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1340-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창석 연안 이준도가 찬한 것을 손 윤동이 근역하고
대자는 자 안우가 세자 손 윤적이 근서하여
단기 4324 신미년 3월 일 세움
대자는 자 안우가 세자 손 윤적이 근서하여
단기 4324 신미년 3월 일 세움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1340-2 들말마을 앞 건국훈장포상자 문초처사 함종어공 휘 명철 유적비를 찾아왔다.
建國勳章受褒賞者 文樵處士 咸從魚公 諱 命喆 遺蹟碑
(건국훈장수포상자 문초처사 함종어공 휘 명철 유적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43-1-43호 / 소재지 :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1340-2
어명철(魚命喆1865-1923: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선생은 경남 거창(居昌) 가조면(加祚面) 석강리(石岡里)에서 세거하며 평소 남다른 애국심을 갖고 있었는데 을미사변(1895), 을사조약(1905), 경술국치(1910) 등을 겪으면서 집안과 향토에서 항일정신 고취 및 일제 상품 배격(排擊)운동을 전개하였고 기미년 3월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활동하신 분이다.
1919년 3월 19일 오문현(吳文鉉) 선생 등 충분의열인사(忠憤義烈人士) 50여명이 가조면 석강리 정자(亭子)나무 아래에 모여 비밀회의를 열고 오문현(吳文鉉)·어명철(魚命喆)·김호(金浩)·최영순(崔榮淳)·김채환(金采煥)을 5인 대표로 추대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동월 22일 오전 11시 만학정에서 가조·가북면민 수천명이 집결하고 거창읍으로 향진하였는데 공은 선봉에 서서 만세를 고창하며 주도하였다. 일본 헌병이 총기를 난사하여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며 공도 탄환이 갓을 관통하는 위기를 겪었다. 공은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고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진주형무소에서 징역 1년형을 살면서 건강을 잃어 그 여독으로 58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건국훈장수포상자 문초처사 함종어공 휘 명철 유적비)
국가보훈처 현충시설 43-1-43호 / 소재지 : 경남 거창군 가조면 석강리 1340-2
어명철(魚命喆1865-1923: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선생은 경남 거창(居昌) 가조면(加祚面) 석강리(石岡里)에서 세거하며 평소 남다른 애국심을 갖고 있었는데 을미사변(1895), 을사조약(1905), 경술국치(1910) 등을 겪으면서 집안과 향토에서 항일정신 고취 및 일제 상품 배격(排擊)운동을 전개하였고 기미년 3월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활동하신 분이다.
1919년 3월 19일 오문현(吳文鉉) 선생 등 충분의열인사(忠憤義烈人士) 50여명이 가조면 석강리 정자(亭子)나무 아래에 모여 비밀회의를 열고 오문현(吳文鉉)·어명철(魚命喆)·김호(金浩)·최영순(崔榮淳)·김채환(金采煥)을 5인 대표로 추대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동월 22일 오전 11시 만학정에서 가조·가북면민 수천명이 집결하고 거창읍으로 향진하였는데 공은 선봉에 서서 만세를 고창하며 주도하였다. 일본 헌병이 총기를 난사하여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였으며 공도 탄환이 갓을 관통하는 위기를 겪었다. 공은 일본헌병에게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받았고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진주형무소에서 징역 1년형을 살면서 건강을 잃어 그 여독으로 58세를 일기로 서거하셨다.
建國勳章受褒賞者 文樵處士 咸從魚公 諱 命喆 遺蹟碑(건국훈장수포상자 문초처사 함종어공 휘 명철 유적비)
建國勳章受褒賞者 文樵處士 咸從魚公 諱 命喆 遺蹟碑(건국훈장수포상자 문초처사 함종어공 휘 명철 유적비)
함종어씨 세거지지인 이 곳에 문초공의 유적을 기리는 비를 세우니 뜻 있는 일이로다. 공은 함종인으로 휘는 명철이며 자는 순하요 호는 문초이다. 양숙공 휘 세공은 공의 13대조로 훈덕이 현저했고 11대조인 검정공 휘 훈께서 시입조창하시고 7대조 휘 도명은 신임사화때 노론 4대신을 변호하는 상소를 했다가 정거의 명을 당했다. 증조의 휘는 석운이요 조는 생원으로 휘는 용하이며 고의 휘는 재순으로 효우가 돈독하여 향리의 모범이 되셨고 비는 청주 정씨로 문목공 한강 술의 후예로 노영의 녀다.
공은 홍릉 을축(서기 1865) 12월 27일생으로 기우가 뇌락하셔 대인지풍을 였볼 수 있었다. 경술국치 이래로 비분하시던 중 기미 3.1운동을 기해 몇 동지와 밀의 정약 후에 군중을
공은 홍릉 을축(서기 1865) 12월 27일생으로 기우가 뇌락하셔 대인지풍을 였볼 수 있었다. 경술국치 이래로 비분하시던 중 기미 3.1운동을 기해 몇 동지와 밀의 정약 후에 군중을
이끌고 살피재를 넘어려다가 왜적의 난사를 받아 사상자가 속출했는데 공은 관에 유탄이 관통했지만 의연부동했으며 진주옥에 영어시엔 「내 비록 옥중에서 죽을지라도 집에서 죽는 것만 못하랴」 하시며 언소자약하셨으니 평일에 쌓은 덕을 가히 엿볼 수 있도다. 1년을 지나 석방은 되셨지만 옥고의 여환으로 계해 8월 24일 기세하셨다. 경오년 광복절에 건국훈장이 추서되셨다. 공은 재취하셨으니 연안 이유현의 녀는 서의 중매로 유 1남하니 용우이고 하빈 이씨 현상의 녀는 5남 1녀를 두니 경우는 족제 명익에게 출계하고 수우는 계제 명기에게 출계하고 안우 봉우 길우가 있고 녀는 신창 표정환에게 출가하다. 윤석 윤현 윤경 윤식 이당우 처는 용우 소생이고 윤창 윤철 윤문 김병혁 처, 김영구 처 이규원 처 조미두 처는 경우 소생이고 윤용 윤성 윤식 윤갑 윤적 임기원 처는 수우 소생이고 윤종 윤조 윤동 윤수 김종태 처 배의웅 처는 안우 소생이고 윤학 윤관 윤포 정화석 처는 봉우 소생이며 윤원 윤영 윤태 김영순 처 민관식 처 이정렬 처는 길우 소생이며 표재영 재민 김병원 처는 표서 소생이다. 내외 증 현손은 백수십명이라 다 기재할 수 없도다. 공의 윤자인 용우가 행장을 보이며 「부군의 평일 언행대절을 구씨만큼 알 분이 없다」고 청탁하기에 사양할 수 없어 감히 짓는 바로다. 공의 묘소는 합천 상현리 산 26-2번지 해좌원에 있다.
나라 위해 수적을 토멸함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누가 공처럼 사심없이 총칼 앞에 창기하랴. 공의 의열은 몇 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
나라 위해 수적을 토멸함이 누구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나 누가 공처럼 사심없이 총칼 앞에 창기하랴. 공의 의열은 몇 천마디 말로 표현할 수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