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장짐리 241-6
- 탐방로그
- 이정근 창의탑은 1919년 3월 발안장터에서 독립운동을 주도적으로 진두지휘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쳤던 이정근의 넋을 기리고 후세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해 1971년 3월 30일에 한글학자 한갑수, 김석원, 최덕신, 시인 모윤숙을 비롯한 국회의원과 지역유지 등 33인이 발기로 건립한 것이다. 발안3.1독립운동기념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탄운 이정근(1863-1919) 의사 창의탑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관리번호 : 13-1-12
⦁ 관리자 : 화성시장
⦁ 건립일 : 1970,4.5
⦁ 건립취지 : 일제의 폭압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산화하신 탄운 이정근 의사의 고귀한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
선생은 조선조 세조대왕의 3남 덕원군(德源君)의 14대손으로서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부터 농촌문맹퇴치운동을 시작하였으며, 33세에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에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하자, 선생은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고 낙향하였다.
낙향 후,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을 함께할 제자.동지들을 조직하였다. 조국 독립이 가까웠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倭王三年'('일본은 3년 안에 망한다')이라는 구호를 만들어 전파시켰으며, '독립가'를 작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대대적으로 망곡제와 횃불시위를 전개하였고, 3월 중순 독립선언문이 전달되자 동지들과 결사적인 독립운동을 결의하였다.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800여 명의 제자.동지들과 1천여 명의 군중을 선두에서 이끌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대가 발안주재소에 이르러 총검으로 무장한 일헌병들과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선생은 일헌병의 총검에 복부를 난자당하여 56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이에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대통령표창 추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하였으며, 묘소는 대전국립현충원 제2애국지사묘역(제234호)에 안장하였다.
독립가(이정근 선생 작사.작곡)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십오년을 참고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하느님이 도우시네 대한국운 다시왔네
어두웠던 방방곡곡 독립만세 진동하네
삼천만민 합심하여 결사독립 맹세하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 관리번호 : 13-1-12
⦁ 관리자 : 화성시장
⦁ 건립일 : 1970,4.5
⦁ 건립취지 : 일제의 폭압에 맞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우다 산화하신 탄운 이정근 의사의 고귀한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
선생은 조선조 세조대왕의 3남 덕원군(德源君)의 14대손으로서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부터 농촌문맹퇴치운동을 시작하였으며, 33세에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에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강탈당하자, 선생은 조국광복의 큰 뜻을 품고 낙향하였다.
낙향 후,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운동을 함께할 제자.동지들을 조직하였다. 조국 독립이 가까웠다는 희망을 주기 위해 '倭王三年'('일본은 3년 안에 망한다')이라는 구호를 만들어 전파시켰으며, '독립가'를 작사하여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대대적으로 망곡제와 횃불시위를 전개하였고, 3월 중순 독립선언문이 전달되자 동지들과 결사적인 독립운동을 결의하였다. 3월 31일 발안 장터에서 800여 명의 제자.동지들과 1천여 명의 군중을 선두에서 이끌며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시위대가 발안주재소에 이르러 총검으로 무장한 일헌병들과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선생은 일헌병의 총검에 복부를 난자당하여 56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이에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8년 대통령표창 추서,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하였으며, 묘소는 대전국립현충원 제2애국지사묘역(제234호)에 안장하였다.
독립가(이정근 선생 작사.작곡)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십오년을 참고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하느님이 도우시네 대한국운 다시왔네
어두웠던 방방곡곡 독립만세 진동하네
삼천만민 합심하여 결사독립 맹세하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발안만세거리] 탄운 이정근 창의탑
이 탑은 화성의 독립운동가 이정근을 기념하고자 1971년 4월 5일 한글학자 한갑수, 김석원, 최덕신, 시인 모윤숙을 비롯한 국회의원과 지역유지 등 33인이 건립하였다. 이정근은 팔탄지역의 학자로서 39세에 궁내부 주사가 되었다가 1905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던 중 일본 진압대가 휘두르는 칼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하였다.
화성시
이 탑은 화성의 독립운동가 이정근을 기념하고자 1971년 4월 5일 한글학자 한갑수, 김석원, 최덕신, 시인 모윤숙을 비롯한 국회의원과 지역유지 등 33인이 건립하였다. 이정근은 팔탄지역의 학자로서 39세에 궁내부 주사가 되었다가 1905년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에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19년 3월 31일 발안장터에서 만세를 부르던 중 일본 진압대가 휘두르는 칼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8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으로 승격하였다.
