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종석 다전기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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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중촌리 2230-2
탐방로그
곽종석 다전기적비는 경남 거창에 있으며, 영남에서 많은 후진을 양성하고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유림대표로서 파리장서를 제출한 곽종석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이다.
면우선생 다전기적비는 중촌리 마을회관 앞에 있으며, 면우선생 다전기적비에서 면우 곽종석선생 유적비까지는 130m로, 도보로 2분 정도 소요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면우선생 다전기적비
면우선생 다전기적비
이 기적비는 면우 곽종석(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선생의 영명을 자랑하고 간직하고픈 다전마을 주민이 옛 스승의 청정한 뜻을 기리고자 건립하였다. 대유작하이며 독립의사인 면우 곽종석은 조선 헌종 12년(서기 1846년) 6월 24일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초포동에서 태어났으며 영남 학통을 부흥시키는데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서기 1919년 유림을 대표하여 파리평화회의에 대한독립청원파리장서를 작성하여 137인이 서명하여 전달한 것이 왜경에 발각되어 대구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병보석으로 출감하여 동년 8월 24일 여재에서 별세하였다.
면우선생 다전기적비
여기는 근대에 이르러 우리나라 유학을 새롭게 결집하고 일제하에서 선비가 처신할 민족정도의 길을 연 유서깊은 다전마을이다. 원래 다지라고 불러왔는데 1896년 이곳에 은거한 면우선생이 다전이라 명명한후 그 명성이 선생의 행적과 음신따라 나라 안팎으로 알려져 다전은 역사의 고장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선생은 1846년 산청군 초포에서 태어나 약관에 이미 유학의 자기경지를 개척하면서 그 명망이 경향에 떨치고 있었으므로 선생이 은거하자 전국의 홍유명사들이 운집하여 한적했던 산촌은 학문의 도회로 변모하게되었다. 그 때 다전에 이르는 덕유 가야의 고갯길은 구한말 구국의 지혜를 찾는 경세가와 어사 그리고 도긻운동가와 시인 묵객등 선생이 타계한 1919년까지 당대지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 속에서 선생은 퇴계학통에 남명학을 종합하고 그 위에 우리의 천년 유학을 근대적으로 정리한 수철한 다전학풍을 일으켰다. 때문에 이산 골마을이 1919년 3.1운동때 전국 유림을 대표한 파리장서의 산실이 될수 있었다. 곽다전으로도 애칭되던 면우선생은 파리장서에서 전통유학의 척사론을 지양한 민족의 독립논리를 전개함으로써 우리 지성사의 격을 한층 더 높였다. 이것은 망국죄인을 자처하며 이곳 협지를 지키면서 선생이 이룬 또하나의 결정으로서 그 유방은 만고에 기리게 될것이다. 그러한 다전이었으므로 선생을 흠앙하여 솔춘정착한이도 적지않아 김해김씨 고연공 3형제는 다전에서 취호하여 다봉 다원 다태라 하고 세거지로 삼았으니 후손이 지금도 이곳에 살고있다. 다전마을은 개창한지 400년에 세족은 은진임씨 밀양박씨 전주이씨였는데 지금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덕우공후손이 김해김씨와 더불어 다전고사의 영예를 지키며 살고있다. 이제 면우문하 25년의 영광은 그 자취만 남고 다전은 다시 한적한 산촌으로 돌아갔지만 이끼사이
로 전하는 형형한 기록은 민족사의 광채로 세세에 빛날것이다. 그 영명을 자랑하고 간직하고픈 이 마을 어른들이 옛 스승을 기리면서 다전유훈의 세석을 세우나\ㅣ 그 청청한 듯이 어찌 공념에 머물것인가 후생들은 어른들의 간절한 뜻이 세로운 결실로 영글것을 다짐하는 마음으로 이 산촌 다전을 정성스럽게 가꾸어야 할것이다.
가북면 중촌리 마을회관 앞에 있는 면우선생 다전기적비를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