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117-2
- 탐방로그
- 이 공적비는 그의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와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포천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하였으며, 비 앞면에는 「獨立志士 覺山 趙永元先生 功績碑(독립지사 각산 조영원선생 공적비)」라 새겼는데, 비문은 김을한이 짓고, 조건행이 글씨를 썼다. 비는 장대석으로 된 2층의 기단 위에 장방형의 대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옥개를 갖춘 대리석 비신을 세웠다. 규모는 178㎝×60㎝×31㎝이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각산 조영원 선생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건립코자 수년전부터 추진하여 오던 중 포천군 당국의 특별한 배려와 유지 제현의 정성어린 뜻을 모아 포천군 유지 일동의 이름으로 삼가 이 비를 세웁니다
서기 1982년 8월 일
포천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건립위원회 위원장 이명우 근립
족손 건행 근서
서기 1982년 8월 일
포천군 출신 독립유공자 공적비 건립위원회 위원장 이명우 근립
족손 건행 근서
경기 포천시 창수면 추동리 117-2 창수초등학교 내 독립지사 각산 조영원 선생 공적비를 찾아왔다.
조영원 선생 공적비
조영원(1892-1974)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호는 각산이고, 본관은 한양이다. 유신학교를 졸업한 뒤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임정국무원비서장서리, 한국유일당촉성회의원을 지냈다. 1926년 촉성회 대표로 만주에 파견되어 김좌진이 영도하던 신민부의 군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해림 신장학교를 창설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1931년 한국독립총사령부 총차모로 독립군 규합 및 항일구국군총사령 이두에게 한,중 연합전을 교섭하여 실현시켰다.
1933년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사형수로 복역 중 5년간 집행유예로 본국에 압송되었다. 8.15 광복 후 한국독립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피선되기도 하였으며, 1968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 공적비는 선생의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와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포천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 앞면에는 '독립지사 각신 조영원선생 공적비'라 새겼는데, 비문은 김을한이 짓고, 조건행이 글씨를 썼다.
비는 장대석으로 된 2층의 기단위에 장방형의 대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옥개를 갖춘 대리석 비신을 세웠다. 규모는 178cmx60cmx31cm이다.
조영원(1892-1974) 선생은 독립운동가로 호는 각산이고, 본관은 한양이다. 유신학교를 졸업한 뒤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 의정원의원, 임정국무원비서장서리, 한국유일당촉성회의원을 지냈다. 1926년 촉성회 대표로 만주에 파견되어 김좌진이 영도하던 신민부의 군사위원으로 활약하면서 해림 신장학교를 창설하여 인재양성에 힘썼다. 1931년 한국독립총사령부 총차모로 독립군 규합 및 항일구국군총사령 이두에게 한,중 연합전을 교섭하여 실현시켰다.
1933년 만주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사형수로 복역 중 5년간 집행유예로 본국에 압송되었다. 8.15 광복 후 한국독립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피선되기도 하였으며, 1968년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이 공적비는 선생의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와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1982년 포천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 앞면에는 '독립지사 각신 조영원선생 공적비'라 새겼는데, 비문은 김을한이 짓고, 조건행이 글씨를 썼다.
비는 장대석으로 된 2층의 기단위에 장방형의 대석을 설치하고, 그 위에 옥개를 갖춘 대리석 비신을 세웠다. 규모는 178cmx60cmx31cm이다.
독립지사 각산 조영원선생 공적비
조선생의 본관은 한양이요 휘는 영원이며 호는 각산이다. 선생의 시조는 려조의 명신으로 한양조 태종때 한평부원군 좌의정 양경공의 세손이며 인조때 중추대제학 문간공의 세손이기도 하다. 선생은 서기 1892년 5월 1일에 출생하셨는데 어려서부터 천자가 온후강직하고 충효가 겸전하여 장래가 크게 촉망되였다. 서기 1907년 유신학교를 졸업하니 이때는 일제 소위 보호조약이 체결된 후임으로 다감한 청년기의 선생은 하늘을 울어러 탄식하였다. 이윽고 1910년 경술합병으로 조국이 송두리째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자 선생은 분연결기하여 당시 민족운동의 본류로 서간도에 망명 중인 석오 이동녕 성재 이시영 선생 등 여러 선배와 연락 국내에서 비밀히 활약하다가 선생도 또한 망국의 통한을 품고 상해로 망명한 이때는 1920년 8월 이였다. 상해에 온 선생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피선된 후 의열단 중앙위원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장 서리를 임하고 한국 유일독립당 촉성회 위원이 되여 1926년 우 촉성회 대표로 만주에 특파되였으며 만주에서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추천으로 신민부 고문이 되고 해림 신창학교를 창설하여 인재 양성에 주력하였다. 1931년 선생은 이청천 장군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독립군 총사령부를 조직하고 총참모가 되여 남북만주에 산재한 독립군 청년동지를 규합하여 군사훈련을 하는 한편 항일구국군 총사령 이두에게 교섭하여 한중연합작전을 한 결과로 다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1933년 2월 선생의 나이 41세때 만주에서 왜경에 체포되어 사형수로 복역 중 일제의 만주국 건립으로 소위 은사를 입어 5년간 집행유예로 본국에 압송 생불여사의 세월을 보내였다. 8.15해방이 되여 사회단체의 장이나 고문에 추대되였으며 1964년 4월 한국독립당 전당대회에서 대표최고위원으로 피선되였고 1968년 3월 독립유공자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선생은 전 생애를 오로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고투하다가 1974년 4월 22일에 졸하니 수 83세이요 포천군 창수면 선영에 장하였다. 80 평생에 명리를 초월하고 고고하게 생애를 마치니 선생의 이름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의 고난의 역사와 함께 길이 청사에 빛날 것이다.
동명 김을한 찬
동명 김을한 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