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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2
- 탐방로그
-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2 철원제일감리교회 안에 신사참배거부자이자 순교자인 강종근 목사 부조가 건립되었다고 해서 찾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철원제일교회 복원기념예배당
강종근 목사(1901년~1942년)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첫 순교자 강종근 목사(1901~1942)
1901년 9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강영동과 박영옥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출생. 배재학당에서 민족운동과 기독교 신앙을 배움
1925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 윤희성과 결혼하여 슬하에 서웅, 서라, 서경, 서옥 1남 3녀 두시다.
1933년 4월 중부연회 허입 후 경성지방 창동구역 창동감리교회에서 목사 시작
1937년 철원지방 연천구역 연천감리교회 담임
1938년 창도감리교회 담임
1939년 목사안수 받은 후 철원제일감리교회 담임,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애국과 신사참배를 항거하는 설교를 그치지 않음.
1940년 9월 30일 조선총돕구 '사상범 예비 검속령'에 의거하여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 193명과 함께 검거된 후 서대문 형무소 수감되심.
1942년 6월 3일 심한 고문을 끝내 이기지 못하시고 아내 윤희성이 보는 앞에서 잠드시다.
"나를 취조한 일본 경찰을 절대로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오"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다 키워주신다고 약속하셨소"
"이 몸에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찬송하신 후 "나는 주님을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 말씀하신 후 42세의 일기로 주님 품에 잠드시다.
2003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006년 11월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
2018년 신사참배 80년 우상숭배를 회개하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제77회 중부연회는 개신교회 최초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첫 순교자 강종근 목사의 신앙을 기리며 이 흉상 부조를 님의 마지막 목회지인 철원제일감리교회에 세우다.
1901년 9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강영동과 박영옥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출생. 배재학당에서 민족운동과 기독교 신앙을 배움
1925년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 윤희성과 결혼하여 슬하에 서웅, 서라, 서경, 서옥 1남 3녀 두시다.
1933년 4월 중부연회 허입 후 경성지방 창동구역 창동감리교회에서 목사 시작
1937년 철원지방 연천구역 연천감리교회 담임
1938년 창도감리교회 담임
1939년 목사안수 받은 후 철원제일감리교회 담임, 일제의 회유와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애국과 신사참배를 항거하는 설교를 그치지 않음.
1940년 9월 30일 조선총돕구 '사상범 예비 검속령'에 의거하여 신사참배 거부 항쟁자 193명과 함께 검거된 후 서대문 형무소 수감되심.
1942년 6월 3일 심한 고문을 끝내 이기지 못하시고 아내 윤희성이 보는 앞에서 잠드시다.
"나를 취조한 일본 경찰을 절대로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오"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께서 다 키워주신다고 약속하셨소"
"이 몸에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찬송하신 후 "나는 주님을 따라간다. 마음이 기쁘다" 말씀하신 후 42세의 일기로 주님 품에 잠드시다.
2003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006년 11월 국립 대전 현충원에 안장
2018년 신사참배 80년 우상숭배를 회개하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제77회 중부연회는 개신교회 최초 신사참배 거부운동의 첫 순교자 강종근 목사의 신앙을 기리며 이 흉상 부조를 님의 마지막 목회지인 철원제일감리교회에 세우다.
순교자 강종근 목사
강종근(姜琮根)은 1901년 9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부친 강영동과 모친 박형옥의 2남으로 태어났다. 철령에 있는 이동교회(裡洞敎會)에서 신앙생활을 시작.
925년 배재학당 졸업, 1929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
1926년 5월 14일 윤희성과 결혼하여 1남 3녀 자녀를 낳았다.
1929년 감리교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신영리교회(현재 세검정교회)에서 목회를 시작.
1937년 연천교회 담임전도사로 목회.
1938년 강원도 철원군 김화 창도교회(현재는 북하) 담임.
1939년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
강종근 목사는 하나님의 복음과 함께 조선 민족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1940년 9월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검거되었고, 철원경찰서에 구금되어 가혹행위를 당한 후에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일제는 설교시간과 청년부 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고양시켜 조선독립을 꾀했다는 죄를 씌워 1941년 10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1941년 형공 제1587호). 그의 판결문을 보면 그는 연천교회 담임 때부터 교회 청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격려하였는데, 특히 창도교회 시무 중 기소된 것이 많았다.
미결 구류기간 중 받은 혹독한 고문으로 쇠약해진 강종근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1942년 6월 3일 새벽 끝내 순교하엿다. 그는 마지막 면회에서 윤희성 사모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을 이야기하였다. "여보, 나는 주님의 곁으로 갑니다. 절대로 나를 취조하고 감옥에 보낸 일본 경찰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그리고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이 다 키워주시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찬송을 불렀다. "이 몸에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1942년 6월 3일 강종근 목사는 신앙을 지키며 죽도록 충성하다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하나님 나라로 갔다. 숨을 거두기 전 "나는 기뻐"라고 한 마디를 하고 숨을 거두었다.
