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화성시 남양동 589
- 탐방로그
- 1894년 존스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남양교회는 1934년 무렵 교세가 극도로 위축되었는데,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당시 은퇴한 이필주 목사가 파견되어 내려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남양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이후 교회 앞에 이필주 목사의 기념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남양감리교회에는 두 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는데, 하나는 같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오하영 선생의 친필로 새겨진 1946년에 세워진 비석이고, 또 다른 비석은 1969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이필주 목사와 화성의 인연을 알려주는 비석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위대한 별은 여기 빛나고 있다.
허물어진 조국과 잃어진 자주독립을 되찾아 조상의 빛난 얼을 겨레에게 물려주려고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로 왜정에 항거하여 애국적 성충을 발휘하신 목사님은 구 한국 군인출신으로 젊은이들에게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익히게하여 나라의 기틀로 이바지 할 인재양성을 목적하고 공옥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슬기롭게 봉사하였다.
주의 종으로 부름받아 복음화운동에 앞장선 목사님은 감리교적 부흥사요 목회자로서의 강인한 인격이 풍기는 감화력이 암흑과 도탄속에 방황하던 동포에게 그리스도를 안겨주었고 오늘의 감리교회의 역사적 성장에 커다란 공헌을 남기었다. 그토록 못 잊어 바라던 조국광복 태극기 펄럭이는 영광의 날도 못보신채 한많은 생애를 마치었다.
그러기에 이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려고 기념비를 33년전에 정성 모아 세웠으나 세월은 흘러서 올해가 3.1절 50주년이기에 목사님이 역임했던 상동 정동 만리현 용두동 창현 서강 미아리 왕십리 청파도(연화봉) 남양등 교회와 목사님을 추모하는 뜻 있는 분들의 뜨거운 성원과 33인중 유일한 생존자 이갑성옹의 비문을 한글로 보충 개축하여 후세민으로 하여금 기념케하고자 여기 이 비를 세운다.
허물어진 조국과 잃어진 자주독립을 되찾아 조상의 빛난 얼을 겨레에게 물려주려고 기미독립운동 민족대표로 왜정에 항거하여 애국적 성충을 발휘하신 목사님은 구 한국 군인출신으로 젊은이들에게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익히게하여 나라의 기틀로 이바지 할 인재양성을 목적하고 공옥학교에서 체육교사로 슬기롭게 봉사하였다.
주의 종으로 부름받아 복음화운동에 앞장선 목사님은 감리교적 부흥사요 목회자로서의 강인한 인격이 풍기는 감화력이 암흑과 도탄속에 방황하던 동포에게 그리스도를 안겨주었고 오늘의 감리교회의 역사적 성장에 커다란 공헌을 남기었다. 그토록 못 잊어 바라던 조국광복 태극기 펄럭이는 영광의 날도 못보신채 한많은 생애를 마치었다.
그러기에 이 숭고한 정신을 되새기려고 기념비를 33년전에 정성 모아 세웠으나 세월은 흘러서 올해가 3.1절 50주년이기에 목사님이 역임했던 상동 정동 만리현 용두동 창현 서강 미아리 왕십리 청파도(연화봉) 남양등 교회와 목사님을 추모하는 뜻 있는 분들의 뜨거운 성원과 33인중 유일한 생존자 이갑성옹의 비문을 한글로 보충 개축하여 후세민으로 하여금 기념케하고자 여기 이 비를 세운다.
이필주 목사님은 기미년 독립운동 당시 나의 존경하는 선배 동지로서 선생의 성격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생사를 불고하고 돌진하는 위대한 애국자이시다.
1969년 3월 이갑성
1969년 3월 이갑성
경기 화성시 남양동 589 남양감리교회 앞 이필주 목사 기념비를 찾아왔다.
이필주 목사는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 대한감리교 대표이며 YMCA 초대 체육교사로 재직하던
1911년 당시에 김상옥의사(金相玉義士)를 지도하여 청년부장으로 활동케 한 바 있다.
애국지사 이필주 묘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16 에 있다.
1911년 당시에 김상옥의사(金相玉義士)를 지도하여 청년부장으로 활동케 한 바 있다.
애국지사 이필주 묘는 서울현충원 애국지사묘역-16 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