당을 짓고 모덕제 현판을 내리고 추원제 현판을 걸어 음 3월 中丁(중정)에 제례를 올리고 있던 중 인당 진석공께서 문화재 신청을 하여 1992년에 도문화재 191호를 지정받아 1994년도에 수리 보수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에 인당 진석공께서 오례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 2006년에 뜻하지 않는 수해로 인하여 서원과 충의문 남문이 유실되어 문화재청에 복원하여 2008년에 완공했다. 지금 음력 3월 中丁(충정)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그리하여 자손만대 기리 전하기 위하여 백촌 19세손 여러분이 기록을 남겨본다.
백촌 김문기 선생의 현손인 영사공께서 여섯째 아들 장수를 데리고 영동군 미그리에서 살다가 백촌 선생께서 단종 복위운동을 하시다 처형되자 삼족을 멸한다 하여 피난처를 찾아서 거창군 신원면 덕신리 매봉산 아래 근터에 숨어 지내다 웃터에 녀려오셔 거주하시다가 현마을로 내려와 자리 잡으셨다. 마을 앞 조상걸에 돌로 조상을 모셨으니 세월이 흘러 돌 모은 것이 수해로 얿어지자 마을 안정을 위하여 현제 마을 앞 당산에 제를 올려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였다. 예전에는 조산말이라고 불렸으나 중유리 예동에 사시던 면우 곽종석 선생께서 연수사에 공부하러 다니시다 가끔 들리시면서 이 마을은 예을 꺠달았다 하면서 悟禮(오례)마을이라고 이름 지어 불리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던 중 달산공파 종중 형덕공께서 어른들을 모신 자리에서 작은 서재를 지어 집안사람들에게 한학을 시키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니깐 윤권공을 비롯한 달신공파 종중 어른들께서 받아드리자 서재 터는 내가 희사하겠노라 하며 집을 짓게 되어 시작하자 목수분들이 집을 자꾸만 키워서 지어 그 광경을 지켜보시던 종파 상규공 계파 형장공께서 이렇게 할 것이 아니고 우리도 동참하여 덕은공파 종중서재를 세우자 간청하니 맏아들이 지금의 서원이 서게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하여 모덕제 현판을 걸고 윤권 형장 형배 상규 영규공을 비롯한 종중 어른들께서 각 고을 선비를 모셔 유계를 치러 오던 중 거창에 이참사를 비롯한 유림선비님들이 본 손에 청하기를 단종 복위 운동을 하시다가 처형당하신 백촌 김문기 선생과 아드님이 아버지를 따라 자결하신 여병제 현석공의 충정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지어 제례를 지내자고 청하여 본손이 받아들여 사당을 짓고 모덕제 현판을 내리고 추원제 현판을 걸어 음 3월 中丁(중정)에 제례를 올리고 있던 중 인당 진석공께서 문화재 신청을 하여 1992년에 도문화재 191호를 지정받아 1994년도에 수리 보수하였다. 그리하여 1994년에 인당 진석공께서 오례서원으로 승격시켰다. 그 후 2006년에 뜻하지 않는 수해로 인하여 서원과 충의문 남문이 유실되어 문화재청에 복원하여 2008년에 완공했다. 지금 음력 3월 中丁(충정)에 제례를 올리고 있다. 그리하여 자손만대 기리 전하기 위하여 백촌 19세손 여러분이 기록을 남겨본다.
悟禮書院重修獻誠錄碑(오례서원 중수 헌성록비)
獻誠錄(헌성록)
正煥(정환) 宗孫(종손)을 爲始(위시)하여 貴生(귀생), 命圭(명규), 鎭述(진술), 淋圭(임규), 鎭道(진도), 鎭浩(진호), 鎭八(진팔), 封圭(봉규) 元老(원로)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後孫(후손)들의 精誠(정성)을 모아 檀紀(단기) 四三二三年度(사삼이삼년도)에 德隱公(덕은공) 先祖(선조)의 墓域(묘역)을 淨化(정화)하였고, 四三二五年度(사삼이오년도)에는 悟禮祠(오례사)를 文化財(문화재)로 指定(지정)받게 하였으며, 四三二九年度(사삼이구년도)에 追遠齋(추원재)가 書院(서원)으로 格上(격상)됨과 同時(동시)에 重修(중수) 및 四三三十年度(사삼삼십년도)에 書院(서원)의 院庭碑(원정비)를 建立(건립)함에 있어, 이 期間 中(기간 중) 노심초사하였던 분의 이름을 새겨 오래도록 紀念(기념)하고자 한다.
