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해평리 산209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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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사옥 가묘는 경남 거창에 있으며, 전사옥(全駟玉)의 이명은 한자가 다른 전사옥(全泗玉), 전사억(全思億), 전사옥(田思玉)이다.
애국지사 전사옥선생의 가묘 근처에는 갈발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약 170m 떨어져있어 도보로 3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애국지사 양천 전사옥 선생 묘소
거창군 가복면 해평리 산 209
-50m 전방-
거창군 가복면 해평리 산 209
-50m 전방-
애국지사 양천 전사옥 선생 묘소
거창군 가복면 해평리 산 209
-50m 전방-
거창군 가복면 해평리 산 209
-50m 전방-
독립유공 애국지사 양천 전사옥 선생의 묘(1915.5.26~미상)
전사옥(全駟玉) 선생은 1915년 5월 26일 거창군 가북면 해평리 원전에서 태어났다. 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사회사상연구회, 독서회 죅, 시험백지동맹 사건으로 2회의 근신과 2회의 정학을 당하였다. 1933년 11월 진주고등보통학교 총 학생 항일투쟁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항쟁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징역1년 형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1938년 3월 일본 중앙대학교 전문부 법학과와 1941년 3월 중앙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41년 4월부터 서울에서 청년그룹을 조직하여 학생, 청년, 노동자 등에게 반제사상 지도및 항일지하운동을 이끌었다. 1943년 8월 여운형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및 1944년 8월 건국동맹 결성에 청년조직을 담당하여 공출과 징용, 학병을 기피하게하고 무장봉기를 위한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1944년 8월 고이소구니아키 조선총독으로부터 광복운동 포기를 회유받았다. 1945년 2월 학생및 청년조직 운동과 중국, 러시아의 독립단체와 연계하여 항일할동 중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전국동맹산하 농민동맹(양주 소재)에서 바보로 위장하여 은거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후 전국 청년단체총동맹 의장및 서울시연맹 집행위원장, 반전반파쇼 옹호투쟁부위원장, 순국선열 추모대회추진위원, 청년대표 100명과 김구 주석을 방문하여 청년대표로 환영사를 하는 등 청년지도자로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척결및 진보적 민주주의 건설에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 8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전사옥(全駟玉) 선생은 1915년 5월 26일 거창군 가북면 해평리 원전에서 태어났다. 진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사회사상연구회, 독서회 죅, 시험백지동맹 사건으로 2회의 근신과 2회의 정학을 당하였다. 1933년 11월 진주고등보통학교 총 학생 항일투쟁 비밀결사대를 조직하여 항쟁하다가 일경에 검거되어 징역1년 형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았다. 1938년 3월 일본 중앙대학교 전문부 법학과와 1941년 3월 중앙대학교 경제학부를 졸업하였다. 1941년 4월부터 서울에서 청년그룹을 조직하여 학생, 청년, 노동자 등에게 반제사상 지도및 항일지하운동을 이끌었다. 1943년 8월 여운형등과 조선민족해방연맹및 1944년 8월 건국동맹 결성에 청년조직을 담당하여 공출과 징용, 학병을 기피하게하고 무장봉기를 위한 사전준비를 진행하였다. 1944년 8월 고이소구니아키 조선총독으로부터 광복운동 포기를 회유받았다. 