화성시
三.一獨立歌(3.1독립가)
1.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十五(15)년을 참고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2.
하느님이 도우시매
대한국운 다시왔네
어두웠던 방방곡곡
독립만세 진동하네
삼천만민 합심하여
결사독립 맹세하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灘雲 李正根 義士 作詞
(탄운 이정근 의사 작사)
1.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十五(15)년을 참고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2.
하느님이 도우시매
대한국운 다시왔네
어두웠던 방방곡곡
독립만세 진동하네
삼천만민 합심하여
결사독립 맹세하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대한독립 만세만세
灘雲 李正根 義士 作詞
(탄운 이정근 의사 작사)
2005년 3월 1일 건립
이신재 근서
이신재 근서
탄운(灘雲) 이정근(李正根) 의사 창의탑
탄운 이정근 의사는 세종대왕 3남 덕원군(德源君)의 14대손으로 팔탄면 가재리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부터 농촌 문맹퇴치운동을 시작하였으며 33세에 대한제국(大韓帝國) 궁내부(宮內府)주사에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어 국권을 일본에 강탈당하자 선생은 여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낙향하였다. 낙향 후 농촌문맹퇴치운동과 함께 지하조직망을 구축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함께 함 동직들을 규합해갔다. 1919년 3월 중순경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전달되자 수제자 및 각 지역의 동지들에게 결사적인 독립운동을 결행할 때가 왔음을 알리고 발안장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30일 발안장터에는 인근 7개면에서 모여든 수천명 군중이 운집하였다. 12시 거사시각이 되자 선생은 선두에 서서 800여명의 제자 동지와 수천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지휘하였다. 주재소에 이르러 총칼을 휘두르는 30여명의 일헌병들과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선생을 노리며 덤벼드는 일헌병대장의 총검에 복부를 무참히 난자당하여 63세를 일기로 장렬한 최후를 마치셨다. 선생은 1994년 대전국립묘지 제2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서기 1997년 6월 1일 단기 4330(정축)년 음 4월 26일 건립
탄운 이정근 의사는 세종대왕 3남 덕원군(德源君)의 14대손으로 팔탄면 가재리에서 태어났다. 청년시절부터 농촌 문맹퇴치운동을 시작하였으며 33세에 대한제국(大韓帝國) 궁내부(宮內府)주사에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어 국권을 일본에 강탈당하자 선생은 여생을 독립운동에 바치겠다는 큰 뜻을 품고 낙향하였다. 낙향 후 농촌문맹퇴치운동과 함께 지하조직망을 구축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함께 함 동직들을 규합해갔다. 1919년 3월 중순경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이 비밀리에 전달되자 수제자 및 각 지역의 동지들에게 결사적인 독립운동을 결행할 때가 왔음을 알리고 발안장날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1919년 3월 30일 발안장터에는 인근 7개면에서 모여든 수천명 군중이 운집하였다. 12시 거사시각이 되자 선생은 선두에 서서 800여명의 제자 동지와 수천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지휘하였다. 주재소에 이르러 총칼을 휘두르는 30여명의 일헌병들과 치열한 공방전 속에서 선생을 노리며 덤벼드는 일헌병대장의 총검에 복부를 무참히 난자당하여 63세를 일기로 장렬한 최후를 마치셨다. 선생은 1994년 대전국립묘지 제2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서기 1997년 6월 1일 단기 4330(정축)년 음 4월 26일 건립
순국선열의 유지
一. 나는 조국을 광복코저 이 몸을 바쳤노라
一. 나는 겨레를 살리고자 이 생명을 버렸노라
一. 나는 국혼을 찾아서 세상사를 잊었노라
一. 나는 민족의 뒷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
一. 나를 따라서 조국과 겨레를 지켜달라
一. 나는 조국을 광복코저 이 몸을 바쳤노라
一. 나는 겨레를 살리고자 이 생명을 버렸노라
一. 나는 국혼을 찾아서 세상사를 잊었노라
一. 나는 민족의 뒷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
一. 나를 따라서 조국과 겨레를 지켜달라
을유년 3월 1일 운향 이신재 근서
3.1독립운동의 선구자 탄운 이정근 의사 창의탑
화성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이정근을 기념하기 위하여 문하생들과 국내의 저명인사 36명이 1970년에 건립한 비이다.
