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해한용운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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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탐방로그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건봉사 사명당 의승병 기념관 앞 일제에 의해 파괴된 복원 사명대사 기적비와 만해 한용운 기념관, 만해당 대선사 시비, 봉명학교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주차장 바로 옆에 만해 한용운 기념관, 사명당 의승병 기념관, 만해대선사 시비를 찾을 수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泗溟堂 義僧兵 記念館(사명당 의승병 기념관)
萬海 韓龍雲 記念館(만해 한용운 기념관)
1879 :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부 韓應俊(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속명은 貞玉(정옥), 법명은 용운, 법호는 만해
184~1897 : 향리에서 한학 수학
1892 : 천안 전씨와 결혼
1899 :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등지를 전전
1904 : 귀향하여 향리에서 수개월간 머물다
1905 : 백담사 김연곡 스님에게서 득도. 김영제 스님에 의하여 수계. 이후 이학암 스님으로부터 〈기신론〉, 〈능업경〉, 〈원각경〉 등을 사사받음
1908 : 4월경 일본으로 건너가 下關(하관) 등지를 순유하고 동경의 曹洞宗(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철학을 청강함. 10월경 귀국
1910 : 〈조선불교유신론〉 탈고(1913년 불교서관에서 간행)
1912 : 불교경전 대중화의 일환으로 〈불교대전〉을 편찬하기 위해 양산 통도사의 고려 대장경을 열람함
1913 :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 박한영 등과 함께 불교 종무원을 창설. 통도사 불교강사에 취임. 〈불교대전〉을 국한문으로 편찬(1914, 홍법원)
1918 : 월간 교양지 〈惟心(유심)〉을 발간하여 편집인 겸 발행인이 됨
1919 : 1월경 최린, 현상윤 등과 조선독립에 대해 의논함.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였으며 〈공약 3장〉을 추가함. 3월 1일 명월관 지점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을 하고 투옥됨. 7월 10일 〈조선독립의 개요〉 제출
1926 : 시집 〈님의 침묵〉을 회동서관에서 발행
1927 :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지부장에 피선됨
1931 : 1931 김법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승려비밀결사인 卍黨(만당)의 영수로 추대됨
1933 : 유숙원과 재혼. 벽산 스님, 방응모, 박광 등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尋牛莊(심우장)을 짓다. 여기에서 소설 〈흑풍〉, 〈죽음〉 등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다.
1944 : 월 6월 29일 심우장에서 이적. 미아리에서 화장하여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다
1962 :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重章(중장)이 수여되다
1967 : 〈용운당 만해 대선사비〉가 파고다 공원에 건립됨
1973 : 〈한용운 전집〉(전 6권)이 신구문화사에서 간행됨

만해 한용운
님은 갔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만해기념관에 계시는 분께 봉명학교에 대해 여쭈어보니, 이 입구 부근이 봉명학교 터라고 알려주셨다.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 36 건봉사 사명당 의승병 기념관 앞 일제에 의해 파괴된 복원 사명대사 기적비와 만해 한용운 기념관, 만해당 대선사 시비, 봉명학교 안내판을 찾아가고 있다.
금강산 건봉사
고성 육송정 홍교(高城 六松亭 虹橋) / 보물 제1337호 /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간성읍 해상리 1041, 탑현리 53
육송정 홍교의 건립 년대를 알 수 없지만 건봉사 능파교와 함께 을축년(1745년)의 대홍수로 붕괴되었던 점을 고려할 때 능파교(1804년)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748년에 편찬된 간성군 읍지(杆城郡 邑誌)에 육송정 홍교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어 능파교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간성읍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하천의 폭이 12.3m 되는 곳에 석축을 쌓고 길이 10.6m의 다리를 놓았다. 이 다리는 단칸 홍예교(虹蜺橋 : 다리 밑이 반원형이 되게 쌓은 다리)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조된 석교(石橋 : 돌다리)이다.
홍예의 기초는 자연지형을 잘 활용하여 동쪽은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그 위에 홍예돌과 비슷한 크기의 장대석으로 1단의 지대석(높이 30㎝)을 두었다. 서쪽에서는 3단의 지대석을 쌓은 후 그 위에 홍예를 올렸는데 1단에 2개씩의 장대석을 이어서 만들었다. 서쪽 지대석의 높이는 1단이 묻혀있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2단이 70㎝, 3단이 60㎝로 매우 거대하다. 홍예와 날개벽 사이 교각면석은 장대석을 사용하지 않고 자연적인 냇돌(川石)을 사용하였는데 아래쪽에서는 큰 돌을 위쪽에는 작은 돌을 사용하였다.
2003년 보수공사시 홍예석을 제외한 면석과 호안석축 및 주변공사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사업추진 중 홍교의 변형 및 훼손이 심하다고 판단되어 문화재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홍예석을 해체하여 2006년 7월에 복원되었다.
주차장 바로 옆에 만해 한용운 기념관, 사명당 의승병 기념관, 만해대선사 시비를 찾을 수 있었다.
건봉사(乾鳳寺) / 강원도 기념물 제51호 / 지정일 : 1982년 11월 3일 / 소재지 :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건봉사로 723