檀紀(단기) 四三三十年(4330년) 月(월) 日(일)
江陵后人(강릉후인) 烏丁(오정) 金振海(김진해) 書(서)
德隱公(덕은공) 後孫(후손) 一同(일동) 竪(수)
正煥(정환) 宗孫(종손)을 爲始(위시)하여 貴生(귀생), 命圭(명규), 鎭述(진술), 淋圭(임규), 鎭道(진도), 鎭浩(진호), 鎭八(진팔), 封圭(봉규) 元老(원로)님의 뜻을 받들어, 우리 後孫(후손)들의 精誠(정성)을 모아 檀紀(단기) 四三二三年度(사삼이삼년도)에 德隱公(덕은공) 先祖(선조)의 墓域(묘역)을 淨化(정화)하였고, 四三二五年度(사삼이오년도)에는 悟禮祠(오례사)를 文化財(문화재)로 指定(지정)받게 하였으며, 四三二九年度(사삼이구년도)에 追遠齋(추원재)가 書院(서원)으로 格上(격상)됨과 同時(동시)에 重修(중수) 및 四三三十年度(사삼삼십년도)에 書院(서원)의 院庭碑(원정비)를 建立(건립)함에 있어, 이 期間 中(기간 중) 노심초사하였던 분의 이름을 새겨 오래도록 紀念(기념)하고자 한다.
檀紀(단기) 四三三十年(4330년) 月(월) 日(일)
江陵后人(강릉후인) 烏丁(오정) 金振海(김진해) 書(서)
德隱公(덕은공) 後孫(후손) 一同(일동) 竪(수)
悟禮書院 院庭碑(오례서원 원정비)
悟禮書院 院庭碑 銘序(오례서원 원정비 명서)
구름 위에 높이 솟은 梅峯(매봉)은 節義(절의)를 象徵(상징)하여 뒤에서 護衛(호위)하고 堪樂 雄山(감악 웅산)은 千古 地靈(천고 지령)을 藏(장)하여 앞에서 侍立(시립)하니 이 書院(서원)에 萬古忠節(만고충절)의 義魂(의혼)이 머무르고 이 院(원)에 錄(록)하여 人脈 俊英(인맥 준영)이 連綿(연면)하다.
朝鮮朝(조선조) 五百 年(오백 년) 忠 中 第一(충 중 제일)인 六臣(육신) 白村 先生(백촌 선생)의 裔孫(예손)인 金寧 金氏(김녕 김씨)의 世居地(세거지) 居昌(거창) 悟禮洞(오례동)의 이 悟禮書院(오례서원)에는 白村(백촌) 金先生(김선생)을 主壁(주벽)으로 하여 如甁齋(여병재) 金先生(김선생), 德隱(덕은) 金先生(김선생), 松菴(송암) 金先生(김선생)을 配享(배향)하여 萬人(만인)이 敬拜(경배)한다.
白村 先生(백촌 선생)의 諱(휘)는 文起(문기)[初諱(초 휘) 孝起(효기)], 字(자)는 汝恭(여공), 號(호)는 白村(백촌), 諡(시)는 忠毅(충의), 本(본)은 金寧(김녕)이니 新羅(신라) 敬順大王(경순대왕)의 後(후)라. 孝行(효행)이 卓異(탁이)하고 器宇(기우)가 宏大(굉대)하며 王朝實錄(왕조실록)에 性通違善言語疾惡(성통위선언어질오)요 雖儒名弓文武兼全(수유명궁문무겸전)이라 하니 當代 第一(당대 제일)의 人物(인물)이라. 世宗 八 年(세종 팔 년) 文科及第(문과급제)한 후 翰林(한림)으로 莁仕(무사)하여 世宗(세종) 文宗(문종) 端宗(단종)의 사랑을 받아 史官(사관) 言官(언관) 中央(중앙) 地方(지방) 文武(문무) 各 官(각 관)을 거쳐 咸吉 監司(함길 감사)로서 儒敎(유교)로 治道 愛民(치도 애민)하고 屯田(둔전) 成功(성공)으로 文宗(문종)의 親製褒諭(친제포유)를 받았고, 刑曹參判(형조참판)으로 歸京(귀경)하매道民(도민)이 生祠(생사)를 모셨다 하니 그 善政(선정)을 짐작케 한다. 癸酉政變(계유정변)에 反首陽派(반수양파)로 몰렸으나 李澄玉(이징옥)의 亂(난)에 咸吉道節制使(함길도절제사)로 出將(출장)하여危機(위기)를 免(면)하고 女眞(여진) 侵入(침입)을 막은功勳(공훈) 또한 至大(지대)하였다. 世祖(세조)가 簒位(찬위)하자 工曹判書(공조판서)兼(겸) 三軍都鎭撫(삼군도진무)로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先生(선생)과 端宗復位(단종복위)를 謀議(모의)할새, 三雲劒(삼운검)인成勝(성승) 兪應孚(유응부) 朴靖(박정) 將軍(장군)으로 하여금 世祖(세조)를 殺害(살해)하는 일을 分擔(분담)시키고 擧事(거사)의 成敗(성패)를 決定(결정)할 軍 動員(군 동원)을 스스로 맡아 反對勢力(반대세력)을 모두 制壓(제압)키로 하였다. 이 謀議者 中(모의자 중) 唯一(유일)한 現職判書(현직판서)요, 兵力(병력) 動員能力者(동원능력자)이며, 通達(통달) 能辯(능변) 疾惡(질오)의 尊敬(존경)받는性品(성품)으로 미루어 이 分擔(분담)에서先生(선생)의 領導的(영도적) 位相(위상)을 알 수 있다. 謀議(모의)가 發覺(발각)된 後(후) 史上(사상) 類例(유례)없는 酷毒(혹독)한 拷問(고문)을 끝내 이기고 鞫問(국문)을 拒否(거부) 緘口不服(함구불복)
구름 위에 높이 솟은 梅峯(매봉)은 節義(절의)를 象徵(상징)하여 뒤에서 護衛(호위)하고 堪樂 雄山(감악 웅산)은 千古 地靈(천고 지령)을 藏(장)하여 앞에서 侍立(시립)하니 이 書院(서원)에 萬古忠節(만고충절)의 義魂(의혼)이 머무르고 이 院(원)에 錄(록)하여 人脈 俊英(인맥 준영)이 連綿(연면)하다.
