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588
- 탐방로그
-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588 '독립운동가 박영호 집터 표지판'을 찾았다. 보훈처 공훈록에 따르면 박영호(朴永鎬)가 본명이시고, 박춘흥(朴春興)은 이명이라고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독립운동가 박춘흥 집터
화성의 독립운동가 박춘흥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박춘흥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저지하는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를 추격하여 처단하는 등 격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화성의 독립운동가 박춘흥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박춘흥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저지하는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를 추격하여 처단하는 등 격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박춘흥 집터
화성의 독립운동가 박춘흥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박춘흥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저지하는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를 추격하여 처단하는 등 격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화성의 독립운동가 박춘흥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박춘흥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저지하는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를 추격하여 처단하는 등 격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박춘흥 집터
화성의 독립운동가 박춘흥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박춘흥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저지하는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를 추격하여 처단하는 등 격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화성의 독립운동가 박춘흥이 살던 집이 있던 곳이다. 박춘흥은 1919년 3월 26일부터 28일까지 송산면 사강리 일대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저지하는 일본 순사부장 노구치 고조(野口廣三)를 추격하여 처단하는 등 격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588에 위치한 '독립운동가 박춘흥 집터 표지판'을 찾았다. 박춘흥 지사는 보훈처 공훈록에는 본명이 박영호(朴永鎬), 이명이 박춘흥(朴春興)으로 등록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