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산42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조 가북의 피 끓는 남정들이,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거창읍을 향해 노도같이 살피재를 넘어서는데 앞길을 가로막은 원수들의 빗발치는 총탄이 흰 벼랑을 붉게 물들였고 그 처절했던 함성이 그치고 말았던 그 날 오로지 나라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누구보다도 앞장서셨다가 천추의 한을 안고 적탄에 목숨을 잃은 다섯 분 중의 한 분이신 이공이 여기에 잠드셨다. 공의 이름은 석종 또는 세종이라 하셨고 자는 성백 양산 이씨시다. 아버님 순건과 어머님 해주 오씨 사이의 삼형제 중 맏으로서 1871년 5월 23일 가북면 용산리에서 나셨으며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가 남달르셨고 성품이 근검 강직하셨을뿐더러 항상 국운을 통탄하시다가 그날 하오 2시 끝내 48세를 일기로 대의를 위해 산화하셨다. 공이 그토록 기리던 조국이 광복된지 30여 년만인 1977년 12월에야 거룩한 넋을 달래고자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공은 초계 하씨를 초취하셨고 전주 이씨를 후취하셔서 슬하에 상내를 보셨고 손자 병흔를 두셨다. 공의 순국 64년만인 오늘 영령에 보답하고 우리 마음
의 거울로 삼고자 겨레의 이름으로 이 비를 새겨 세운다.
1983년 4월 일
경상남도 지사 이규효 거창군수 김종탁
1983년 4월 일
경상남도 지사 이규효 거창군수 김종탁
독립유공자 이석정 선생의 묘소는 풍류정 바로 뒤에 있다.
독립유공자 이석종의 묘(1871.5.23~1919.3.22)
경남, 거창, 가북명 용산리 사람이다. 1905년 을사강제조약 1910년 경술국치로 한일합병의 국권을 완전히 침탈당하자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의 시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계속 일어날 즈음에 음 2월 18일에 가조면 석강리 정자나무 아래 50여명의 우국지사들이 모여 음 2월 21일 거창읍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키로 하고 대표자 5인을 선정하여 집결지는 장기리 만학정 시간은 11시로 각 동리에 사발통문으로 연락하였다. 드디어 음 2월 21일(양 3월 22일) 11시경 수많은 관중이 만학정에 모여 독립만세의 함성을 울리며 거창읍을 향하여 남하면 둔마리 앞(사포현)에 이르렀을때 사전정보를 입수한 거창주둔헌병대가 도중에서 발포하며 저지하려 하였으나 계속 전진함으로 헌병들의 야만적인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중도에서 차단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경남, 거창, 가북명 용산리 사람이다. 1905년 을사강제조약 1910년 경술국치로 한일합병의 국권을 완전히 침탈당하자 서울에서 3.1독립만세운동의 시발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만세운동이 계속 일어날 즈음에 음 2월 18일에 가조면 석강리 정자나무 아래 50여명의 우국지사들이 모여 음 2월 21일 거창읍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거사키로 하고 대표자 5인을 선정하여 집결지는 장기리 만학정 시간은 11시로 각 동리에 사발통문으로 연락하였다. 드디어 음 2월 21일(양 3월 22일) 11시경 수많은 관중이 만학정에 모여 독립만세의 함성을 울리며 거창읍을 향하여 남하면 둔마리 앞(사포현)에 이르렀을때 사전정보를 입수한 거창주둔헌병대가 도중에서 발포하며 저지하려 하였으나 계속 전진함으로 헌병들의 야만적인 발포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여 중도에서 차단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그는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77년 대통령 표창을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거창군수
梁山李氏 納骨墳墓(양산이씨 납골분묘)
梁山李氏 世藏 納骨墳墓碑(양산이씨 세장 납골분묘비)
입 거창 양산이씨 세계 약사
시조는 영무이시고 4세 만영은 고려조 문과에 급제하여 태조조에 관 이조판서 보조공신 및 인천군을 봉함. 5세 전생 고려조에 등 문과 신해년 1371년에 순무어사와 태조조에 공조전서 지중추원사 및 증 봉 양산부원군으로 양산이씨 득 관조이시다. 6세 삼형제는 무과에 급제하여 삼장수로 징석은 장강공 양산군사 징옥은 충강공 육진 개척 수공신 징규는 증 봉영산군 내금위장원 종일등공신록훈 7세 팔동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위용장 8세 윤조는 관 충좌위 사직 윤환은 문과에 급제하여 금산군 사증 예조참의 입 합천조이시다. 12세 동란 동해는 문학취은불해 증 승지 입 거창조이시다. 20세 세종(석종)은 3.1독립운동 순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여기 납골묘에 안장 봉안 선조는 동해 할아버지시며 그 후손들이 안장되는 곳입니다.