朝鮮朝(조선조) 五百 年(오백 년) 忠 中 第一(충 중 제일)인 六臣(육신) 白村 先生(백촌 선생)의 裔孫(예손)인 金寧 金氏(김녕 김씨)의 世居地(세거지) 居昌(거창) 悟禮洞(오례동)의 이 悟禮書院(오례서원)에는 白村(백촌) 金先生(김선생)을 主壁(주벽)으로 하여 如甁齋(여병재) 金先生(김선생), 德隱(덕은) 金先生(김선생), 松菴(송암) 金先生(김선생)을 配享(배향)하여 萬人(만인)이 敬拜(경배)한다.
白村 先生(백촌 선생)의 諱(휘)는 文起(문기)[初諱(초 휘) 孝起(효기)], 字(자)는 汝恭(여공), 號(호)는 白村(백촌), 諡(시)는 忠毅(충의), 本(본)은 金寧(김녕)이니 新羅(신라) 敬順大王(경순대왕)의 後(후)라. 孝行(효행)이 卓異(탁이)하고 器宇(기우)가 宏大(굉대)하며 王朝實錄(왕조실록)에 性通違善言語疾惡(성통위선언어질오)요 雖儒名弓文武兼全(수유명궁문무겸전)이라 하니 當代 第一(당대 제일)의 人物(인물)이라. 世宗 八 年(세종 팔 년) 文科及第(문과급제)한 후 翰林(한림)으로 莁仕(무사)하여 世宗(세종) 文宗(문종) 端宗(단종)의 사랑을 받아 史官(사관) 言官(언관) 中央(중앙) 地方(지방) 文武(문무) 各 官(각 관)을 거쳐 咸吉 監司(함길 감사)로서 儒敎(유교)로 治道 愛民(치도 애민)하고 屯田(둔전) 成功(성공)으로 文宗(문종)의 親製褒諭(친제포유)를 받았고, 刑曹參判(형조참판)으로 歸京(귀경)하매道民(도민)이 生祠(생사)를 모셨다 하니 그 善政(선정)을 짐작케 한다. 癸酉政變(계유정변)에 反首陽派(반수양파)로 몰렸으나 李澄玉(이징옥)의 亂(난)에 咸吉道節制使(함길도절제사)로 出將(출장)하여危機(위기)를 免(면)하고 女眞(여진) 侵入(침입)을 막은功勳(공훈) 또한 至大(지대)하였다. 世祖(세조)가 簒位(찬위)하자 工曹判書(공조판서)兼(겸) 三軍都鎭撫(삼군도진무)로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先生(선생)과 端宗復位(단종복위)를 謀議(모의)할새, 三雲劒(삼운검)인成勝(성승) 兪應孚(유응부) 朴靖(박정) 將軍(장군)으로 하여금 世祖(세조)를 殺害(살해)하는 일을 分擔(분담)시키고 擧事(거사)의 成敗(성패)를 決定(결정)할 軍 動員(군 동원)을 스스로 맡아 反對勢力(반대세력)을 모두 制壓(제압)키로 하였다. 이 謀議者 中(모의자 중) 唯一(유일)한 現職判書(현직판서)요, 兵力(병력) 動員能力者(동원능력자)이며, 通達(통달) 能辯(능변) 疾惡(질오)의 尊敬(존경)받는性品(성품)으로 미루어 이 分擔(분담)에서先生(선생)의 領導的(영도적) 位相(위상)을 알 수 있다. 謀議(모의)가 發覺(발각)된 後(후) 史上(사상) 類例(유례)없는 酷毒(혹독)한 拷問(고문)을 끝내 이기고 鞫問(국문)을 拒否(거부) 緘口不服(함구불복)
悟禮書院 院庭碑 銘序(오례서원 원정비 명서)
구름 위에 높이 솟은 梅峯(매봉)은 節義(절의)를 象徵(상징)하여 뒤에서 護衛(호위)하고 堪樂 雄山(감악 웅산)은 千古 地靈(천고 지령)을 藏(장)하여 앞에서 侍立(시립)하니 이 書院(서원)에 萬古忠節(만고충절)의 義魂(의혼)이 머무르고 이 院(원)에 錄(록)하여 人脈 俊英(인맥 준영)이 連綿(연면)하다.