화성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순국한 이정근을 기념하기 위하여 문하생들과 국내의 저명인사 36명이 1970년에 건립한 비이다.
3월 1일 전국 방방곡곡 울려퍼진 만세소리를 들으시고 아득하게 싹터오르는 독립의 서광을 보시며 동포를 깨우쳐서 용기를 북돋아주고자 다음과 같은 노래를 손수 지어 선창하시며 가르치셨다.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十五년을 참고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하느님이 도우시매
대한국운 다시왔네
어두웠던 방방곡곡
독립만세 진동하네
유가족 사자 우룡, 차자 우봉, 장손 긍재, 손 영재 신재 민재 철재, 장증손 호천, 손 호일 호민 호필 호헌 호락 호웅 호승 호욱 호균 호택 호익, 장현손 묘영, 현손 종영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十五년을 참고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마라 잊지마라
하느님이 도우시매
대한국운 다시왔네
어두웠던 방방곡곡
독립만세 진동하네
유가족 사자 우룡, 차자 우봉, 장손 긍재, 손 영재 신재 민재 철재, 장증손 호천, 손 호일 호민 호필 호헌 호락 호웅 호승 호욱 호균 호택 호익, 장현손 묘영, 현손 종영
그는 1856년 8월 팔탈면 가제리에서 나시고 준엄하고 법도있는 훈도아래에 성장하시니 문장과 필법이 뛰어났으며 많은 문장을 남기셨으나 오늘에 전하지 않는다.
관에 오르셨으나 왜경의 집요한 압력으로 사임하시고 귀향하여 주경야독하시는 여기에 학당설치와 계몽에 힘쓰시다가 1916년 5월 1일 애제자를 이끌고 발안주재소를 급습하여 악질일경에 응징의 철추를 내리시고 이후 치밀한 계획과 용감한 행동으로 항일투쟁의 손길을 멈추지 않으셨다.
1919년 2월 1일 고종황제의 승하하심을 듣자 하루도 궐함없이 황성을 망곡하니 따르는 자 수천여명에 달하였다. 화성군민이 義에 용감하였던 것도 선생에 감화된 바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년 4월 5일에는 애제자 이연규(李演珪), 김영태(金永泰), 이우연(李愚然), 권종대(權鐘大)등과 함께 군내 팔백여명의 동지를 규합하고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 집합하였다가 정오를 기하여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정연하게 시가를 행진하였다. 대열이 발안주재소에 이르자 제지하는 왜경의 무기를 빼앗고 왜경을 주재소에 감금한 후 유유하고 늠름하게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를 들은 수원 주재 왜헌병 30여명이 급거 쇄도하여 지휘자인 선생을 창으로 난자하니 선생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며 장렬한 최후를 마치시었다.
-이정근의사 창의탑 비문 중에서-
관에 오르셨으나 왜경의 집요한 압력으로 사임하시고 귀향하여 주경야독하시는 여기에 학당설치와 계몽에 힘쓰시다가 1916년 5월 1일 애제자를 이끌고 발안주재소를 급습하여 악질일경에 응징의 철추를 내리시고 이후 치밀한 계획과 용감한 행동으로 항일투쟁의 손길을 멈추지 않으셨다.
1919년 2월 1일 고종황제의 승하하심을 듣자 하루도 궐함없이 황성을 망곡하니 따르는 자 수천여명에 달하였다. 화성군민이 義에 용감하였던 것도 선생에 감화된 바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동년 4월 5일에는 애제자 이연규(李演珪), 김영태(金永泰), 이우연(李愚然), 권종대(權鐘大)등과 함께 군내 팔백여명의 동지를 규합하고 장날을 이용하여 장터에 집합하였다가 정오를 기하여 일제히 만세를 외치며 정연하게 시가를 행진하였다. 대열이 발안주재소에 이르자 제지하는 왜경의 무기를 빼앗고 왜경을 주재소에 감금한 후 유유하고 늠름하게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를 들은 수원 주재 왜헌병 30여명이 급거 쇄도하여 지휘자인 선생을 창으로 난자하니 선생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시며 장렬한 최후를 마치시었다.