1945년 2월 학생및 청년조직 운동과 중국, 러시아의 독립단체와 연계하여 항일할동 중 일경에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전국동맹산하 농민동맹(양주 소재)에서 바보로 위장하여 은거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해방후 전국 청년단체총동맹 의장및 서울시연맹 집행위원장, 반전반파쇼 옹호투쟁부위원장, 순국선열 추모대회추진위원, 청년대표 100명과 김구 주석을 방문하여 청년대표로 환영사를 하는 등 청년지도자로서 친일파, 민족반역자 척결및 진보적 민주주의 건설에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19년 8월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光復運動家 陽泉 全公 諱 駟玉 之壇(광복운동가 양천 전공 휘 사옥 지단)
광복운동가 양천 전공 제단비 병서
나라가 주권을 상실하여 백성이 이민족의 잔인한 발굽 아래서 신음하는 암울한 시기를 당하여 신명을 바쳐 국권탈환을 위해서 형극의 길을 사양하지 않았던 지사가 있었으니 여기 영단에 모신 양천 전공이다. 선생의 휘는 사옥이요, 자는 자방이며 양천은 아호이다. 관향은 죽산으로 백제 개국공신 환성군 휘 섭이 시조요. 고려 추밀원 부사 죽산군 휘 한이 득관조이다. 려조가 망할때 판도판서 휘 충수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거창 박유산하에 은둔한 이후로 거창에 세거하게 되었다. 휘 욱 휘 치문 월포 휘 동철이 왕고 이상 3대이다. 황고 회산 휘 병식은 학덕이 있었고 유고가 간행되었다. 비위는 선산 김씨로 군수 병길의 따님이다. 공은 1915년 을묘 5월 26일에 가북 월전촌에서 태어났다. 자유로 재기영명하고 기우 준걸하였고 스스로 학업에 잠심하였다. 진주고보를 거쳐 일본 중앙대학교 전문부 법학과와 경제학부를 졸업하여 신학문을 탐구하였다. 당시는 왜인들이 학정을 자행하던 때라 조선의 인재
나라가 주권을 상실하여 백성이 이민족의 잔인한 발굽 아래서 신음하는 암울한 시기를 당하여 신명을 바쳐 국권탈환을 위해서 형극의 길을 사양하지 않았던 지사가 있었으니 여기 영단에 모신 양천 전공이다. 선생의 휘는 사옥이요, 자는 자방이며 양천은 아호이다. 관향은 죽산으로 백제 개국공신 환성군 휘 섭이 시조요. 고려 추밀원 부사 죽산군 휘 한이 득관조이다. 려조가 망할때 판도판서 휘 충수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거창 박유산하에 은둔한 이후로 거창에 세거하게 되었다. 휘 욱 휘 치문 월포 휘 동철이 왕고 이상 3대이다. 황고 회산 휘 병식은 학덕이 있었고 유고가 간행되었다. 비위는 선산 김씨로 군수 병길의 따님이다. 공은 1915년 을묘 5월 26일에 가북 월전촌에서 태어났다. 자유로 재기영명하고 기우 준걸하였고 스스로 학업에 잠심하였다. 진주고보를 거쳐 일본 중앙대학교 전문부 법학과와 경제학부를 졸업하여 신학문을 탐구하였다. 당시는 왜인들이 학정을 자행하던 때라 조선의 인재
광복운동가 양천 전공 제단비 병서
나라가 주권을 상실하여 백성이 이민족의 잔인한 발굽 아래서 신음하는 암울한 시기를 당하여 신명을 바쳐 국권탈환을 위해서 형극의 길을 사양하지 않았던 지사가 있었으니 여기 영단에 모신 양천 전공이다. 선생의 휘는 사옥이요, 자는 자방이며 양천은 아호이다. 관향은 죽산으로 백제 개국공신 환성군 휘 섭이 시조요. 고려 추밀원 부사 죽산군 휘 한이 득관조이다. 려조가 망할때 판도판서 휘 충수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거창 박유산하에 은둔한 이후로 거창에 세거하게 되었다. 휘 욱 휘 치문 월포 휘 동철이 왕고 이상 3대이다. 황고 회산 휘 병식은 학덕이 있었고 유고가 간행되었다. 비위는 선산 김씨로 군수 병길의 따님이다. 공은 1915년 을묘 5월 26일에 가북 월전촌에서 태어났다. 자유로 재기영명하고 기우 준걸하였고 스스로 학업에 잠심하였다. 진주고보를 거쳐 일본 중앙대학교 전문부 법학과와 경제학부를 졸업하여 신학문을 탐구하였다. 당시는 왜인들이 학정을 자행하던 때라 조선의 인재
나라가 주권을 상실하여 백성이 이민족의 잔인한 발굽 아래서 신음하는 암울한 시기를 당하여 신명을 바쳐 국권탈환을 위해서 형극의 길을 사양하지 않았던 지사가 있었으니 여기 영단에 모신 양천 전공이다. 선생의 휘는 사옥이요, 자는 자방이며 양천은 아호이다. 관향은 죽산으로 백제 개국공신 환성군 휘 섭이 시조요. 고려 추밀원 부사 죽산군 휘 한이 득관조이다. 려조가 망할때 판도판서 휘 충수가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켜 거창 박유산하에 은둔한 이후로 거창에 세거하게 되었다. 휘 욱 휘 치문 월포 휘 동철이 왕고 이상 3대이다. 황고 회산 휘 병식은 학덕이 있었고 유고가 간행되었다. 비위는 선산 김씨로 군수 병길의 따님이다. 공은 1915년 을묘 5월 26일에 가북 월전촌에서 태어났다. 자유로 재기영명하고 기우 준걸하였고 스스로 학업에 잠심하였다. 진주고보를 거쳐 일본 중앙대학교 전문부 법학과와 경제학부를 졸업하여 신학문을 탐구하였다. 당시는 왜인들이 학정을 자행하던 때라 조선의 인재