朝鮮朝(조선조) 五百 年(오백 년) 忠 中 第一(충 중 제일)인 六臣(육신) 白村 先生(백촌 선생)의 裔孫(예손)인 金寧 金氏(김녕 김씨)의 世居地(세거지) 居昌(거창) 悟禮洞(오례동)의 이 悟禮書院(오례서원)에는 白村(백촌) 金先生(김선생)을 主壁(주벽)으로 하여 如甁齋(여병재) 金先生(김선생), 德隱(덕은) 金先生(김선생), 松菴(송암) 金先生(김선생)을 配享(배향)하여 萬人(만인)이 敬拜(경배)한다.
白村 先生(백촌 선생)의 諱(휘)는 文起(문기)[初諱(초 휘) 孝起(효기)], 字(자)는 汝恭(여공), 號(호)는 白村(백촌), 諡(시)는 忠毅(충의), 本(본)은 金寧(김녕)이니 新羅(신라) 敬順大王(경순대왕)의 後(후)라. 孝行(효행)이 卓異(탁이)하고 器宇(기우)가 宏大(굉대)하며 王朝實錄(왕조실록)에 性通違善言語疾惡(성통위선언어질오)요 雖儒名弓文武兼全(수유명궁문무겸전)이라 하니 當代 第一(당대 제일)의 人物(인물)이라. 世宗 八 年(세종 팔 년) 文科及第(문과급제)한 후 翰林(한림)으로 莁仕(무사)하여 世宗(세종) 文宗(문종) 端宗(단종)의 사랑을 받아 史官(사관) 言官(언관) 中央(중앙) 地方(지방) 文武(문무) 各 官(각 관)을 거쳐 咸吉 監司(함길 감사)로서 儒敎(유교)로 治道 愛民(치도 애민)하고 屯田(둔전) 成功(성공)으로 文宗(문종)의 親製褒諭(친제포유)를 받았고, 刑曹參判(형조참판)으로 歸京(귀경)하매道民(도민)이 生祠(생사)를 모셨다 하니 그 善政(선정)을 짐작케 한다. 癸酉政變(계유정변)에 反首陽派(반수양파)로 몰렸으나 李澄玉(이징옥)의 亂(난)에 咸吉道節制使(함길도절제사)로 出將(출장)하여危機(위기)를 免(면)하고 女眞(여진) 侵入(침입)을 막은功勳(공훈) 또한 至大(지대)하였다. 世祖(세조)가 簒位(찬위)하자 工曹判書(공조판서)兼(겸) 三軍都鎭撫(삼군도진무)로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先生(선생)과 端宗復位(단종복위)를 謀議(모의)할새, 三雲劒(삼운검)인成勝(성승) 兪應孚(유응부) 朴靖(박정) 將軍(장군)으로 하여금 世祖(세조)를 殺害(살해)하는 일을 分擔(분담)시키고 擧事(거사)의 成敗(성패)를 決定(결정)할 軍 動員(군 동원)을 스스로 맡아 反對勢力(반대세력)을 모두 制壓(제압)키로 하였다. 이 謀議者 中(모의자 중) 唯一(유일)한 現職判書(현직판서)요, 兵力(병력) 動員能力者(동원능력자)이며, 通達(통달) 能辯(능변) 疾惡(질오)의 尊敬(존경)받는性品(성품)으로 미루어 이 分擔(분담)에서先生(선생)의 領導的(영도적) 位相(위상)을 알 수 있다. 謀議(모의)가 發覺(발각)된 後(후) 史上(사상) 類例(유례)없는 酷毒(혹독)한 拷問(고문)을 끝내 이기고 鞫問(국문)을 拒否(거부) 緘口不服(함구불복)
구름 위에 높이 솟은 梅峯(매봉)은 節義(절의)를 象徵(상징)하여 뒤에서 護衛(호위)하고 堪樂 雄山(감악 웅산)은 千古 地靈(천고 지령)을 藏(장)하여 앞에서 侍立(시립)하니 이 書院(서원)에 萬古忠節(만고충절)의 義魂(의혼)이 머무르고 이 院(원)에 錄(록)하여 人脈 俊英(인맥 준영)이 連綿(연면)하다.
