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순국기념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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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2-7
탐방로그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2-4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앞에 위치하고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2-4 제암리 3.1운동 순국유적지
3·1운동 순국 기념탑

소재지: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기념탑이 세워진 이곳은 제암리 주민들이 항상 나라 찾을 것을 기도드렸던 예배당이 있었던 자리이다.
1919년 3·1운동이 터지자 이곳을 노려왔던 일경은 4월 15일 갑자기 마을을 습격하여 23명의 주민을 강제로 예배당 안에 감금한 뒤 불을 지르고 무차별 학살을 자행했다.
마을은 온통 불바다가 되었고 예배당은 한줌의 잿더미로 화하고 말았다.
1959년 이곳 예배당 자리에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순국한 29명의 명복을 빌고 후세에 이 사실을 길이 전하기 위하여 기념비를 건립했었다. 그러나 비가 작고 모양이 초라하여 문화공보부는 이곳을 사적 제299호로 지정, 정화하면서 원래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 기념탑을 세웠다.
(사적 제299호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내)
3.1운동 순국기념탑
3.1운동 순국기념탑
3.1운동 순국기념탑
기미년 삼월일일 일본의 말굽아레 십년 잠들었던 민족의 분노는 활화산 터지듯 일어나 삼일독립운동이 선언되자 노도같은 백의 민족의 자유를 부루짖는 백수항전의 드높은 함성은 삼천리 방방곡곡에 만길 불꽃을 올렸다. 죽음이 아니면 자유를 다라 서리같은 총칼을 든 일본헌병앞에 대한독립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리같은 일본헌병은 칼과 총으로 백의민족을 난도질쳤다. 경기도 화성은 역사깊은 문화의 도시였다. 여기에 향남면 제암리 드렁바위 농가 사십호는 가난했으나 정신문명의 수준이 높았다. 동리안에는 기독교 예배당이 있고 뜻있는 청년들은 예배당안에서 나라찾을것을 항상 기도드렸다. 삼일운동이 터지자 그들은 봉화를 높이 들고 독립운동을 일으킬 만반의 태세를 취했다. 독수리같은 일경은 이들의 행동을 노렸다. 마침내 음력 삼월 십육일 오후 일시경 일경들은 돌연 부락을 습격하여 청년 27명과 여인 2명 도합 29민을 무기로 위협하여 예배당에 감검하고 출입문을 폐쇄한 위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불길은 드렁바위를 사를듯 하늘에 뻐쳤고 순국열사의 기막힌 통곡성은 아득히 구천으로 사라지는채 예배당은 한줌의 재로 화해버렸다. 만고에 없는 일경의 잔인무도한 행동이었다. 29분의 순국열사는 이렇게 푸른 피를 불속에 뿌려 겨레의 넋을 지켰다. 오늘 자주독립의 국가를 찾은 드렁바위사람들은 순국열사의 명복을빌면서 후세에 영원히 이 사실을 전하여하여 당시 피화처였던 예배당터에 정성을 모아 아담한 기념탑을 세운다.
전면은 대통령 리승만박시 쓰시다. 월탄 박종화 짓고 여초 김응현 쓰다.
추기
이곳에는 향남면 삼일운동 순국기념탑 건립위원회에서 1959년 4월 22일에 건립한 기념비가 있었으나 비신이 작고 모양이 초라하여 선열을 현양하기에 부족하므로 제암리 삼일운동유적지 정화사업을 수행하면서 원래 기념비가 있던 자리에 다시 규모를 크게하여 이비를 세운다. 1983년 4월 15일 경기도 세움
기미년 3.1운동 제암리 순국열사 방명
안정옥 안종린 안종락
안종환 안종후 안경순
안무순 안진순 안봉순
안유순 안종엽 안필순
안명순 안관순 안상용
조경칠 강태성 동 부인김씨
홍원식 동 부인김씨 홍순진
김정헌 김덕용 김흥렬
김성렬 김세열 김주남
김주업 김흥복
추모탑 뒤에는 3.1정신교육관이 있었다.
순국열사를 기리는 조형물
병풍처럼 세워져 있는 29개의 돌은 29명의 순국열사를 상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