들은 그 뜻을 펼 자리가 없었다. 공은 성품이 관후하면서도 내면은 강직하여 오직 정의만을 지향하였다. 진주고 재학시부터 항일투쟁을 위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항쟁하다가 징역 1년 언도를 받고 복역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흠모하던 몽양 여운형의 지시로 유학생을 결집하여 일본의 패전을 촉진하였다. 몽양은 청양은 청년에 관한 문제는 전사옥이 제일 잘아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으며 공을 희세의 인재로 인정하였다. 1941년 귀국하여 청년을 규합하여 반일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에 몽양과 함께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그 익년 8월 2일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청년 노동자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반일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학병 징병 및 공출 등을 기피토록 권유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총독 소기국소(고이소 구니아키)가 고관직을 미끼로 광복운동 포기를 종용하였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 1945년 2월에 왜경에 체포되었으나 기지로 탈출하여 경기도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위장 은둔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29일 전국 청년단체 총동맹 의장에 선출되고 그 익일 서울시 연맹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어 청년운동을 지휘했다. 백범 김구 주석이 귀국하니 12월 2일 각계 청년대표 80명과 경교장에 찾아가서 공은 청년을 대표하여 환영사를 하였다. 그러나 혼란한 시국 속에서 1948년 8월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니 탄석을 금할 수가 없다. 배위는 선산 김씨며 달근의 따님으로 귀덕이 있었다. 공과 동경인데 1995년 을해 2월 18일 81세로 작고하였다. 묘소는 월전촌 서재 능축좌지원이다. 아들은 재일이고 딸은 미자로 파평 윤재목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준현이고 손녀는 은희이며 달성 배우순에게 출가하였다. 외손은 성근과 탁이다. 아아! 공은 유복한 환경에서 생장하였고 일본 유학까지 마쳤으니 얼마든지 안락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으나 왜적의 잔인한 폭압에 시달리는 동족을 차마 좌시할 수 없어 풍찬노숙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해 심혈을 경주하였다. 안정된 조국에서 그 경륜을 펼치지도 못하고 혼란 속에서 희생되고 말았으니 공 개인의 불운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손실이라 하겠다. 걸출한 광복운동가이면서도 그 용의한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소윤 재일 장이 안타깝게 여겨 다년간 성력을 기울여 자료를 모아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였으나 아직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공의 영령의 안식지소를 마련코자 하여 덕배의 봉분 곁에 영단을 설치하고 공의 행적을 각재한 비건립을 도모하여 공의 가장과 자료를 지
