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헌 행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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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정선군 남면 광덕리 1005-3
탐방로그
경사가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오자 내고향 수령마을이 보였다.
영곡(靈谷) 수령 동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 마을, 곳곳에 맑고 깨끗한 샘이 곳곳에 솟아나 선녀들이 샘에서 목욕을 하곤 했는데 어느날 사람들에게 들키자 하늘로 승천하였다고 해서 '영곡'이라 불렸다고 한다. 이 곳 샘에서 목욕을 하거나 머리를 감으면 잡신이 범접을 못한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로드뷰로 여러번 보았던 수령마을 모습이 들어왔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이 마을에 오는 길에 넓은 국도도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 주민에서 물으니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보인다고 알려주셨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자 담우 학종 담은 담귀, 손 영식 영재
증손 창근 돈생 돈형 돈희 돈학
현손 정균 재규 천일 진호 대일 인철 형배 성민
수령마을 모습이 들어왔다.
내고향 수령마을
마을 입구에서 마을 주민에서 물으니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보인다고 알려주셨다.
東學 道接主 旌菴 劉時憲 先生 行蹟碑(동학 도접주 정암 유시헌 선생 행적비)
東學 道接主 旌菴 劉時憲 先生 行蹟碑(동학 도접주 정암 유시헌 선생 행적비)
旌菴(정암), 劉時憲(유시헌) 先生(선생) 行蹟(행적)

東學(동학) 道接主(도접주) 劉時憲(유시헌) 선생은 서기 1843년 1월 15일 정선군 남면 유평리에서 출생하니 자는 道元(도원) 行名(행명)은 寅常(인상) 譜名(보명)은 時鎭(시진) 號(호)는 旌菴(정암)이며 동학사상을 신봉하시던 도인이였으며 2세도주 海月(해월) 최시형 선생의 은거지로 정암자택을 정하고 주야로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협의하며 해월의 十二時字(12시자) 반포로 道布德主(도포덕주) 崔時亨(최시형) 次道主(차도주) 강시원 道接主(도접주) 유시헌 김시명 심시정 신시영 신시일 최시경 홍시래 전시황 방시학 조시철 등은 "時字改名(시자개명)과 苦樂(고락)을 결의하며 은밀히 道勢(도세)는 전국적으로 이어졌고 설법제 기도등 행사의 주도적인 역활로 정선의 동학 역사를 창조한 선각자로 동학혁명시 1894년 10월 정암부인 최씨는 평창에 투옥되었다가 4개여월의 옥고 끝에 방면되었고 차남 학종은 영월에 투옥되어 부친의 거소를 대라는 심한 고문에 "나의 부친은 나의하늘이니 하늘에서 찾아보라"며 실신하여 12월 19일 26세로 세상을 등졌고 장남 택하는 사슬에 묶인 체 "道(도)중진들을 찾으라"며 사방으로 끌려다니다 탈출하였고 정암은 1895년 1월 27일 新東(신동)운치리에서 검거되어 평창에 투옥되었다가 문인들의 상소로 방면되었으며 수년간의 은거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1897년 7월 수령(초두평)에 정착하였다가 1904년 11월 14일 졸하니 묘는 수령배 고개 상단이시다.

서기 1999년 4월 5일 건비 손부 영재의 처 허경 추진 유돈생 돈희 돈학
旌菴(정암), 劉時憲(유시헌) 先生(선생) 行蹟(행적)

東學(동학) 道接主(도접주) 劉時憲(유시헌) 선생은 서기 1843년 1월 15일 정선군 남면 유평리에서 출생하니 자는 道元(도원) 行名(행명)은 寅常(인상) 譜名(보명)은 時鎭(시진) 號(호)는 旌菴(정암)이며 동학사상을 신봉하시던 도인이였으며 2세도주 海月(해월) 최시형 선생의 은거지로 정암자택을 정하고 주야로 포덕천하 광제창생을 협의하며 해월의 十二時字(12시자) 반포로 道布德主(도포덕주) 崔時亨(최시형) 次道主(차도주) 강시원 道接主(도접주) 유시헌 김시명 심시정 신시영 신시일 최시경 홍시래 전시황 방시학 조시철 등은 "時字改名(시자개명)과 苦樂(고락)을 결의하며 은밀히 道勢(도세)는 전국적으로 이어졌고 설법제 기도등 행사의 주도적인 역활로 정선의 동학 역사를 창조한 선각자로 동학혁명시 1894년 10월 정암부인 최씨는 평창에 투옥되었다가 4개여월의 옥고 끝에 방면되었고 차남 학종은 영월에 투옥되어 부친의 거소를 대라는 심한 고문에 "나의 부친은 나의하늘이니 하늘에서 찾아보라"며 실신하여 12월 19일 26세로 세상을 등졌고 장남 택하는 사슬에 묶인 체 "道(도)중진들을 찾으라"며 사방으로 끌려다니다 탈출하였고 정암은 1895년 1월 27일 新東(신동)운치리에서 검거되어 평창에 투옥되었다가 문인들의 상소로 방면되었으며 수년간의 은거생활로 가산을 탕진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1897년 7월 수령(초두평)에 정착하였다가 1904년 11월 14일 졸하니 묘는 수령배 고개 상단이시다.

서기 1999년 4월 5일 건비 손부 영재의 처 허경 추진 유돈생 돈희 돈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