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상남도 거제시 하청면 실전리 산68-3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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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처에는 칠천도 다리 버스 정류장이 있으며, 360m 떨어져있어 도보로 5분 정도 소요된다.
신용기선생의 가족은 모두 활발히 항일독립운동을 하였다. 먼저 부인 노유용, 아들 신태호군도 함께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으나 한국전쟁 후 행적을 찾을 수 없다.
2008년 신용기 선생이 나서 자란 장소에 그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를 세웠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辛容祺 先生 抗日救國活動 紀念碑(신용기 선생 항일구국활동 기념비)
조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진대 선생의 일생은 오로지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치신 분으로 한국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선생의 휘는 용기(容祺) 혹은 철(鐵)이라 불리었으며, 1901년 6월 1일 이곳 향제(鄕第)에서 하청면 초대 면장을 지내신 고(故) 신주병(辛周柄) 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남달라 거제보통학교 재학 시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고 졸업 후 대구고등 보통학교에서 수학하면서 동맹휴업을 주도하여 정학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일본 동경 메이지 대학 의학부를 중퇴했다.
선생은 1922년 러시아로 건너가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23년 4월 서울에서 고려 공산당 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가 되어 청년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 7월 해방운동사(解放運動社) 결성, 11월 무정부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북풍회 집행위원이 된다.
조국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닐진대 선생의 일생은 오로지 항일운동에 일생을 바치신 분으로 한국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다. 선생의 휘는 용기(容祺) 혹은 철(鐵)이라 불리었으며, 1901년 6월 1일 이곳 향제(鄕第)에서 하청면 초대 면장을 지내신 고(故) 신주병(辛周柄) 님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기가 남달라 거제보통학교 재학 시 이미 신동으로 알려졌고 졸업 후 대구고등 보통학교에서 수학하면서 동맹휴업을 주도하여 정학을 당하게 된다. 이후, 일본 동경 메이지 대학 의학부를 중퇴했다.
선생은 1922년 러시아로 건너가 고려공산당에 입당하였으며, 1923년 4월 서울에서 고려 공산당 청년회 중앙총국 책임비서가 되어 청년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1924년 2월 신흥청년동맹 결성, 7월 해방운동사(解放運動社) 결성, 11월 무정부주의자들을 중심으로 결성한 북풍회 집행위원이 된다.
1925년 4월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항일운동을 펼쳐나갔다. 선생의 활동은 국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서울과 모스크바, 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며 독립 운동의 한 방편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택한 것이다.
1929년 2월 서대문 형무소 3년간 수감됨. 즐감 후 거제에서 의원을 개설하여 인술을 베풀다가 부산 광안리로 옮겨 대방의원(大邦醫院)을 개업하였다. 선생은 특히 문학에도 천부적 재질이 있어 나라 잃은 슬픔과 꺼지지 않는 민족 혼을 담은 20여 편의 시조를 남기기도 했다.
해방 후 잡지사를 경영하기도 했으며,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 중앙정치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선생의 지병이었던 간암으로 1948년 4월 7일 (陰) 49세를 일기로 민족해방 운동가요. 의사요.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했다. 가족으로 항일운동을 함께 한 부인 노유용(盧柔鎔) 아들 태호(泰豪)가 있었지만 한국과 전쟁 이후 그 행적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금년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60주년이 되는 해로 그동안 족질(族姪) 길생(吉生)을 중심으로 선생의 애국충정을 선양한 결과 정부는 2008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선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 고장은 선생이 나서 자라신 곳이요. 조국 광복을 위한 불타는 정성을 가꾸시던 곳이다. 이에 뜻있는 사람들이 성력을 모아 선생 일대의 자취를 간추리고 선생이 드리우신 그 높은 정신을 길이 천추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깊이 감추고 팔지 않음이 지사(志士)의 뜻이로다. 한조각 붉은 마음이사 백일(白日)이 비치리라〉
2008년 월 일 하청면지 편찬위원회 위원장 김백훈 근찬
1929년 2월 서대문 형무소 3년간 수감됨. 즐감 후 거제에서 의원을 개설하여 인술을 베풀다가 부산 광안리로 옮겨 대방의원(大邦醫院)을 개업하였다. 선생은 특히 문학에도 천부적 재질이 있어 나라 잃은 슬픔과 꺼지지 않는 민족 혼을 담은 20여 편의 시조를 남기기도 했다.
해방 후 잡지사를 경영하기도 했으며, 1945년 11월 조선인민당 중앙정치 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지만 선생의 지병이었던 간암으로 1948년 4월 7일 (陰) 49세를 일기로 민족해방 운동가요. 의사요. 그리고 시인으로서의 생애를 마감했다. 가족으로 항일운동을 함께 한 부인 노유용(盧柔鎔) 아들 태호(泰豪)가 있었지만 한국과 전쟁 이후 그 행적을 찾을 수 없어 안타깝다.
금년은 선생이 돌아가신 지 60주년이 되는 해로 그동안 족질(族姪) 길생(吉生)을 중심으로 선생의 애국충정을 선양한 결과 정부는 2008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선생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이 고장은 선생이 나서 자라신 곳이요. 조국 광복을 위한 불타는 정성을 가꾸시던 곳이다. 이에 뜻있는 사람들이 성력을 모아 선생 일대의 자취를 간추리고 선생이 드리우신 그 높은 정신을 길이 천추에 전하고자 이 비를 세운다.
〈깊이 감추고 팔지 않음이 지사(志士)의 뜻이로다. 한조각 붉은 마음이사 백일(白日)이 비치리라〉
2008년 월 일 하청면지 편찬위원회 위원장 김백훈 근찬
辛容祺 先生 抗日救國活動 紀念碑(신용기 선생 항일구국활동 기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