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칠보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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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경기도 화성시 신동 산46
탐방로그
공칠보 선생의 묘소에는 묘비가 없었다. 증손자 공 소방관님에게 전화로 문의한 결과로, 첫번째 묘소가 공칠보 지사의 묘소이고, 그 다음 묘소가 형님되시는 공석준 선생의 묘소라고 하셨다. 또 아래쪽에 있는 묘비는 형님되시는 공석준 선생의 묘비이다. 공칠보 선생은 순국하신 후 처가가 있었던 인천 주안 공동묘지에 계시다가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화성시 신동 산 46(화성시 동탄면 신리 산 46) 곡부공씨 선영 애국지사 공칠보(공석윤)의 묘소를 찾았다.
네비게이터가 화성상록GC 안으로 안내를 한다.
골프장 주차장에서 네비게이터가 멈춘다. 위성지도를 보면 앞쪽으로 가야 하는데 숲속에 들어갈 수 없도록 막혀있다.
주차장에서 위성지도를 보면서 출입이 가능한 길을 찾기 위해 왼쪽으로 내려갔지만 역시 막혀있다.
주차장에서 숲을 바라보고 오른쪽 구석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고 알려주셨다.
오른쪽 방향 구석에 들어가는 길이 있었다. 이곳에 애국지사 묘소 안내판을 세워주면 좋을텐데
위성지도를 보면서 오른쪽 구석 방향 길로 들어서자 왼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조금 더 내려가자 위성지도에서 제일 위쪽에 보이는 묘소가 보인다.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야 한다.
시멘트로 만들어진 길이 끝나고 왼편에 묘소가 보였다.
2기의 묘소가 있고, 아래쪽에 묘비가 보였다. 공칠보 지사의 묘소에는 묘비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첫번째 묘소가 공칠보 지사의 묘소이고,
그 다음 묘소가 형님되시는 공석준 선생의 묘소라고 하셨다. 또 아래쪽에 있는 묘비는 형님되시는 공석준 선생의 묘비이다.
공칠보 지사의 형님되시는 공석준 선생의 묘
묘소 봉분과 묘비, 상석이 위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
공칠보(공석윤)지사의 형님이신 공석준 선생의 묘비이다.
동생과 같이 3.1만세운동을 하셨고, 동생의 만세운동 내역이 묘비에 언급이 있다고 한다.
曲阜孔公 錫駿 之墓 孺人 慶州崔氏 祔左
(곡부공공 석준 지묘 유인 경주최씨 부좌)
曲阜孔公 錫駿 之墓 孺人 慶州崔氏 祔左
(곡부공공 석준 지묘 유인 경주최씨 부좌)
공의 자는 주팔이요, 휘는 석준이며 계유 단기 4206년 12월 12일 재익의 4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하여 을축 단기 4258년 2월 28일 5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噫(희)라. 天生蒸民(천생증민)에 各賦其任(각부기임)이련만 然而(연이)이나 時運(시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영웅 열사도 그 웅지를 펴지 못하고 끝내 滄海之珠(창해지주)가 되는 것인가 이것이 또한 천도의 순리라면 微微(미미)
공의 자는 주팔이요, 휘는 석준이며 계유 단기 4206년 12월 12일 재익의 4형제 중 차남으로 출생하여 을축 단기 4258년 2월 28일 5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噫(희)라. 天生蒸民(천생증민)에 各賦其任(각부기임)이련만 然而(연이)이나 時運(시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영웅 열사도 그 웅지를 펴지 못하고 끝내 滄海之珠(창해지주)가 되는 것인가 이것이 또한 천도의 순리라면 微微(미미)
한 인간의 존재는 滄海(창해)의 一粟(일속)으로 吾生(오생)의 須叟(수수)함을 슲퍼하지 않을 수 없다. 不出世(불출세)의 天縱之聖(천종지성) 孔子(공자)의 77세손이며 중시조 회원군의 24세손으로써 淵源(연원) 깊은 巨族(거족)의 후광을 입어 영특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태어난 공은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할 뿐 아니라 精思力踐(정사역천)하는 실천적 의지가 강했다 한다. 항시 崇先裕後(숭선유후)의 덕성을 길러 안으로는 가문의 薰風(훈풍)을 배양하고 밖으로는 진충보국의 뜻을 간직하여 오던 중 국운이 否塞(비색)함에 한일합방이라는 비운을 맞게 되자 독립만세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는 틈을 타 親弟(친제) 석윤과 더불어 적극적인 활동을 해 왔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가진 고초를 당했으며 이로 인하여 金石黼黻(금석보불)과 같은 뜻이 좌절된 채 불귀의 靈魄(영백)이 되었다 한다. 이와 같은 선고의 국가적 功勞(공로)가 당시 자료 부재로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한을 품어오던 공의 3남 신택의 述懷(술회)를 빌어 淺陋(천루)한 蕪辞(무사)로써 顚末(전말)을 적어 悚懼(송구)함을 금할 수 없으나 후손들의 崇祖精神(숭조정신) 涵養(함양)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서기 1989년 월 예천후인 임대호 근찬
한 인간의 존재는 滄海(창해)의 一粟(일속)으로 吾生(오생)의 須叟(수수)함을 슲퍼하지 않을 수 없다. 不出世(불출세)의 天縱之聖(천종지성) 孔子(공자)의 77세손이며 중시조 회원군의 24세손으로써 淵源(연원) 깊은 巨族(거족)의 후광을 입어 영특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니고 태어난 공은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이 투철할 뿐 아니라 精思力踐(정사역천)하는 실천적 의지가 강했다 한다. 항시 崇先裕後(숭선유후)의 덕성을 길러 안으로는 가문의 薰風(훈풍)을 배양하고 밖으로는 진충보국의 뜻을 간직하여 오던 중 국운이 否塞(비색)함에 한일합방이라는 비운을 맞게 되자 독립만세운동이 거족적으로 전개되는 틈을 타 親弟(친제) 석윤과 더불어 적극적인 활동을 해 왔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경에 체포되어 가진 고초를 당했으며 이로 인하여 金石黼黻(금석보불)과 같은 뜻이 좌절된 채 불귀의 靈魄(영백)이 되었다 한다. 이와 같은 선고의 국가적 功勞(공로)가 당시 자료 부재로 세상에 알려지지 못한 한을 품어오던 공의 3남 신택의 述懷(술회)를 빌어 淺陋(천루)한 蕪辞(무사)로써 顚末(전말)을 적어 悚懼(송구)함을 금할 수 없으나 후손들의 崇祖精神(숭조정신) 涵養(함양)에 보탬이 되기를 기대한다.

서기 1989년 월 예천후인 임대호 근찬
자 성택 흥택 신택
손 윤식 중식 구식 한식 현식 은식 대식 규식 형식
증손 병각 병호 병선 병준 원일 병근 병진 병윤 병국 병훈
부근에 다른 묘소들이 많이 있었다. 공칠보(공석윤) 선생의 아드님 공남식 선생도 6.25전쟁 국가유공자,
손자되시는 공남식 선생 또한 월남참전 국가유공자로 되어 있어서 혹시나 찾아보았지만 형님의 아드님 묘소이었다.
다른 곳에 묘소가 각각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