들은 그 뜻을 펼 자리가 없었다. 공은 성품이 관후하면서도 내면은 강직하여 오직 정의만을 지향하였다. 진주고 재학시부터 항일투쟁을 위한 비밀 결사대를 조직하여 항쟁하다가 징역 1년 언도를 받고 복역하였다. 일본 유학 시절 흠모하던 몽양 여운형의 지시로 유학생을 결집하여 일본의 패전을 촉진하였다. 몽양은 청양은 청년에 관한 문제는 전사옥이 제일 잘아니 그에게 물어보라고 하였으며 공을 희세의 인재로 인정하였다. 1941년 귀국하여 청년을 규합하여 반일제운동을 전개하였다. 1943년에 몽양과 함께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그 익년 8월 2일 건국동맹을 결성하여 청년 노동자에게 반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이후 반일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학병 징병 및 공출 등을 기피토록 권유하여 일본의 전쟁 수행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총독 소기국소(고이소 구니아키)가 고관직을 미끼로 광복운동 포기를 종용하였지만 단호히 거절하였다. 1945년 2월에 왜경에 체포되었으나 기지로 탈출하여 경기도 가나안 농군학교에서 위장 은둔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1945년 11월 29일 전국 청년단체 총동맹 의장에 선출되고 그 익일 서울시 연맹 집행위원장에 추대되어 청년운동을 지휘했다. 백범 김구 주석이 귀국하니 12월 2일 각계 청년대표 80명과 경교장에 찾아가서 공은 청년을 대표하여 환영사를 하였다. 그러나 혼란한 시국 속에서 1948년 8월 이후로는 행방이 묘연하니 탄석을 금할 수가 없다. 배위는 선산 김씨며 달근의 따님으로 귀덕이 있었다. 공과 동경인데 1995년 을해 2월 18일 81세로 작고하였다. 묘소는 월전촌 서재 능축좌지원이다. 아들은 재일이고 딸은 미자로 파평 윤재목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준현이고 손녀는 은희이며 달성 배우순에게 출가하였다. 외손은 성근과 탁이다. 아아! 공은 유복한 환경에서 생장하였고 일본 유학까지 마쳤으니 얼마든지 안락한 생활을 향유할 수 있었으나 왜적의 잔인한 폭압에 시달리는 동족을 차마 좌시할 수 없어 풍찬노숙하면서 조국광복을 위해 심혈을 경주하였다. 안정된 조국에서 그 경륜을 펼치지도 못하고 혼란 속에서 희생되고 말았으니 공 개인의 불운이 아니고 우리 민족의 손실이라 하겠다. 걸출한 광복운동가이면서도 그 용의한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을 소윤 재일 장이 안타깝게 여겨 다년간 성력을 기울여 자료를 모아 독립유공자 포상을 신청하였으나 아직 결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아울러 공의 영령의 안식지소를 마련코자 하여 덕배의 봉분 곁에 영단을 설치하고 공의 행적을 각재한 비건립을 도모하여 공의 가장과 자료를 지
참하여 불녕에게 청문하였다. 그 효성에 감동하여 서술 여우(如右)하고 끝에 명을 붙인다.
섬오랑케 굴레 속에 동포들이 신음할제 광복 위해 신명 바친 애국지사 양천 선생 삭풍한설(朔風寒雪) 매서워도 끓는도다. 내 혈관은 광복운동 건국사업 완수 위해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자후를 토하면은 민족정기 살아나니 불세출의 인재라고 몽양께서 칭후(稱詡)했네. 상제께선 어이하여 능력만을 품부(稟賦)하고 연수(年壽)에는 인색(吝嗇)하여 홀연(忽然) 행방 묘연할까 선생 노력 없었다면 조국 다시 일어서랴. 생애 비록 단잠(短暫)해도 민족 속에 영생하리.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중국 화중사범대학 겸직 교수 김해 허권수 근찬 전면 대자 거창 신재범 근서 서기 2007년 4월 근수
섬오랑케 굴레 속에 동포들이 신음할제 광복 위해 신명 바친 애국지사 양천 선생 삭풍한설(朔風寒雪) 매서워도 끓는도다. 내 혈관은 광복운동 건국사업 완수 위해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자후를 토하면은 민족정기 살아나니 불세출의 인재라고 몽양께서 칭후(稱詡)했네. 상제께선 어이하여 능력만을 품부(稟賦)하고 연수(年壽)에는 인색(吝嗇)하여 홀연(忽然) 행방 묘연할까 선생 노력 없었다면 조국 다시 일어서랴. 생애 비록 단잠(短暫)해도 민족 속에 영생하리.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중국 화중사범대학 겸직 교수 김해 허권수 근찬 전면 대자 거창 신재범 근서 서기 2007년 4월 근수
참하여 불녕에게 청문하였다. 그 효성에 감동하여 서술 여우(如右)하고 끝에 명을 붙인다.