순교자 강종근 목사는 2003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2006년 11월 국립 대전현충원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강종근(姜琮根)은 1901년 9월 20일 평안남도 강서군 증산면에서 부친 강영동과 모친 박형옥의 2남으로 태어났다. 철령에 있는 이동교회(裡洞敎會)에서 신앙생활을 시작.
925년 배재학당 졸업, 1929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
1926년 5월 14일 윤희성과 결혼하여 1남 3녀 자녀를 낳았다.
1929년 감리교협성신학교를 졸업한 후, 신영리교회(현재 세검정교회)에서 목회를 시작.
1937년 연천교회 담임전도사로 목회.
1938년 강원도 철원군 김화 창도교회(현재는 북하) 담임.
1939년 목사 안수를 받고 정회원에 허입한 후 철원지방 철원제일교회를 담임.
강종근 목사는 하나님의 복음과 함께 조선 민족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 독립하여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1940년 9월 철원제일교회에서 시무하던 중 신사참배를 거부하자 조선총독부의 "사상범 예비검속령"에 의해 검거되었고, 철원경찰서에 구금되어 가혹행위를 당한 후에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었다.
일제는 설교시간과 청년부 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고양시켜 조선독립을 꾀했다는 죄를 씌워 1941년 10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하였다 (1941년 형공 제1587호). 그의 판결문을 보면 그는 연천교회 담임 때부터 교회 청년들에게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할 것을 격려하였는데, 특히 창도교회 시무 중 기소된 것이 많았다.
미결 구류기간 중 받은 혹독한 고문으로 쇠약해진 강종근 목사는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으나 1942년 6월 3일 새벽 끝내 순교하엿다. 그는 마지막 면회에서 윤희성 사모에게 원수를 사랑할 것을 이야기하였다. "여보, 나는 주님의 곁으로 갑니다. 절대로 나를 취조하고 감옥에 보낸 일본 경찰을 미워하지 말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세요. 그리고 우리 자녀들은 하나님이 다 키워주시겠다고 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찬송을 불렀다. "이 몸에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
1942년 6월 3일 강종근 목사는 신앙을 지키며 죽도록 충성하다가 세브란스 병원에서 숨을 거두고 하나님 나라로 갔다. 숨을 거두기 전 "나는 기뻐"라고 한 마디를 하고 숨을 거두었다.
순교자 강종근 목사는 2003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고, 2006년 11월 국립 대전현충원에 유해가 안장되었다.
철원제일교회와 독립운동
철원제일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철원군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철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3월 10.11.18일에 일어난 철원읍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10일 철원제일교회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4년 철원제일교회 예배당 건축에 공헌했던 김철회는 일찍이 자신이 설립한 배양학교(나중에 교회시설인 정의학교 개칭)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며 민족정신 함양에 힘썼다. 철원제일교회에서 운영하던 정의학교와 영동야간학교는 1919년 3.1운동 때 시위운동의 저력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교회의 학생, 교사, 성도, 전도사들이 시국에 대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하여 철원읍 만세운동을 추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 철원성결교회 곽진근 여전도사는 정의학교 여교사 김경순 등과 함께 철원읍내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계획하고 시가지 진출 때 군중을 이끌었다. 곽진근은 3월 11일에도 700여명의 군중 선두에 서서 철원역 부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곽진근은 1995년 대통령 표창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철원에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했던 철원애국단이 있었다. 철원애국단은 김화 출신 김상덕을 주축으로 하였는데 그는 3.1운동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경성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제에 잡혀 옥고를 치르고 1919년 8월 6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8월 9일 김상덕이 박연서 목사와 함께 결의한 후 강대여, 김철회, 김완호, 이용우, 이봉하 등과 함께 철원애구간을 조직하였다.
이후 이들은 대한독립애국단 강원도단의 조직을 확장하기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군단을 조직하거나 조직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 1월 김상덕, 박연서, 강대여, 김철회 등이 일본경찰에 차례로 체포되었고, 철원애국단 사건 관련자들은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강종근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성서 출애굽기를 통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철원제일교회는 일제 강점기에 철원군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3.1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이 철원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3월 10.11.18일에 일어난 철원읍 만세운동이다. 1919년 3월 10일 철원제일교회 박연서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 청년들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14년 철원제일교회 예배당 건축에 공헌했던 김철회는 일찍이 자신이 설립한 배양학교(나중에 교회시설인 정의학교 개칭)을 통해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며 민족정신 함양에 힘썼다. 철원제일교회에서 운영하던 정의학교와 영동야간학교는 1919년 3.1운동 때 시위운동의 저력을 형성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으며, 교회의 학생, 교사, 성도, 전도사들이 시국에 대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하여 철원읍 만세운동을 추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때 철원성결교회 곽진근 여전도사는 정의학교 여교사 김경순 등과 함께 철원읍내 독립만세운동을 사전에 계획하고 시가지 진출 때 군중을 이끌었다. 곽진근은 3월 11일에도 700여명의 군중 선두에 서서 철원역 부근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곽진근은 1995년 대통령 표창으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었다.
