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산39
- 탐방로그
- 염재 최면식은 면암 최익현의 손자이기도 하다. 두 분의 위패를 모신 채산사와 가까운 곳에 최면식 선생의 묘소가 가꾸어져 있는 이유이다. 염재 선생의 묘소 아래쪽에는 아드님 묘가 있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최면식선생의 묘소 위쪽에는 묘표가 없는 묘가 있었다.
또 아래쪽에는 염재선생의 아드님 묘가 있었다.
성헌 경주최공 영수 지묘
면재공 영수 묘표
공의 휘는 영수요 호는 금재니 경주인이다. 신라말의 대문호이신 고운선생은 그 시조가 되신다. 한말 순의 거유이신 면암선생은 증조이며 항일이며 항일독립지사인 염재 휘 면식공과 중암선생의 손녀인 청풍김씨는 공의 고비이다. 공은 경술 1910년 11월 13일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1남2녀중 독자로 태어나 1930년 전주이씨 휘 윤섭의 장녀를 취하여 1남 2녀를 두니 서자 종규 장녀 임규와 차녀 계정이다. 사자는 남양홍씨 휘 승유의 장녀를 취하여 2남 3녀를 두니 진화, 진욱 두 손과 진첨,
공의 휘는 영수요 호는 금재니 경주인이다. 신라말의 대문호이신 고운선생은 그 시조가 되신다. 한말 순의 거유이신 면암선생은 증조이며 항일이며 항일독립지사인 염재 휘 면식공과 중암선생의 손녀인 청풍김씨는 공의 고비이다. 공은 경술 1910년 11월 13일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에서 1남2녀중 독자로 태어나 1930년 전주이씨 휘 윤섭의 장녀를 취하여 1남 2녀를 두니 서자 종규 장녀 임규와 차녀 계정이다. 사자는 남양홍씨 휘 승유의 장녀를 취하여 2남 3녀를 두니 진화, 진욱 두 손과 진첨,
경기 포천시 신북면 가채리 산39 염제 최면식선생 묘를 찾았다.
'독립지사 염재 최선생 묘 입구' 채산사와 가까운 곳에 있다.
'독립지사 염재 최선생 묘 입구' 채산사와 가까운 곳에 있다.
獨立志士 念齋 崔先生 諱 勉植 之墓(독립지사 염재 최선생 휘 면식 지묘)
선생의 휘는 면식, 자는 경소, 관은 경주로 염재는 호이니, 라말 문호이신 문창후 고운 선생의 29세손이요 한말 위정척사와 순절충국의 진유이신 면암 선생의 손으로 참봉 영학공과 남씨부인을 고비로 하여 서기 1891년 1월 7일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가채리 향제에서 태어나셨다. 천성이 호협뇌락한 위에 조부 면암선생의 기절을 이어받은 선생께서는 경술합방을 당하자 국운을 강개하고 분연히 뜻을 세워 1912년 만주로 망명하신 다음 광복단의 국내조직 연락책임을 맡고 밀입국하여 활동하셨으며 1914년 다시 만주에 들어가 활동 중 부족자금을 조달하기위하여 입국하였다가
피체되어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셨다. 이후 농토를 매각 광복단자금을 충당하였고, 1916년 다시 만주에 망명 김좌진, 노백린 장군 박상진 채기중 의사 등과 결교하며 활동하던 중 1918년 동지 규합과 군자금 조달차 밀입국하였다가 또 피체되어 2년간의 옥고를 치르셨으나 곧 만주로 망명하셨고 1921년 다시 밀입국하여 광복단의 군자금조달 활동을 펴다가 체포되어 무기징역의 언도를 받고 공주형무소에 복역 중 십지에 죽침 등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 거의 반신불수가 되신 채 출옥하셨다. 1925년 이후 서울 왕십리, 신설동 등지에 은거하며 국내 독립단체의 연락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상경하는 본향청년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독립투사 비밀기술원에서 의술을 습득하셨다. 총독부로부터 관직을 미끼로 한 교묘한 회유를 여러번 받았으나 단호히 거절하시고 신설동에 한약방을 개설하여 빈곤한 주민들을 무료로 진료하셨다. 그러나 잦은 옥고로 건강을 잃어 오매불망 기원하던 조국 광복을 1년 여 앞두고 1944년 7월 3일 향년 54세로 졸하시니, 오호라 사로는 선생의 원통하신 혼을 슬퍼하고 공으로는 국사를 잃어 통곡하도다. 그러나 집보다 나라와 겨레를, 나보다 남을 위해 충절과 자혜의 생애를 온전히 사시어 독립유공표창과 건국포장의 국가 상전을 두 번 받으시니, 그 남기신 뜻과 드리우신 빛은 후세에 길이 두고 전범이 되시리로다. 배위 청풍김씨는 중암 선생의 손녀로 성행이 단숙하시어
선생이 모르신 가사를 오로지 맡아가신 현부인이시었으며, 장자 영수는 반공애국지사로 6.25난시 피납, 해를 당하였고, 장녀는 정태륜에게, 차녀는 송세영에게 출가하였고 장손 종규는 군내공사에 직임을 다하여 실로 가성을 훌륭히 지키고 김창중, 진병석 두 손서와 진화, 진욱 두 증손이 있다.
이 앞을 지나는 이는 응당 옷깃을 여미고 머리 숙여 공경하리로다.
서기 1984년 8월 일 생질 연세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송준호는 삼가 글 짓고
후학 동국대학교 교수 배상현은 삼가 쓰고 대한민국 원호처는 세우다
이 앞을 지나는 이는 응당 옷깃을 여미고 머리 숙여 공경하리로다.
서기 1984년 8월 일 생질 연세대학교 교수 문학박사 송준호는 삼가 글 짓고
후학 동국대학교 교수 배상현은 삼가 쓰고 대한민국 원호처는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