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818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殉國先烈 故 朴華箕(순국선열 고 박화기)
위는 우리나라 自主獨立(자주독립)과 國家發展(국가발전_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建國勳章(건국훈장) 愛國章(애국장)을 추서받음으로서 他(타)의 模範(모범)이 되므로 이 글을 올립니다.
2008년 4월 일 손자 동기
위는 우리나라 自主獨立(자주독립)과 國家發展(국가발전_에 이바지한 바 크므로 대한민국 헌법의 규정에 의하여 建國勳章(건국훈장) 愛國章(애국장)을 추서받음으로서 他(타)의 模範(모범)이 되므로 이 글을 올립니다.
2008년 4월 일 손자 동기
자 상찬, 손 동기, 증손 철호
독립유공자 박화기의 묘 (1871 ~ 1909.10.04)
경상남도 안의 사람이다.
오일선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박화기는 1905년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안의군 북상면(현 거창군 북상면 월상리)에서 거의한 오일선 의진에 동생 박수기, 박민기 등과 함께 참여하여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진의 아장에 임명되어 동생 박수기, 유춘일 등과 함께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연락을 취하여 각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을 통해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 의진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각지에서 모인 덕유산 의변 200여 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 등을 치르면서 항일 의병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동생 박수기와 함께 무주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경상남도 안의 사람이다.
오일선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박화기는 1905년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안의군 북상면(현 거창군 북상면 월상리)에서 거의한 오일선 의진에 동생 박수기, 박민기 등과 함께 참여하여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진의 아장에 임명되어 동생 박수기, 유춘일 등과 함께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연락을 취하여 각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을 통해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 의진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각지에서 모인 덕유산 의변 200여 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 등을 치르면서 항일 의병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동생 박수기와 함께 무주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독립유공자 박화기의 묘 (1871 ~ 1909.10.04)
경상남도 안의 사람이다.
오일선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박화기는 1905년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안의군 북상면(현 거창군 북상면 월상리)에서 거의한 오일선 의진에 동생 박수기, 박민기 등과 함께 참여하여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진의 아장에 임명되어 동생 박수기, 유춘일 등과 함께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연락을 취하여 각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을 통해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 의진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각지에서 모인 덕유산 의변 200여 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 등을 치르면서 항일 의병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동생 박수기와 함께 무주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경상남도 안의 사람이다.
오일선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박화기는 1905년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안의군 북상면(현 거창군 북상면 월상리)에서 거의한 오일선 의진에 동생 박수기, 박민기 등과 함께 참여하여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진의 아장에 임명되어 동생 박수기, 유춘일 등과 함께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연락을 취하여 각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을 통해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 의진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각지에서 모인 덕유산 의변 200여 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 등을 치르면서 항일 의병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동생 박수기와 함께 무주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독립유공자 박화기의 묘 (1871 ~ 1909.10.04)
경상남도 안의 사람이다.
오일선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박화기는 1905년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안의군 북상면(현 거창군 북상면 월상리)에서 거의한 오일선 의진에 동생 박수기, 박민기 등과 함께 참여하여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진의 아장에 임명되어 동생 박수기, 유춘일 등과 함께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연락을 취하여 각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을 통해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 의진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각지에서 모인 덕유산 의변 200여 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 등을 치르면서 항일 의병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동생 박수기와 함께 무주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경상남도 안의 사람이다.
오일선 의진에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박화기는 1905년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의병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905년 안의군 북상면(현 거창군 북상면 월상리)에서 거의한 오일선 의진에 동생 박수기, 박민기 등과 함께 참여하여 항일 의병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의진의 아장에 임명되어 동생 박수기, 유춘일 등과 함께 산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연락을 취하여 각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을 통해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 의진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각지에서 모인 덕유산 의변 200여 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금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 등을 치르면서 항일 의병 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밀정 최고미의 밀고로 동생 박수기와 함께 무주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1818에 계시는 3형제 중 제일 맏이이신 애국지사 박화기의 묘소를 찾으러 왔다.
저 앞에 공적안내판으로 보이는 안내판이 보인다.
殉國先烈 密陽朴公 諱 華箕 之墓(순국선열 밀양박공 휘 화기 지묘)
殉國先烈 密陽朴公 諱 華箕 之墓(순국선열 밀양박공 휘 화기 지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