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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도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 844-4
- 탐방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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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 844-4 화수초등학교 앞에 있는 우정 3.1독립운동기념비를 찾아왔다.
이곳이 당시 가와바타를 처단한 우정읍 화수리 주재소 자리라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건립추진위원회
자문위원 김선진 한정택 김순중
추진위원장 김현구, 부위원장 송영휘, 총무 김영천
위원 김정주 이근설 김원영 김석규 김용춘 송현홍 한백랑 심재명 한학수 양성필 최덕균 최만용 김영식 이구영 최화용 김진섭 조보환 송광석 한상만 한백범 김인성 한상길 서호섭 송기덕 정영복 신현목 김복규 이영화 최희일 최용운 김응수 이재원 최충식 한영택 김○규 오수문 김종만 윤성욱 인충환 김순근 최중구 윤병노 박창규 송영은
자문위원 김선진 한정택 김순중
추진위원장 김현구, 부위원장 송영휘, 총무 김영천
위원 김정주 이근설 김원영 김석규 김용춘 송현홍 한백랑 심재명 한학수 양성필 최덕균 최만용 김영식 이구영 최화용 김진섭 조보환 송광석 한상만 한백범 김인성 한상길 서호섭 송기덕 정영복 신현목 김복규 이영화 최희일 최용운 김응수 이재원 최충식 한영택 김○규 오수문 김종만 윤성욱 인충환 김순근 최중구 윤병노 박창규 송영은
경기 화성시 우정읍 화수리 844-4 화수초등학교 앞에 있는 우정 3.1독립운동기념비를 찾아왔다.
이곳이 당시 가와바타를 처단한 우정읍 화수리 주재소 자리라고 한다.
이곳이 당시 가와바타를 처단한 우정읍 화수리 주재소 자리라고 한다.
3.1독립운동기념비(우정읍)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13-1-03
관리자 : 화성시장(우정읍장)
건립일 : 1989.8.15
건립취지 : 1919년 당시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 장안면 수촌리 등지에서 전개되었던 3.1독립만세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지 1달 후 그 함성과 의의는 경기도 화성군에 이르게 된다. 4월 1일 저녁 우정면 보금산, 장안면 개죽산, 무봉산마다 봉화가 타오르고 우정면과 장안면에 만세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지며 그 장대한 시작을 알리었다.
4월 3일 새벽 5시 수촌리의 백낙렬은 준비된 태극기와 이봉구, 김익배, 김현조, 이종근, 이종렬, 우경구와 함께 시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을 동참하도록 호소하며, 순식간 500여 명을 동원하였다. 만세를 삼창한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안면사무소로 이동, 집기를 내던지고, 면사무소를 재로 만들었으며, 면장 김현목을 만세운동에 동참시켰다. 이후 우정면사무소로 이동하여 텅 빈 면사무소를 재로 만들었다.
만세시위는 계속되어, 1,500여 명을 넘어서며 최고조에 이른다. 이들은 주재소로 이동하며 총을 쏘며 도망치는 주재소당 가와바다를 붙잡아 참살하고 주재소를 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잔혹한 일제는 4월 6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11일 화수리까지 악랄한 만행을 자행하며, 사망 22명, 부상 17명, 34명 투옥, 500여 명의 주민을 고문과 폭행으로 짓밟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러한 우정면과 장안면의 독립운동 기치는 화성군, 나아가 조선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국가보훈처 지정 현충시설
관리번호 : 13-1-03
관리자 : 화성시장(우정읍장)
건립일 : 1989.8.15
건립취지 : 1919년 당시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 장안면 수촌리 등지에서 전개되었던 3.1독립만세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지 1달 후 그 함성과 의의는 경기도 화성군에 이르게 된다. 4월 1일 저녁 우정면 보금산, 장안면 개죽산, 무봉산마다 봉화가 타오르고 우정면과 장안면에 만세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지며 그 장대한 시작을 알리었다.
4월 3일 새벽 5시 수촌리의 백낙렬은 준비된 태극기와 이봉구, 김익배, 김현조, 이종근, 이종렬, 우경구와 함께 시민들에게 독립만세운동을 동참하도록 호소하며, 순식간 500여 명을 동원하였다. 만세를 삼창한 후 태극기를 앞세우고 장안면사무소로 이동, 집기를 내던지고, 면사무소를 재로 만들었으며, 면장 김현목을 만세운동에 동참시켰다. 이후 우정면사무소로 이동하여 텅 빈 면사무소를 재로 만들었다.
만세시위는 계속되어, 1,500여 명을 넘어서며 최고조에 이른다. 이들은 주재소로 이동하며 총을 쏘며 도망치는 주재소당 가와바다를 붙잡아 참살하고 주재소를 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잔혹한 일제는 4월 6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11일 화수리까지 악랄한 만행을 자행하며, 사망 22명, 부상 17명, 34명 투옥, 500여 명의 주민을 고문과 폭행으로 짓밟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러한 우정면과 장안면의 독립운동 기치는 화성군, 나아가 조선의 독립의지를 만천하에 알리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게 되었다.