-이정근의사 창의탑 비문 중에서-
탄운 이정근 의사 창의탑 건립위원회
고문 이갑성, 위원장 최덕신, 지도위원 남봉진 홍사승 홍낙선
위원 박지영 채대원 송일동 권오석 공국진 김영태 김동섭 김영철 김형일 김인수 김동현 남영우 박수남 박용석 백성기 서정환 서정린 서도심 송진석 신동우 안정순 예영창 윤기영 윤기원 윤영성 이기창 이강협 조상현 황선정 김석원 김일기
1971년 신해 양 4월 5일 선생의 52주기에 즈음하여 눈메 한갑수 삼가 찬하고 쓰다
고문 이갑성, 위원장 최덕신, 지도위원 남봉진 홍사승 홍낙선
위원 박지영 채대원 송일동 권오석 공국진 김영태 김동섭 김영철 김형일 김인수 김동현 남영우 박수남 박용석 백성기 서정환 서정린 서도심 송진석 신동우 안정순 예영창 윤기영 윤기원 윤영성 이기창 이강협 조상현 황선정 김석원 김일기
1971년 신해 양 4월 5일 선생의 52주기에 즈음하여 눈메 한갑수 삼가 찬하고 쓰다
民族魂(민족혼)
고귀한 생명으로 조국을 지켜야했던 임의 거룩한 정신 목숨을 내걸고 민족의 영광을 지켜왔던 임의 뜨거운 나라사랑 겨레사랑 못다한 애국충정 당신의 구슬픈 함성이 메아리 되어 우리들 가슴속에 영원히 영원히 살아숨쉬나이다.
民族正氣 祖國統一(민족정기 조국통일)
서기 2004년 8월 15일 건립
서기 2004년 8월 15일 건립
발안3.1독립운동기념탑과 탄운 이정근 의사 창의탑이 같이 있다.
발안九景(발안9경)
발안지역의 역사, 문화, 유적지를 기념하며 주민들의 애국, 애족, 애향심을 고취시키고자 발안만세시장에서 지정한 발안지역의 9개 명소
탄운 이정근 의사 - 3.1 발안만세운동 선구자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15년을 참고 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 마라 잊지 마라" - 후략
탄운 이정근 의사(1863-1919)가 친히 지은 '독립가'의
탄운 선생은 1863년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에서 태어났다.
33세에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로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자 비분강개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여 후일을 도모했다.
"1919년 3월 31일(음 2월 30일) 낮 12시 정각을 기해 저희가 가장 존경하는 탄운 스승님의 지엄하신 지시를 받아 화성군 7개면에 거주하는 저희 800여 제자들은 머리에 흰 갓을 쓰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구름같이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온천지가 떠나갈 듯이 부르던 일이 어제일 같습니다."
탄운 선생의 제자인 故 김영태 옹은 「탄운 이정근 의사 전기」에 위와 같이 회상했다. 그 때 그 모습은 현재 발안만세시장의 파출소 인근에 벽화로 재현되어 있다.
발안지역의 역사, 문화, 유적지를 기념하며 주민들의 애국, 애족, 애향심을 고취시키고자 발안만세시장에서 지정한 발안지역의 9개 명소
탄운 이정근 의사 - 3.1 발안만세운동 선구자
"터졌구나 터졌구나 독립성이 터졌구나 15년을 참고 참다 이제서야 터졌구나 피도대한 뼈도대한 살아대한 죽어대한 잊지 마라 잊지 마라" - 후략
탄운 이정근 의사(1863-1919)가 친히 지은 '독립가'의
탄운 선생은 1863년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 가재리에서 태어났다.
33세에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로 임명되어 국정에 참여하던 중,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하자 비분강개하여 사직하고 낙향하여 후일을 도모했다.
"1919년 3월 31일(음 2월 30일) 낮 12시 정각을 기해 저희가 가장 존경하는 탄운 스승님의 지엄하신 지시를 받아 화성군 7개면에 거주하는 저희 800여 제자들은 머리에 흰 갓을 쓰고 손에 태극기를 들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구름같이 모인 군중과 합세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온천지가 떠나갈 듯이 부르던 일이 어제일 같습니다."
탄운 선생의 제자인 故 김영태 옹은 「탄운 이정근 의사 전기」에 위와 같이 회상했다. 그 때 그 모습은 현재 발안만세시장의 파출소 인근에 벽화로 재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