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오노농림계원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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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867
탐방로그
15노농림계원유적비를 찾기 위해 거창 북상면에 왔다. 해당 비석은 월성서당터를 의미하는 비석으로 소개되어 있다. 월성서당은 거창의 월성의병이 결성되어 의병봉기를 결의한 곳이다. 옛 건물은 멸실되어 남아있지 않고 후대에 세운 정자와 기념비만이 남아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제7경 월성숲
월성계곡 장군바위 모퉁이를 돌아 월성 들머리에 성천이 빛어낸 아름다운 명소이다. 1997년 산림청에서 산촌개발사업으로 본디 자리한 노송주변 하천을 정비하고 팔각정을 세웠으며 주변에 많은 나무를 심고 조경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경내에는 구한말 을사보호조약 체결에 항거하여 남강 오일선, 김성진, 김현수, 하거명, 박화기 등 40여명이 월성서당에 모여 일으킨 월성의병들의 장거를 기려 세운 의거비가 있다. 월성이란 달이 동쪽 장군바위 위에서 떠올라 마을앞 성삼봉을 비친다 하여 월성으로 쓰기도 하였으나 월성마을의 월봉산의 옛 이름인 월성산에서 얻어진 이름이다.
이것이 월성서당터를 의미하는 비석으로 소개되어있다.
十五老農林禊員遺蹟(15노농림계원유적비)
月星十五老農林禊員遺蹟序(월성15노농림계원유적비서)'
德裕山南(덕유산남)에 馳数十里(치수십리)하니 奇峯(기봉)이 崔屹(최흘)하고 別澗(별간)이 榮廻(영회)하야 重重濚濚而下有天府(중중영영아하유천부) 一局(일국)하니 天地明郞(천지명랑)하고 日月(일월)이 遍照(편조)로다. 前江大野(전강대야)요 後坪萬頃(후평만경)이라. 中間(중간)에 有村(유촌)하니 名曰月星(명왈 월성)이라. 設入数百年(설입수백년)에 居人姓姓(거인성성)이 某某安所澗屋(모모안소간옥)하야 子子孫孫(자자손손)이 藩延盛多(버연성다)하고 累代連綿而継継承承(누대연면이계계승승)하야 不知其数(부지기수)하니 邦無朱陳之誼乎(방무주진지의호)아 所謂桃源隱溣而相依相資(소위도원은론이상의상재)하야 前野後田(전야후전)에 交耕(교경)이 有時(유시)하고 相休相談(상휴상담)하며 如兄弟之誼(여형제지의)하고 如親戚之和)(여친척지화)하니 無異一春(무리일춘)이라.
惟我十五人(유아15인)은 生於斯長於斯(생어사장어사)하고 遊於斯老於斯(유어사노어사)하야 種田得栗(종전득율)하고 採山得薪(채산득신)하며 掘井而飮(굴정이음)하고 架屋而息(가옥이식)하니 不知勢月(부지세월)에 連薔接屋(연장접옥)하야 携手相休(휴수상휴)하니 交情一心(교정일심)에 一生之樂(일생지락)이 渾無此外而歲不我延(혼무차외이세불아연)이로다. 於焉致路(어언치노)하니 前情(전정)이 可憐(가련)이하. 於是(이시)에 首老長友曰(수노장우왈) 吾之十五老先世重恩(오지십오노선세중은)과 今世大緣(금세대연)을 不可虛度(불가허도)라 當結禊而上継吾祖先之事蹟(당결계이상계오조선지사적)하고 下傳吾子孫之遺謨(하전오자손지유모)이 不亦宣乎(불역선호)하 하니 咸曰可(함왈가)하다 하고 禊名曰(계명왈)農林禊(농림계)라 하야 資本立而年年一會(자본립이년년일회)에 相着論談(상착논담)하며 設風流而樂(설풍유이락)이러니 公道無情(공도무정)하야 棄世禊員(기세계원)이 十餘人(십여인)이라. 在世幾人(재세기인)이 年當會日(년당회일)에 回想昔日之樂(회상석일지락)하니 悲懷難禁(비회난금)이라. 自此以後(자차이후)로 遺於子孫(유어자손)하야 垂後世億萬斯年之不○也云甭(수후세억만사년지불○야운용)
서기 1973년 10월 일 건립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867 양지마을숲을 찾았다.
월성의거사적비가 철거된 사진이 언론에 나와있고, 재건립에 대한 논쟁이 많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