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영준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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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상남도 거제시 능포동 산61-1
탐방로그
거제시 능포동 290-1 독립유공자 옥영준 선생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 오래전에 부근을 찾았었지만 묘소 안내판도, 묘소도 찾지 못하고 그냥 돌아갔었다. 등산하신 분이 올린 사진을 힌트로 이곳을 찾았다.산 허리로 가는 길과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의 갈림길에서 산 정상 방향으로 올라갔다.200m라고 했는데, 꽤 올라가서 시민운동시설이 있는 곳에서 안내판을 찾을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유공자 옥영준 애국지사 묘소 안내
(산위로 200m)
산 허리로 가는 길과 산 정상으로 가는 길의 갈림길에서 산 정상 방향으로 올라갔다.
200m라고 했는데, 꽤 올라가서 시민운동시설이 있는 곳에서 안내판을 찾을 수 있었다
독립유공자 옥영준 애국지사 묘소 안내
ㅇ 독립유공자 : 애국지사 옥영준(玉英俊)(1892.2.17~1961.11.17)
ㅇ 묘역규모 : 165㎡ / ㅇ 안장 : 2기(애국지사 옥영준, 처 남순이 여사) / ㅇ 서훈 : 국민훈장 애족장
ㅇ 활동사
.중조 증(贈) 호조참의(戶曺參議) 죽천공(竹泉公) 신변(信卞)의 11세손으로 장승포에서 출생
.1906년 부친을 따라 만주 환인현(桓仁縣)으로 건너감
.1919년 전덕원(全德元)이 대한독립단원 수십명과 국내에 들어와 동지규합 및 군자금을 모금할 때 함께 활동하며 거금의 군자금을 대한독립단본부에 전달
.평북 용천군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2월 9일 평양지방법원 신의주지청에서 징역 2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룸
.만기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 계속 조국광복 운동에 헌신
.망명생활 중 중국침술을 습득 동포들의 병고를 돌보는 인술을 베품
.8.15광복 후 귀향 왜경고문의 여독에 시달리며 여생을 보내시다 1961년 향년 70세로 영면(永眠)하였음.
ㅇ 묘소건립 : 1985년 12월
配 宜寧南氏 順伊 墓 左 附左(배 의령남씨 순이 묘 좌 부좌)
질 치기 치상 치정, 녀 명자 점자 순자, 서 윤외구
愛國志士 宣寧玉公 英俊 之墓(애국지사 선녕옥공 영준 지묘)
여기 조국광복을 위해 혼신의 정력을 불살으시고 고이 잠드신 이 고장이 낳은 애국지사 옥공 영준의 자취를 도리켜본다. 공은 선녕옥씨 시조 선춘군 진서후 사종 22세손으로 1892년 장승포에서 출생하셨다. 공의 부친 상구공은 천부적인 용맹과 출중한 담력으로 배일사상이 투철하여 구한말 왜제의 대한침략의 횡포가 극심하자 비분강개하셔 장안에서 왜적 수명을 살상 격투 끝에 좌안을 실명하고 월성 피신 중 급기야 경술국
여기 조국광복을 위해 혼신의 정력을 불살으시고 고이 잠드신 이 고장이 낳은 애국지사 옥공 영준의 자취를 도리켜본다. 공은 선녕옥씨 시조 선춘군 진서후 사종 22세손으로 1892년 장승포에서 출생하셨다. 공의 부친 상구공은 천부적인 용맹과 출중한 담력으로 배일사상이 투철하여 구한말 왜제의 대한침략의 횡포가 극심하자 비분강개하셔 장안에서 왜적 수명을 살상 격투 끝에 좌안을 실명하고 월성 피신 중 급기야 경술국
치를 당하매 남만주로 솔가 망명하셨다. 남만주에서 장성한 공은 고상한 성품과 준수한 기품에 출중한 용맹과 불타는 조국애로 조맹선 단장이 영도하는 대한독립단에 가담 항일 독립 전선에서 활약하셨다. 1919에 이르러 재정부장 전덕원 지사 지휘로 윤학천과 더부러 수십명 단원을 인솔하여 국내에 잠입 평북 용천군 등지에서 지단조직과 독립군자금 조달 모금에 진심갈력하셨다. 3.1운동 출옥 지사 장관주와 연동제의 용천군 내중면감 이후관의 협조로 모금한 거액의 군자금을 압록강을 넘나들면서 대한독립단 본부에 전달 항일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하셨다. 1920년말 추적하던 왜경 60여명과 혈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이후관 이신관 등과 피체되어 왜경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치 않으매 그래도 양심이 살아있는 어느 동포 출신 왜경 경시로부터 "끝까지 잘 싸우시오"라는 비밀 격려를 받고 조직과 활동 전모가 탄로되지 않은 상태로 기소되어 신의주 재판소에서 징역 2년 선고를 받아 경성감옥에서 1923년 2월 9일 만기 출옥 후에도 공은 다시 옛 동지들을 규합 만주에서 계속 조국광복운동에 헌신하셨다. 8.15 조국 광복 후 환국 향리 장승포에서 청빈을 낙도로 초지일관 변함없는 우국지정으로 유유도일 터
치를 당하매 남만주로 솔가 망명하셨다. 남만주에서 장성한 공은 고상한 성품과 준수한 기품에 출중한 용맹과 불타는 조국애로 조맹선 단장이 영도하는 대한독립단에 가담 항일 독립 전선에서 활약하셨다. 1919에 이르러 재정부장 전덕원 지사 지휘로 윤학천과 더부러 수십명 단원을 인솔하여 국내에 잠입 평북 용천군 등지에서 지단조직과 독립군자금 조달 모금에 진심갈력하셨다. 3.1운동 출옥 지사 장관주와 연동제의 용천군 내중면감 이후관의 협조로 모금한 거액의 군자금을 압록강을 넘나들면서 대한독립단 본부에 전달 항일 독립군 양성에 크게 기여하셨다. 1920년말 추적하던 왜경 60여명과 혈전 끝에 중과부적으로 이후관 이신관 등과 피체되어 왜경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치 않으매 그래도 양심이 살아있는 어느 동포 출신 왜경 경시로부터 "끝까지 잘 싸우시오"라는 비밀 격려를 받고 조직과 활동 전모가 탄로되지 않은 상태로 기소되어 신의주 재판소에서 징역 2년 선고를 받아 경성감옥에서 1923년 2월 9일 만기 출옥 후에도 공은 다시 옛 동지들을 규합 만주에서 계속 조국광복운동에 헌신하셨다. 8.15 조국 광복 후 환국 향리 장승포에서 청빈을 낙도로 초지일관 변함없는 우국지정으로 유유도일 터
니 1961년 11월 17일 향년 70으로 고종하셨다. 공몰 22년 후인 1982년 8월 15일 제 55166호로 대통령의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으셨다. 이에 공의 숭고한 애국정신을 후생들의 귀감삼아 그 공적을 길이 기리고저 옥평주는 사실을 기록하고 윤병오는 글씨쓰고 거제군수 이 비를 세우다.
1985년 12월 일 근건
거제시 능포동 290-1 독립유공자 옥영준 선생 묘소 안내판을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