朝鮮朝(조선조) 五百 年(오백 년) 忠 中 第一(충 중 제일)인 六臣(육신) 白村 先生(백촌 선생)의 裔孫(예손)인 金寧 金氏(김녕 김씨)의 世居地(세거지) 居昌(거창) 悟禮洞(오례동)의 이 悟禮書院(오례서원)에는 白村(백촌) 金先生(김선생)을 主壁(주벽)으로 하여 如甁齋(여병재) 金先生(김선생), 德隱(덕은) 金先生(김선생), 松菴(송암) 金先生(김선생)을 配享(배향)하여 萬人(만인)이 敬拜(경배)한다.
白村 先生(백촌 선생)의 諱(휘)는 文起(문기)[初諱(초 휘) 孝起(효기)], 字(자)는 汝恭(여공), 號(호)는 白村(백촌), 諡(시)는 忠毅(충의), 本(본)은 金寧(김녕)이니 新羅(신라) 敬順大王(경순대왕)의 後(후)라. 孝行(효행)이 卓異(탁이)하고 器宇(기우)가 宏大(굉대)하며 王朝實錄(왕조실록)에 性通違善言語疾惡(성통위선언어질오)요 雖儒名弓文武兼全(수유명궁문무겸전)이라 하니 當代 第一(당대 제일)의 人物(인물)이라. 世宗 八 年(세종 팔 년) 文科及第(문과급제)한 후 翰林(한림)으로 莁仕(무사)하여 世宗(세종) 文宗(문종) 端宗(단종)의 사랑을 받아 史官(사관) 言官(언관) 中央(중앙) 地方(지방) 文武(문무) 各 官(각 관)을 거쳐 咸吉 監司(함길 감사)로서 儒敎(유교)로 治道 愛民(치도 애민)하고 屯田(둔전) 成功(성공)으로 文宗(문종)의 親製褒諭(친제포유)를 받았고, 刑曹參判(형조참판)으로 歸京(귀경)하매道民(도민)이 生祠(생사)를 모셨다 하니 그 善政(선정)을 짐작케 한다. 癸酉政變(계유정변)에 反首陽派(반수양파)로 몰렸으나 李澄玉(이징옥)의 亂(난)에 咸吉道節制使(함길도절제사)로 出將(출장)하여危機(위기)를 免(면)하고 女眞(여진) 侵入(침입)을 막은功勳(공훈) 또한 至大(지대)하였다. 世祖(세조)가 簒位(찬위)하자 工曹判書(공조판서)兼(겸) 三軍都鎭撫(삼군도진무)로 成三問(성삼문) 朴彭年(박팽년) 先生(선생)과 端宗復位(단종복위)를 謀議(모의)할새, 三雲劒(삼운검)인成勝(성승) 兪應孚(유응부) 朴靖(박정) 將軍(장군)으로 하여금 世祖(세조)를 殺害(살해)하는 일을 分擔(분담)시키고 擧事(거사)의 成敗(성패)를 決定(결정)할 軍 動員(군 동원)을 스스로 맡아 反對勢力(반대세력)을 모두 制壓(제압)키로 하였다. 이 謀議者 中(모의자 중) 唯一(유일)한 現職判書(현직판서)요, 兵力(병력) 動員能力者(동원능력자)이며, 通達(통달) 能辯(능변) 疾惡(질오)의 尊敬(존경)받는性品(성품)으로 미루어 이 分擔(분담)에서先生(선생)의 領導的(영도적) 位相(위상)을 알 수 있다. 謀議(모의)가 發覺(발각)된 後(후) 史上(사상) 類例(유례)없는 酷毒(혹독)한 拷問(고문)을 끝내 이기고 鞫問(국문)을 拒否(거부) 緘口不服(함구불복)