三.一 獨立運動 紀念碑(3.1 독립운동 기념비)
삼괴 한가운데 산자수려하게 자리잡은 두 봉우리는 이 고장의 수호신으로 쌍봉산이라 한다. 옛부터 이산은 승지로 득명하여 뭇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으며 산 기슭에 조선 초기부터 60여칸의 큰 쌀 창고를 지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젖줄이 되었고 지금은 이 고장 문화의 총본산으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의 도장이다.
고려 충정왕 3년 단기 3684년 8월에도 왜구가 이곳 쌍도를 대거 침입하여 민가에 함부로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였으며 임진왜란때는 무려 7년이란 장구한 세월 전국이 초토화되어 국운이 가물거릴 때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 서해맹산의 기함을 토하시며 민족정기를 드높이시니 혼비백산하여 패주한 도적의 무리들은 300여년 동안 감히 이 땅을 넘보지 못하였다.
그후 나라의 정세가 어지럽게 되자 일제는 침략의 마수를 뻗쳐 이 땅을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격분한 민족지도자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구국정신으로 3.1독립만세 운동의 횃불을 올리었다. 만세의 물결은 마침내
고려 충정왕 3년 단기 3684년 8월에도 왜구가 이곳 쌍도를 대거 침입하여 민가에 함부로 불을 지르고 노략질을 하였으며 임진왜란때는 무려 7년이란 장구한 세월 전국이 초토화되어 국운이 가물거릴 때 민족의 성웅 이순신 장군께서 서해맹산의 기함을 토하시며 민족정기를 드높이시니 혼비백산하여 패주한 도적의 무리들은 300여년 동안 감히 이 땅을 넘보지 못하였다.
그후 나라의 정세가 어지럽게 되자 일제는 침략의 마수를 뻗쳐 이 땅을 식민지화하였다. 이에 격분한 민족지도자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겠다는 구국정신으로 3.1독립만세 운동의 횃불을 올리었다. 만세의 물결은 마침내
그해 4월 3일 이 지역으로 파급되어 몇 사람의 천도교인들이 앞장서니 주민들은 너나없이 태극기를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각처에서 수촌리로 모여들었다. 여기서 행렬을 정비한 천여명의 시위군중은 어은리 은골의 장안면사무소와 화산리 사기말 우정면사무소를 모두 차례로 불태우니 연기가 하늘높이 치솟았다. 흥분한 만세행렬은 쌍봉산에 올라 백의의 인산을 이루어 목청 높이 조선독립만세를 합창하여 천지를 진동시켰다. 군중은 다시 화수리로 행진하여 주재소를 몇 겹으로 포위하니 때는 오훈 5시경이었고 군중은 2000여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때 독립을 부르짖는 시위군중에게 주재소 소장 가와바다가 무차별하게 쏘아대는 총탄에 맞아 세명이 죽고 두 명이 부상하였다. 이 참상을 본 군중들은 분에 넘쳐 투석과 각목으로 치열하게 저항하여 드디어 주재소에 불을 지르면서 달아나는 가와바다를 붙잡아 민족의 이름으로 처형하였다. 군중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다시 자주독립만세를 소리높이 외쳐 이 나라가 우리의 것임을 만방에 당당하게 천명하였다. 앙심을 품은 일제는 많은 병력을 출동시켜 4월 6일 수촌리를 시작으로 11일 화수리에 몰려와 수일간 갖은 악랄한 만행을 자행하여 사망자 22명 부상자 17명 옥고를 치른 분이 34명 불에 탄 가옥이 백여호 혹독한 고문을 당한 사람이 수백명이나 되었다. 이 곳의 독립운동은 전국 어디에서도 거의 그 짝이 없을만큼 격렬하였으면 그 여세는 바로 4월 5일 이웃 발안시장터로 이어졌고 다시 4월 15일 제암리에서 천추만대의 잊을 수 없는 참혹한 학살을 빚어놓고 말았다. 선열들의 독립만세운동은 뒷날 자주독립의 새싹이 되어 단기 4278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에 3.1운동 70주년을 맞이하여 뒤늦게나마 온 주민들의 정서을 함께 모아 지사들의 거룩한 호국정신을 마음속 깊이 되새기면서 깊고 자랑스러운 역사의 현장을 정화하여 두 번 다시 이 땅에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기를 굳게 다짐하는 엄숙한 징표로 이 비를 세운다.
단기 4322년 8월 15일 이종학 삼가 짓고 한동인 삼가 쓰다
단기 4322년 8월 15일 이종학 삼가 짓고 한동인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