시조는 영무이시고 4세 만영은 고려조 문과에 급제하여 태조조에 관 이조판서 보조공신 및 인천군을 봉함. 5세 전생 고려조에 등 문과 신해년 1371년에 순무어사와 태조조에 공조전서 지중추원사 및 증 봉 양산부원군으로 양산이씨 득 관조이시다. 6세 삼형제는 무과에 급제하여 삼장수로 징석은 장강공 양산군사 징옥은 충강공 육진 개척 수공신 징규는 증 봉영산군 내금위장원 종일등공신록훈 7세 팔동은 무과에 급제하여 관위용장 8세 윤조는 관 충좌위 사직 윤환은 문과에 급제하여 금산군 사증 예조참의 입 합천조이시다. 12세 동란 동해는 문학취은불해 증 승지 입 거창조이시다. 20세 세종(석종)은 3.1독립운동 순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여기 납골묘에 안장 봉안 선조는 동해 할아버지시며 그 후손들이 안장되는 곳입니다.
취지문
시대와 문화의 변천과 더불어 선조들의 묘소가 여러곳에 산재해 있어 일제 침략기에 일본 등 타지역에 이거해 사는동안 실묘된 산소도 적지 않으며 성묘 등 어려움을 고심해 오던 중 정부의 장묘문화(장묘문화)개혁적 시책을 접하면서 현 시대와 미래에 있어 가장 좋은 방안이라 생각되어 종중의 대표자들이 협의하에 납골분묘를 결정 시행함으로 옛날의 잘못된 관습이나 풍수지리설 같은 미신적인 사상을 해소하며 후손들에게 올바른 장묘문화를 전승해 주고자하여 이 일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서기 2000년 8월 일
병흔(병근) 상용(용한) 상섭(용섭) 원흔(상순) 중열(인덕)
시대와 문화의 변천과 더불어 선조들의 묘소가 여러곳에 산재해 있어 일제 침략기에 일본 등 타지역에 이거해 사는동안 실묘된 산소도 적지 않으며 성묘 등 어려움을 고심해 오던 중 정부의 장묘문화(장묘문화)개혁적 시책을 접하면서 현 시대와 미래에 있어 가장 좋은 방안이라 생각되어 종중의 대표자들이 협의하에 납골분묘를 결정 시행함으로 옛날의 잘못된 관습이나 풍수지리설 같은 미신적인 사상을 해소하며 후손들에게 올바른 장묘문화를 전승해 주고자하여 이 일을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서기 2000년 8월 일
병흔(병근) 상용(용한) 상섭(용섭) 원흔(상순) 중열(인덕)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1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愛國志士 梁山李公 錫宗 之墓(애국지사 양산이공 석종 지묘)
애국지사 이공 묘비문
나라를 빼앗긴지 10년 만인 1919년 만국평화회의에 걸었던 한 가닥 희망조차 사라지고 마지막 섬기던 임금마저 세상을 떠나시니 분하고 원통함을 참지 못한 겨레가 목 터지게 불렀던 독립만세 소리는 온 누리에 메아리쳤고 오랑캐의 행패가 더욱 격하였던 기미년 봄 3월 22일 가
나라를 빼앗긴지 10년 만인 1919년 만국평화회의에 걸었던 한 가닥 희망조차 사라지고 마지막 섬기던 임금마저 세상을 떠나시니 분하고 원통함을 참지 못한 겨레가 목 터지게 불렀던 독립만세 소리는 온 누리에 메아리쳤고 오랑캐의 행패가 더욱 격하였던 기미년 봄 3월 22일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