하고 世祖二年(세조2년) 六月(6월) 八日(8일) 轘刑(환형)으로 殉節(순절)하니 洪艮齋(홍간재) 洪梅山(홍매산)이 世論(세론)에 이 不服(불복)이 尤烈(우열)이라고 評(평)했다. 名望(명망)높은 高位(고위) 儒臣(유신)으로 富貴榮華(부귀영화) 生命(생명)을 忠(충)과 義(의)를 爲(위)하여 草芥(초개)같이 버린 백촌 선생, 朴彭年(박팽년), 成三問(성삼문) 河緯地(하위지), 李塏(이개), 柳誠源(류성원)의 여섯 분이 世祖(세조) 때부터 六臣(육신)으로 꼽혀, 世祖實錄(세조실록) 二年(2년) 六月(6월) 庚子日(경자일) 條(조)에 여러분을 鞫問(국문)했으되 위 여섯 분에 대하여만 鞫問(국문) 結果(결과)와 自盡(자진) 事實(사실)을 記錄(기록)하였고, 一週日間(일주일간) 鞫問(국문) 後(후)인 同月(동월) 丙午日(병오일) 條(조)에도 많은 분들은 死刑(사형)한 記錄(기록) 다음에, 위 六臣(육신)만의謀議(모의) 動機(동기) 및 活動相(활동상)을 個別(개별) 說明(설명)하였고, 그 翌日(익일) 條(조)의 大赦令(대사령) 敎書(교서)에 先生(선생)을 包含(포함)한 儒臣(유신)들이 成勝(성승), 兪應孚(유응부), 朴靖(박정) 등 將臣(장신)을 羽翼(우익)으로 삼아 擧事(거사)하려 하였다고 記述(기술)하여, 위 여섯 분이 死六臣(사육신)임을 傳(전)하니, 白村先生(백촌 선생)은 世祖(세조) 때부터 가려진 正史 上(정사 상)의 六臣(육신)이다. 事件(사건) 때 三歲(3세)였던 南秋江(남추강)이 傳聞(전문)한 바를 私撰(사찬)한 野史(야사) 六臣傳(육신전)에는, 위 六臣(육신) 中(중) 白村先生(백촌 선생) 代身(대신) 兪應孚(유응부) 將軍(장군)으로 記述(기술)한 까닭에 나머지 六臣(육신)보다 뒤늦게 八世(8세) 諱(휘) 爾輝(이휘) 公(공)의 擊鼓(격고)로 伸寃(신원)되었고, 左贊成(좌찬성)을贈職(증직) 받으셨다. 近來(근래) 實錄(실록)이 公開(공개)되어 六臣傳(육신전)의 內容(내용)에 不服(불복) 宰相(재상) 咸吉節制使(함길절제사) 등 先生(선생)에 關(관)한 事實(사실)이 兪將軍(유장군)의 事實(사실)로 記述(기술)되어 있음이 밝혀져 先生(선생)이 兪將軍(유장군)으로 誤傳(오전)된 것임이 알려졌다. 그리하여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는 一九七七年(1977년) 九月(9월) 二十二日(12일), 白村先生(백촌 선생)을 包含(포함)한 위六臣(육신)이 世祖(세조) 때 가려진 六臣(육신)이며 王朝實錄(왕조실록)은 正史(정사)이고, 秋江集(추강집)은 傳聞(전문)을 私撰(사찬)한 것이라고 判定(판정)하고, 同年(동년) 十二月(12월) 二日(2일) 死六臣(사육신) 墓域(묘역)에 家廟(가묘)를 奉安(봉안)할 것을 決議(결의)함으로써 翌年(익년) 五月(5월) 十八日(18일) 死六臣 公園(사육신공원)에 衣帶葬(의대장)으로 假墓(가묘)를 奉安(봉안)하였다. 이 顯彰(현창)은 先生(선생)의 十九世 孫(19손) 鎭佑(진우) 憲法裁判官(헌법재판관)과 鎭奭(진석) 新羅金氏大宗院總裁(신라김씨대종원총재)와 許銘(허명) 博士(박사)의 業績(업적)임을 添記(첨기)한다.
如甁齋先生(여병재 선생)의 諱(휘)는玄錫(현석)이니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胤子(윤자)로居昌(거창) 寧越(영월)에 出宰(출재)하여 敎化(교화) 愛民(애민) 治績(치적)을 쌓았고, 丙子士禍(병자사화)에는白村先生(백촌 선생)을 따라 毅然(의연)히 殉節(순절)하였다. 後日(후일) 吏曹判書(이조판서)를 贈職(증직)받고忠臣(충신) 旌門(정문)이 王命(왕명)으로 섰다.
