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고, 주남수 가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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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거창읍 대동리 산54-6
탐방로그
거창군 거창읍 대동리 산54-6에 위치한 주남고, 주남수 선생 가족묘소를 찾았다. 해당 위치에는 주남재, 주남선(주남고), 주남수 3형제의 부모님 묘소가 있었으며, 주남선(주남고) 선생과 주남수 선생 그리고 선생의 자제분들의 묘소도 함께 위치해 있었다.
주남선(주남고) 선생의 묘는 1995년 대전현충원으로 이장되었다. 방문시 이를 참고한다면 좋을 것 같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목사 주남선 약력
1888년 9월 14일 거창읍동동에서 주희현씨 차자로 출생
1905년 17세까지 한문 수학
1905년 호주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 신자됨
1911년 진주 잠업실습소 수료
1914년 의령 남병한씨 차녀 남술람과 결혼
1919년 2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거창교회 장로 장립
1919년 2월 경남성경학원학원 졸업
1919년 3월 기미년 독립운동에 가담 거창경찰서에 피검 의성경찰서 대구형무소 전주형무소 전전 3년간 옥고
1922년 3월 평양신학교 입학
1930년 2월 평양신학교 졸업
1930년 6월 거창교회 위임목사 장립
1939년 12월 일본제국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거창경찰서에 피검
1940년 7월 진주경찰서로 이송 구금
1941년 3월 부산 도경찰부로 이송 구금
1941년 7월 평양경찰서로 이송 구금 후 평양형무소에 수감 7년간 옥고
1945년 8월 일본 제국에서 조국 해방과 함께 출옥
1945년 12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남로회 로회장 피임
1946년 6월 고려신학교 설립 초대이사장 취임
1948년 11월 고려고등성경학교 설립
1950년 8월 한국동란중 북한군에 피검 후 석방
1951년 3월 23일 하오 6시 거창교회 목사위임 후 22년간 시무끝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음 (향년 64세)
1951년 3월 29일 이 자리에 장례
1888년 9월 14일 거창읍동동에서 주희현씨 차자로 출생
1905년 17세까지 한문 수학
1905년 호주 선교사의 전도로 기독교 신자됨
1911년 진주 잠업실습소 수료
1914년 의령 남병한씨 차녀 남술람과 결혼
1919년 2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거창교회 장로 장립
1919년 2월 경남성경학원학원 졸업
1919년 3월 기미년 독립운동에 가담 거창경찰서에 피검 의성경찰서 대구형무소 전주형무소 전전 3년간 옥고
1922년 3월 평양신학교 입학
1930년 2월 평양신학교 졸업
1930년 6월 거창교회 위임목사 장립
1939년 12월 일본제국 신사참배 반대운동으로
거창경찰서에 피검
1940년 7월 진주경찰서로 이송 구금
1941년 3월 부산 도경찰부로 이송 구금
1941년 7월 평양경찰서로 이송 구금 후 평양형무소에 수감 7년간 옥고
1945년 8월 일본 제국에서 조국 해방과 함께 출옥
1945년 12월 대한예수교 장로회 경남로회 로회장 피임
1946년 6월 고려신학교 설립 초대이사장 취임
1948년 11월 고려고등성경학교 설립
1950년 8월 한국동란중 북한군에 피검 후 석방
1951년 3월 23일 하오 6시 거창교회 목사위임 후 22년간 시무끝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음 (향년 64세)
1951년 3월 29일 이 자리에 장례
자 경중, 손 정열
자 경도, 손 정홍 정치
자 경효, 손 정민 정우
자 경세, 손 정원
여 경순 경은
1977년 상훈 제000283호
건국공로훈장(애국장)을 추서 수상하시므로 국립 대전 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 제393호에 배위 남슬람 여사와 함께 이장 안장함
1995.4.12 대한민국 국가 보훈처장
獨立鬪士 朱南守 之墓(독립투사 주남수 지묘)
獨立鬪士 朱南守 之墓(독립투사 주남수 지묘)
공의 성은 주요 휘는 남수며 신안인이니 주문공 선생 32세손 휘 희현과 최두경과의 사이에 1900년 2월 3일 출생하셨다.
1919년 3월 20일 거창 3.1거사에 백씨 주남재 중씨 주남고 목사와 더부러 독립운동의 선동활동에 나서다.
1919년 8월 의용병으로서 국권 회복 운동 자금 조달 차 만주군정서에 파견되어 활동하였스며 1920년 3월 말경 일단 귀향 사상계몽 선전 및 동지 규합의 목적으로 신한별보라 칭하는 문서를 등사하여 동지들에게 배포하였다. 이와 같이 자금사건의 연루를 비롯하여 출판법 위반 등 사실로 일경에 체포되어 거창경찰서에서 10개월 구금되었고 1921년 1월 8일 의성경찰서로 전전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자행한 끝에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시고 출감 후 전일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심한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의용군으로서 만주 혹은 국내에 잠입 독립운동을 계속하시다. 1930년 약관 30세에 요절하시다.
1982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19년 8월 의용병으로서 국권 회복 운동 자금 조달 차 만주군정서에 파견되어 활동하였스며 1920년 3월 말경 일단 귀향 사상계몽 선전 및 동지 규합의 목적으로 신한별보라 칭하는 문서를 등사하여 동지들에게 배포하였다. 이와 같이 자금사건의 연루를 비롯하여 출판법 위반 등 사실로 일경에 체포되어 거창경찰서에서 10개월 구금되었고 1921년 1월 8일 의성경찰서로 전전하면서 혹독한 고문을 자행한 끝에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어 옥고를 치르시고 출감 후 전일의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심한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애국정신으로 의용군으로서 만주 혹은 국내에 잠입 독립운동을 계속하시다. 1930년 약관 30세에 요절하시다.
1982년 8월 15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공은 자에 경희 손자에 정혁 손녀에 관영 증손자에 성국 성윤 성룡 성진 증손녀에 성혜를 두시었다.
서기 1998년 7월 22일 자 경희 근기, 진산 강영희 근서
그 옆 조금 아래에는 주남선, 주남수 선생의 자제분들의 묘소로 보이는 봉분이 있지만, 묘비가 없는곳이 많다.
주남선 선생의 4남 2녀 중 막내 따님이신 주경은 선생의 묘소
막내 따님 외에는 묘비가 없어서 확인 불가능한 것이 아쉽다.
주남재, 주남선, 주남수 3형제의 부모님 묘소.
신안 주의찬 경주 최두경의 묘
자 남선 계택, 손 경중 경도 경효 경세, 여 경순 경은
대한예수교 장로회 목사 주남선 부인 남술람의 묘
대한예수교 장로회 목사 주남선 부인 남술람의 묘
대한예수교 장로회 목사 주남선 부인 남술람의 묘
무덤 속에 있는 자들이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나올 것이오, 그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 마태복음 28장 43절
대한예수교 장로회 목사 주남선 부인 남술람의 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