철원에는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결되어 임시정부 지원 활동을 전개했던 철원애국단이 있었다. 철원애국단은 김화 출신 김상덕을 주축으로 하였는데 그는 3.1운동 당시 연희전문학교 학생으로 경성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일제에 잡혀 옥고를 치르고 1919년 8월 6일 보석으로 풀려났다. 8월 9일 김상덕이 박연서 목사와 함께 결의한 후 강대여, 김철회, 김완호, 이용우, 이봉하 등과 함께 철원애구간을 조직하였다.
이후 이들은 대한독립애국단 강원도단의 조직을 확장하기 위하여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강원도 곳곳을 다니며 군단을 조직하거나 조직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 1월 김상덕, 박연서, 강대여, 김철회 등이 일본경찰에 차례로 체포되었고, 철원애국단 사건 관련자들은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 후 강종근 목사는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성서 출애굽기를 통해서 독립의식을 고취하였다.
6.25에 파괴된 구 철원제일교회
구 철원제일교회
-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0-2번지 / 등록문화재 제3호
철원제일감리교회는 웰번(Artker G. Welbon)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영서북부 지역의 선교와 교육, 사회봉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는 세계적인 건축가 월리엄 보리스(W.M. Voris)의 설계로 건평 198평, 1층은 교육관 10개의 분반공부방과 2층은 예배실로 1937년 9월 30일에 완공되었으며 당시의 성도의 수는 600명이 넘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을 비롯한 애국정신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순교하신 강종근 목사와 함께 순교의 정신으로 교회를 지켰다. 민족 분단과 함께 공산 치하에서는 박해를 견디며 반공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으로 교회가 폐쇄되고, 인민군 병영으로 사용되던 중 파괴되어 현재의 잔해만 남아있다. 철원제일교회는 2002년 5월 30일 등록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0-2번지 / 등록문화재 제3호
철원제일감리교회는 웰번(Artker G. Welbon)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영서북부 지역의 선교와 교육, 사회봉사의 중심지가 되었다. 철원제일교회는 세계적인 건축가 월리엄 보리스(W.M. Voris)의 설계로 건평 198평, 1층은 교육관 10개의 분반공부방과 2층은 예배실로 1937년 9월 30일에 완공되었으며 당시의 성도의 수는 600명이 넘었다.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운동을 비롯한 애국정신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하며 순교하신 강종근 목사와 함께 순교의 정신으로 교회를 지켰다. 민족 분단과 함께 공산 치하에서는 박해를 견디며 반공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으로 교회가 폐쇄되고, 인민군 병영으로 사용되던 중 파괴되어 현재의 잔해만 남아있다. 철원제일교회는 2002년 5월 30일 등록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구 철원제일교회 - 소재지 :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구 철원제일교회는 철원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회로서 1936년 지하1층, 지상 3층으로 건립되었으며, 신도는 500여명에 달했다. 6.25사변으로 파괸되어 현재는 그 유지만 남아 있지만 8.15해방 전까지는 선교활동과 육영사업을 계속했고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반공투쟁이 활발했다. 6.25사변 당시는 북한군이 막사로 쓰면서 교회 지하실을 양민과 반공투사들을 고문, 학살하는 만행장소로 사용되어졌다. 이 교회는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구 철원제일교회는 철원지역의 대표적인 기독교회로서 1936년 지하1층, 지상 3층으로 건립되었으며, 신도는 500여명에 달했다. 6.25사변으로 파괸되어 현재는 그 유지만 남아 있지만 8.15해방 전까지는 선교활동과 육영사업을 계속했고 해방 후 공산치하에서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한 기독교 청년학생들의 반공투쟁이 활발했다. 6.25사변 당시는 북한군이 막사로 쓰면서 교회 지하실을 양민과 반공투사들을 고문, 학살하는 만행장소로 사용되어졌다. 이 교회는 2002년 5월 31일 등록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102 철원제일감리교회 내 신사참배거부자 순교자 강종근 목사 부조를 찾았다.
강종근 목사의 흉사 부조는 원주시 행구동 동부연회 본부에도 제막되어 있다.
강종근 목사의 흉사 부조는 원주시 행구동 동부연회 본부에도 제막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