德隱先生(덕은 선생)은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六世孫(6세손)으로 諱(휘)는 長壽(장수)며, 壬辰倭亂(임진왜란)에 星州(성주)로부터 家眷(가권)을 帶同(대동)하고 이곳 大德山(대덕산) 下(하)로 避亂(피란)하여 洞名(동명)을 悟禮(오례)라 짓고 堂號(당호)를 德隱(덕은)이라 하고, 家困難之際(가곤난지제)에도 道學(도학)을 崇尙(숭상)하고 德業(덕업)을 쌓으시며 社會(사회) 敎化(교화)에 힘쓰니, 隣近(인근)의 風俗(풍속)이 새로워졌다. 또한 世上(세상) 名利(명리)에 戀戀(연연)치 않고雲林泉石(운림천석)에 逍遙隱居(소요은거)하니, 可謂(가위) 隱逸眞君子(은일진군자)이었다. 松菴先生(송암선생)은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十一世 孫(11세손)으로 諱(휘)는 逸鑑(일감)이니, 通訓大夫(통훈대부) 軍資監(군자감) 正(정)을 歷任(역임)하고 孝行(효행)이 뛰어났고, 孔孟(공맹)의 가르침에 따라 修身齊家(수신제가)하니 道學君子(도학군자)로 稱頌(칭송)되었다. 庚子年(경자년)에 後孫(후손)들과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精忠大節(정충대절)을 景慕(경모)한 居昌(거창), 陜川(합천), 山淸(산청), 咸陽(함양), 星州(성주) 등의 여러 고을 儒林(유림)이 白村先生(백촌선생)을 모실 祠宇(사우)를 奉建(봉건)키로 契(계)를 모아 오던 中(중) 乙未年(을미년) 四月(사월) 賢後孫(현 후손) 諱(휘) 尙圭(상규), 諱(휘) 炯培(형배), 諱(휘) 炯鶴(형학), 諱(휘) 炯章(형장), 諱(휘) 永圭(영규) 等(등)이 儒林諸彦(유림제언)과 合心(합심)하여 悟禮祠(오례사)를 奉建(봉건)하고 白村先生(백촌 선생)을 비롯한 四位(사위)를 奉安(봉안)하였다. 國權(국권)이 喪失(상실)된 暗鬱(암울)한 倭政(왜정) 때는 郭俛宇(곽면우), 安白山(안백산), 崔汶坡(최문파) 先生(선생) 등의 愛國志士(애국지사)들이 이 祠(사)에 모여 光復運動(광복운동)을 計劃(계획)하였으니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忠脈(충맥)이 綿綿(면면)히 이어짐이라 하겠다. 祠宇(사우)가 百餘年(백여 년)의 風磨雨洗(풍마우세)에 기와가 깨지고 기둥이 傷(상)하여, 一九九二年(1992년) 悟禮(오례) 後孫(후손) 僉宗(첨종)이 誠金(성금)을 모아 重修(중수)하며 書院(서원)으로 擴充(확충)하였다. 同年(동년) 十二月(12월)
如甁齋先生(여병재 선생)의 諱(휘)는玄錫(현석)이니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胤子(윤자)로居昌(거창) 寧越(영월)에 出宰(출재)하여 敎化(교화) 愛民(애민) 治績(치적)을 쌓았고, 丙子士禍(병자사화)에는白村先生(백촌 선생)을 따라 毅然(의연)히 殉節(순절)하였다. 後日(후일) 吏曹判書(이조판서)를 贈職(증직)받고忠臣(충신) 旌門(정문)이 王命(왕명)으로 섰다.
德隱先生(덕은 선생)은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六世孫(6세손)으로 諱(휘)는 長壽(장수)며, 壬辰倭亂(임진왜란)에 星州(성주)로부터 家眷(가권)을 帶同(대동)하고 이곳 大德山(대덕산) 下(하)로 避亂(피란)하여 洞名(동명)을 悟禮(오례)라 짓고 堂號(당호)를 德隱(덕은)이라 하고, 家困難之際(가곤난지제)에도 道學(도학)을 崇尙(숭상)하고 德業(덕업)을 쌓으시며 社會(사회) 敎化(교화)에 힘쓰니, 隣近(인근)의 風俗(풍속)이 새로워졌다. 또한 世上(세상) 名利(명리)에 戀戀(연연)치 않고雲林泉石(운림천석)에 逍遙隱居(소요은거)하니, 可謂(가위) 隱逸眞君子(은일진군자)이었다. 松菴先生(송암선생)은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十一世 孫(11세손)으로 諱(휘)는 逸鑑(일감)이니, 通訓大夫(통훈대부) 軍資監(군자감) 正(정)을 歷任(역임)하고 孝行(효행)이 뛰어났고, 孔孟(공맹)의 가르침에 따라 修身齊家(수신제가)하니 道學君子(도학군자)로 稱頌(칭송)되었다. 