섬오랑케 굴레 속에 동포들이 신음할제 광복 위해 신명 바친 애국지사 양천 선생 삭풍한설(朔風寒雪) 매서워도 끓는도다. 내 혈관은 광복운동 건국사업 완수 위해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자후를 토하면은 민족정기 살아나니 불세출의 인재라고 몽양께서 칭후(稱詡)했네. 상제께선 어이하여 능력만을 품부(稟賦)하고 연수(年壽)에는 인색(吝嗇)하여 홀연(忽然) 행방 묘연할까 선생 노력 없었다면 조국 다시 일어서랴. 생애 비록 단잠(短暫)해도 민족 속에 영생하리.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중국 화중사범대학 겸직 교수 김해 허권수 근찬 전면 대자 거창 신재범 근서 서기 2007년 4월 근수
섬오랑케 굴레 속에 동포들이 신음할제 광복 위해 신명 바친 애국지사 양천 선생 삭풍한설(朔風寒雪) 매서워도 끓는도다. 내 혈관은 광복운동 건국사업 완수 위해 국궁진췌(鞠躬盡瘁) 사자후를 토하면은 민족정기 살아나니 불세출의 인재라고 몽양께서 칭후(稱詡)했네. 상제께선 어이하여 능력만을 품부(稟賦)하고 연수(年壽)에는 인색(吝嗇)하여 홀연(忽然) 행방 묘연할까 선생 노력 없었다면 조국 다시 일어서랴. 생애 비록 단잠(短暫)해도 민족 속에 영생하리.
문학박사 경상대학교 교수 중국 화중사범대학 겸직 교수 김해 허권수 근찬 전면 대자 거창 신재범 근서 서기 2007년 4월 근수
한과 그리움 하늘에 사무쳐
한과 그리움 하늘에 사무쳐
[ 앞글 ]
전사옥 선생! 해방 전후 서울 계동 백사십번지 몽양선생 자택과 이런저런 모임에서 몇차례 만나뵈왔지요. 그때로부터 오십여년이 지난 오늘 그날의 홍안흑발 선생보다 두배도 더 늙은 아들 전재일을 우연히 만나 이 글을 엮습니다. 반듯한 구리빛 용모 정기흐르는 눈빛 고요하고 당당한 거동 논리 정연하고 또렸한 말소리 젊은 투사의 그 날의 모습 오늘도 내 눈 앞에 선-합니다.
[ 헌사 ]
타고 난 총명 나라 잃은 설움은 참고 지낼 수 없었다. 진주고보 독서회를 조직 옥에 갇혔어도 조선독립 높은 뜻 일편단심 굽히지 않았다. 멀리 일본땅 동경 배움의 길에서 민족지도자 여운형 선생을 만나 해방과 독립의 큰꿈을 다졌나니 가명과 위장으로 삼천리 지하를 누비며 조국해방의
[ 앞글 ]
전사옥 선생! 해방 전후 서울 계동 백사십번지 몽양선생 자택과 이런저런 모임에서 몇차례 만나뵈왔지요. 그때로부터 오십여년이 지난 오늘 그날의 홍안흑발 선생보다 두배도 더 늙은 아들 전재일을 우연히 만나 이 글을 엮습니다. 반듯한 구리빛 용모 정기흐르는 눈빛 고요하고 당당한 거동 논리 정연하고 또렸한 말소리 젊은 투사의 그 날의 모습 오늘도 내 눈 앞에 선-합니다.
[ 헌사 ]
타고 난 총명 나라 잃은 설움은 참고 지낼 수 없었다. 진주고보 독서회를 조직 옥에 갇혔어도 조선독립 높은 뜻 일편단심 굽히지 않았다. 멀리 일본땅 동경 배움의 길에서 민족지도자 여운형 선생을 만나 해방과 독립의 큰꿈을 다졌나니 가명과 위장으로 삼천리 지하를 누비며 조국해방의
새싹을 키운 절륜의 투지 아! 해방 그날의 감격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서울시연맹 집행 위원장에 올라 건국의 깃발을 높이 쳐들었건만 선악이 뒤바뀐 천하의 악세를 만나 소식이 끊긴 채 분단 비극은 반백년 바람결에 스치운 '어둔 방에 갇혀 피골이 상접 성긋성긋 머리도 빠지고 기력도 가물거리더라'고 아! 치떨리는 악형 소문 열 살 때 마지막 만난 외아들 재일이도 인젠 희끗머리 주름진 늙은이 하늘에 닿는 한과 그리움을 달랠 길 없어 여기 부인 묘 곁에 가묘를 다듬고 비석을 세워 아버님 환생을 비원하나니 전사옥 혁명투사시여! 그 드높은 뜻 청사에 길이 빛나 부디 부릅뜬 눈 걷우시고 맘 푹 놓고 고이 쉬시옵소서.
민족시인 이기형 삼가 짓고 외아들 재일 삼가 쓰다
민족시인 이기형 삼가 짓고 외아들 재일 삼가 쓰다
거창군 가북면 해평리 산 209-4 도로변 애국지사 양천 전사옥 선생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