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성 유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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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 456-3
탐방로그
안내판을 읽어보니 항일운동도 하셨고, 면우 곽종석 선생의 문하생이어서 촬영을 했다.
다만 정재성 선생은 공훈록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비가 와서 옆과 뒤 비문은 판독이 어렵고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서 촬영을 하지 않았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苟齋鄭先生遺蹟碑(구재 정선생유적비)
구재 정재성(苟齋 鄭載星) 약력
苟齋 鄭先生은 1863년(철종 14) 9월 19일 가북면 중촌리 다전에서 태주공의 3남으로 태어나 1941년 4월 1일 돌아가신 조선 말 유학자임. 자는 취오리고 호는 구재와 동리(東里)이며, 일명은 환규 또는 환성을 썼다. 본관은 진양(은열공파)으로 시조 신열공은 고려가 위급했을 때 병부상서에 발탁되어 적을 물리 친 공으로 金紫光祿大夫 晋陽府院君(금자광록대부 진양부원군)애 봉해졌으며, 사위 문익점)가 가져온 목화씨를 시배하여 우리 민족 의복 문화를 크게 발전시킨 충렬공 천악(진주성내 청계서원에 봉향)이 19대 祖이고, 예조좌랑/단양군수/첨지중추부사 등을 지낸 팔송공 필달(용산숲에 유적비 존속)이 9대 祖이며, 증조부는 극기, 조부는 도은으로 妻의 父는 강장해이다.
정선생은 부친께 글을 배워 13세 떄 장원 후 교우 윤위하/한주 이진상/서미헌 장복추/ 면우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면우 선생의 수제자로 우산 이만구에게 칭찬을 받았다. 1900년 시랑 이성렬에 의해 경상부교관 후보로 추천되었으나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을 연구하다 1904년(광무 8) 정릉참봉에 제수되고 곧이어 영희전참봉, 경기전참봉 등을 지냈으나 정국이 어지러움을 알고 그만 두었다. 이후 국채보상운동에 의연금을 모집하여 서울의 의무소로 보내고, 국민회와 일본인 통감에게 서찰을 보내 일제의 강압을 성토하는 등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저서로 거창의 아름다운 풍경을 읊은 '의부아림죽지사 68장'등이 수록된 구재선생 문집 14권이 전해져 내려온다.
苟齋鄭先生遺蹟碑(구재 정선생유적비)
거창군 가조면 일부리 456-3 도로변에서 만난 구재 정재성 선생 유적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