庚子年(경자년)에 後孫(후손)들과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精忠大節(정충대절)을 景慕(경모)한 居昌(거창), 陜川(합천), 山淸(산청), 咸陽(함양), 星州(성주) 등의 여러 고을 儒林(유림)이 白村先生(백촌선생)을 모실 祠宇(사우)를 奉建(봉건)키로 契(계)를 모아 오던 中(중) 乙未年(을미년) 四月(사월) 賢後孫(현 후손) 諱(휘) 尙圭(상규), 諱(휘) 炯培(형배), 諱(휘) 炯鶴(형학), 諱(휘) 炯章(형장), 諱(휘) 永圭(영규) 等(등)이 儒林諸彦(유림제언)과 合心(합심)하여 悟禮祠(오례사)를 奉建(봉건)하고 白村先生(백촌 선생)을 비롯한 四位(사위)를 奉安(봉안)하였다. 國權(국권)이 喪失(상실)된 暗鬱(암울)한 倭政(왜정) 때는 郭俛宇(곽면우), 安白山(안백산), 崔汶坡(최문파) 先生(선생) 등의 愛國志士(애국지사)들이 이 祠(사)에 모여 光復運動(광복운동)을 計劃(계획)하였으니 白村先生(백촌 선생)의 忠脈(충맥)이 綿綿(면면)히 이어짐이라 하겠다. 祠宇(사우)가 百餘年(백여 년)의 風磨雨洗(풍마우세)에 기와가 깨지고 기둥이 傷(상)하여, 一九九二年(1992년) 悟禮(오례) 後孫(후손) 僉宗(첨종)이 誠金(성금)을 모아 重修(중수)하며 書院(서원)으로 擴充(확충)하였다. 同年(동년) 十二月(12월)
二十一日(21일) 慶尙南道(경상남도) 指定文化財(지정문화재) 第 一九一號(제191호)로 指定(지정)되고, 政府(정부)에서 二億(2억) 원의 支援金(지원금)을 내어 補修(보수)하니, 先生(선생)의 後孫(후손) 鎭奭(진석) 甫(보)를 비롯한 後孫(후손)들의 孝誠(효성)의 名品(명품)이다. 이에 書院重修紀念兼院庭碑(서원중수기념 겸 원정비)를 세우고 銘(명)을 지어 올리나니
銘曰(명왈)
月伊山(월이산) 精氣(정기) 받아 出將入相(출장입상) 하시었고
性品(성품)은 通達(통달)하고 惡(악)을 미워하시었네.
구 위에 孝行(효행) 또한 오늘까지 口傳(구전)이오.
六臣(육신) 中(중) 領導者(영도자)로軍動員(군동원)을 맡으신後(후)
逆賊(역적)은 나리거늘 나리 鞫問(국문) 拒否(거부)하오
더 없는 閉口不服(폐구불복) 尤烈(우열)이란 世評(세평)이오.
野史(야사)에 묻힌 忠烈(충열) 實錄(실록)으로 바로 잡아
五百 年(오백 년) 긴긴 恨(한)을 너무 늦게 푸셨어라.
億萬年(억만년) 앞날에서 太陽(태양) 같이 빛나시리.
梅堪樂(매감악) 높게 솟아 白村(백촌) 尊靈(존령) 臨(임)하시니
賢子孫(현자손) 이어 나서 함께 享祀(향사) 누리시네.
이 院(원)에 忠孝巨星(충효거성) 銀河(은하)인양 가득 차리.
檀紀(단기) 四千三百三十年(4330년) 三月(3월) 三十日(13일)
大韓民國(대한민국)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
文學博士(문학박사) 慶州后人(경주후인) 李炫熙(이현희) 謹撰(근찬)
江陵后人(강릉후인) 金振海(김진해) 謹書(근서)
悟禮后孫(오례후손) 門孫 一同(문손 일동) 謹竪(근수)
銘曰(명왈)
月伊山(월이산) 精氣(정기) 받아 出將入相(출장입상) 하시었고
性品(성품)은 通達(통달)하고 惡(악)을 미워하시었네.
구 위에 孝行(효행) 또한 오늘까지 口傳(구전)이오.
六臣(육신) 中(중) 領導者(영도자)로軍動員(군동원)을 맡으신後(후)
逆賊(역적)은 나리거늘 나리 鞫問(국문) 拒否(거부)하오
더 없는 閉口不服(폐구불복) 尤烈(우열)이란 世評(세평)이오.
野史(야사)에 묻힌 忠烈(충열) 實錄(실록)으로 바로 잡아
五百 年(오백 년) 긴긴 恨(한)을 너무 늦게 푸셨어라.
億萬年(억만년) 앞날에서 太陽(태양) 같이 빛나시리.
梅堪樂(매감악) 높게 솟아 白村(백촌) 尊靈(존령) 臨(임)하시니
賢子孫(현자손) 이어 나서 함께 享祀(향사) 누리시네.
이 院(원)에 忠孝巨星(충효거성) 銀河(은하)인양 가득 차리.
檀紀(단기) 四千三百三十年(4330년) 三月(3월) 三十日(13일)
大韓民國(대한민국) 國史編纂委員會(국사편찬위원회)
文學博士(문학박사) 慶州后人(경주후인) 李炫熙(이현희) 謹撰(근찬)
江陵后人(강릉후인) 金振海(김진해) 謹書(근서)
悟禮后孫(오례후손) 門孫 一同(문손 일동) 謹竪(근수)
忠義門(충의문)
悟禮書院(오례서원)
悟禮書院 奉建記(오례서원 봉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