건봉사(乾鳳寺)는 전국 4대사찰의 하나로 만해 한용운 선생의 건봉사급건봉사말사사적지(乾鳳寺及乾鳳寺末寺事蹟)에 의하면, 신라 법흥왕 7년(서기 520년)에 아도화상이 원각사(圓覺社)를 창건하였고, 그 후 고려 태조 20년(서기937)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중수한 뒤 서봉사(西鳳寺)라 하였으며, 고려 공민완 7년(서기1358)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수하고 건봉사(乾鳳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라 경덕왕 17년(서기758) 발징화상이 중건하고 정신, 양순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열었다. 이것이 염불만일회의 효시가 되었고, 현존하는 "등공기념탑"은 서기 787년 염불만일회에 참가했던 31인이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어 극락왕생하였다고 전하고 그 부도를 모신 것이다. 세조 10년(서기1465) 세조임금이 건봉사를 원당(願堂)으로 삼은 뒤, 어실각(御室閣)을 짓고, 전답과 친필 동참문을 하사하였다고 전한다. 그 후 서기 1878년 4월 3일 큰 불로 인해 3,183칸이 전소(全燒)되었으나, 여러차례 복원작업을 통하여 서기 1911년에 9개 말사(末寺)를 거느린 31본산의 하나가 되었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가 의승병을 기병한 호국도량이었으며, 당시 통도사에 있던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왜병(倭兵)이 일본으로 가져간 것을 사명대사가 사행(使行)하였다가 다시 찾아와 이곳에 봉안하였다. 또한 구한말인 서기 1906년 "봉명학교"를 설립하여 개화사상과 신문화를 받아들인 관동지방 교육의 도장이 되었으나, 그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도 하였고 공산치하엔 냉천인민학교로 개명하였다. 이 지역은 한국전쟁 중 휴전 직전까지 2년 여에 걸쳐 아군 5,8,9사단 및 미군 제 10군단과 공산군 5개 사단이 16차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건봉산 전투 전적지이며, 이때 건봉사는 완전히 폐허가 되었으나, 서기 1994년부터 대웅전, 팔상전, 염불만일원, 종각, 사지 등이 각각 복원되었고, 지금도 사찰복원이 계속 이루어지고 있다. 한국전쟁전 건봉사는 총 642칸과 보림암 등 124칸의 18개 부속암이 있었다.
사명대사 동상 / 사명당 의승병기념관 / 능파교 / 불이문
趙靈出(조영출) 詩(시)와 노래 碑(비)

칡넝쿨

하늘이 하도높아 땅으로만 기는
강안두 칡 넝쿨이
절간 종소리 숙성히도 잘아났다

맷뚝이 뱃짱이 들이 처갓집
문짓방 처럼 자조넘는 칡넝쿨

넝쿨진 속에 季節(계절)이
무릅을 꿇고 있다
여름의 한나절 꿈이 향그럽다
줄줄이 벋어간 끝엔
뽀족 뽀족 연한 순이 돋고

어린 소녀의 사랑처럼 온 칡
몰으게 몰으게 茂盛(무성)해간다

架裟(가사)를 수한 젊은 女僧(여승)이
혼자 단이는 호젓한 길몫에도
살금살금 기어가는 칡넝쿨이언만

해마두 오는 가을을 넘지못해
목을 움출이고 뒷걸음을치는 植物(식물)

칡넝쿨이 안보히면 먼댓절엔
燈(등)불이 한개두개 열닌다

만해기념관에 계신 분의 이야기로는 봉명학교 출신 분들의 시비라고 하신다.
略歷(약력)
1913년 충남 아산 출생. 1927년 15세때 건봉사에서 중연(重連)으로 출가. 건봉사와 사바로 1935년 서울보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일본 와세다대학 불문과를 졸업, 193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동방의 태양을 쏘라」로 당선됐고, 조명암이란 필명으로 약 480여곡의 가사 중 「고향초」 「알뜰한 당신」 「선창」 「낙화유수」 등은 당시의 히트곡 들이다. 시나 가사 내용은 당시 일제치하의 암울했던 우리민족 감정을 잘 들어냈고, 이 비면의 시 「칡넝쿨」은 조영출이 어려서부터 살던 건봉사의 자연과 일상이 여실히 표출된 것으로 감회가 깊다. 경진년 효춘 글.시인 최재형
고향초 / 남쪽 나라 바다 멀리 물새가 날으면 뒷 동산에 동백꽃도 곱게 피는데 뽕을 따는 아가씨들 서울로 가네 정든 사람 정든 고향 잊었단 말인가
만해 한용운 기념관 / 사명당 의승병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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