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 흉상, 시비, 만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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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690
탐방로그
백담사 만해마을과 백담사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특히 백담사는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약 6Km 이상을 마을버스를 타고 올라가야 했다. 또한 백담사에서 나오는 마을버스는 5시가 막차이기 때문에 시간을 잘 확인하며 탐방을 해야 한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內雪嶽 百潭寺(내설악 백담사) / 백담사(百潭寺)
高閑(고한) / 한적한 곳 - 허응당 보우
庵在雲重處(암재운중처) / 암자는 겹겹 구름 속에
從來不設扉(종래불설비) / 본디 사립문도 없다네
臺杉含晩翠(대삼함만취) / 늦 푸른 삼나무와
庭菊帶斜暉(정국대사휘) / 저녁 햇살 어린 국화라네
木落經霜菓(목락경상과) / 서리 맞은 열매 떨어지고
僧縫過夏衣(승봉과하의) / 스님은 여름 지난 옷을 꿰매나니
高閑吾本意(고한오본의) / 이 한적함이 내 옛 뜻이거늘
吟賞自忘歸(음상자망귀) / 돌아갈 길 잊고 시 한편 읊네
저물 무렵 - 매월당 김시습

천 봉우리 만 골짜기 그 너머로
한 조각 구름 밑 새가 돌아오누나
올해는 이 절에서 지낸다지만
다음해는 어느 산 향해서 떠나갈거나
바람 자니 솔 그림자 창에 어리고
향 스러져 스님의 방 하도 고요해
진작에 이 세상 나 끊어버리니
내 발자취 물과 구름사이 남아 있으리

晩意(만억)

萬壑千峰外(만학천봉외) 孤雲獨鳥還(고운독조환)
此年居是寺(차년거시사) 來歲向何處(래세향하처)
風息松窓靜(풍식송창정) 香鎖禪室閑(향쇠선실한)
此生吾己斷(차생오기단) 樓迹水雲間(누적수운간)
梵鍾樓(범종루)
卍海紀念館(만해기념관)
나룻배와 行人(행인)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행인)

당신은 흙 발로 나를 짓밟음니다
나는 당신을 안ㅅ고 물을 건너감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깁흐나 엿흐나 급한 여을이나 건너감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마지며 밤에서 낫가지 당신을 기다리고 잇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가면 나를 도러보지도 안코 가심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줄만은 아러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어감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行人(행인)

한용운
丁巳十二月三日夜十時頃坐禪中忽聞風打墜物聲疑情頓釋仍得一詩
(정사십이월삼일야십시경좌선중홀문풍타추물성의정돈석잉득일시)
만해 한용운스님이 백담사 오세암에서 주석할 때 1917년 12월 3일 밤 10시경에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疑情頓釋)을 이룬 후, 그 깨달음의 뜻을 시로 남겼다는 의미라고 함.

오도송(悟道頌:큰 깨달음을 얻는 순간의 감회를 표현한 시)

男兒到處是故鄕(남아도처시고향) / 대장부 남아 어디에나 고향인것을,
幾人長在客愁中(기인장재객수심) / 몇 사람이나 나그네 수심 속에 깊이 갇혔나.
一聲喝破三天界(일성갈파삼천계) / 한마디 꾸짖는 소리 삼천세계를 부수니,
雪裡桃花片片飛(설리도화편편비) / 눈발 속에 복사꽃 흐드러져 날리네.
卍海 韓龍雲(만해 한용운)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 만해 -
卍海紀念館(만해기념관)
백담사 만해기념관을 열며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의 출가 사찰이자, 위대한 만해정신의 산실이다. 이 러한 백담사에 민족의 자랑이요, 거례의 큰 스승, 만해 한용운 선사의 유묵과 자료를 한자리에 모은 만해기념관을 개관함은 우리의 크나큰 자랑이다.
만해 한용운 선사가 조국 역사에 남긴 발자취는 크고 뚜렷하다. 그는 굳은 지조와 대쪽같은 정절로 민족정기를 만방에 떨친 독립운동가이며, 사랑의 증도가(證道歌)를 노래한 님의 시인이 다. 또 불교의 대강백·대선사이다. 그러나 독립운동가인가 하면 시인이요, 시인인가 하면 대사 상가요, 대사상가인가 하면 어느새 독립운동가로 변해버린다.
그 어느 한 면만으로 만해 한용운 선사를 이해할 수는 없다. 어느 것에도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과 이미 하나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만해 한용운 선사는 무엇이라고 정의내리면, 이미 그 세계를 뛰어 넘어있다. 단(斷)과 상(常)을 여읜 무변(無邊)의 자리에 다시 우뚝 솟아 중정(中 正)의 도(道)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만해 한용운 선사의 철학과 예술과 나라 사랑의 큰 정신이 깃들어 있다.
만해 한용운 선사는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 향리에서 한응준 공의 둘 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은 서당에서 한학(漢學)에 몰두하며 민족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닦았다.
그는 1905년 설악산 백담사에서 승려가 되어 구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후 오세암·건봉사에서 정진하여 불제자로서 사상의 깊이를 더했다. 국운이 기울어가던 1910년 한·일 불교 동맹조약 체결을 분쇄하고, 그 후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7년 12월 설악 산 오세암에서 참선하던 중 문득 깨달음의 경지를 얻었다. 1919년 3·1운동의 선봉에 서서 행동강령으로 〈공약 3장〉을 첨가하고, 옥중 독립선언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발표하였다.
그 후 민립대학 설립운동(1923), 사랑의 중도가 〈님의 침묵〉 발행(1926), 신간회 조직(1927), 광주학생의거 지원(1929) 등을 통하여 민족혼을 고취하는 한편, 항일의 선봉에 섰 다. 1933년 서울 성북동 총독부를 돌아 앉은 북향집 심우장(尋牛莊)을 짓고, 조선인 학병지원, 창씨개명 등의 반대운동을 벌였다.
1944년 6월 29일 조국광복을 한 해 앞두고 향년 66세로 한평생을 마감하니, 선사의 일생은 민족의 자존성 바로 그것이었다. 육신(肉身)은 가도 그 법신(法身)의 향기는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남아 백담의 뜰에 가득 넘쳐 나리라.
선사가 남긴 주요 저서로는 〈한문독본〉(1912), 〈불교유신론〉(1913), 〈불교대전〉(1914), 〈정선강의 채근담〉(1917), 〈십현담 주해〉(1926), 〈님의 침묵〉(1926) 등이 있다. 또 〈유심〉(1918), 〈불교〉(1931), 〈신불교〉(1937)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고, 〈흑풍〉, 〈박명〉, 〈죽음〉 등의 소설, 많은 한시 작품과 〈조선청년에게〉 등의 논설을 남겼다.

만해 한용운 선사 연보
1879년 충청남도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한응준의 차남으로 출생.
1905년 설악산 백담사로 출가.
1910년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을 탈고하여 불교 개혁을 주장함.
1914년 팔만대장경의 요점을 정리한 〈불교대전〉을 편찬.
1917년 12월 3일 설악산 오세암에서 좌선중 오도송을 남김.
1918년 월간 종합 교양 잡지 〈유심〉을 창간.
1919년 3·1독립운동을 주도하고 독립선언서에 행동 강령으로 공약 3장을 첨가. 3월 1일 태화관에서 33인을 대표하여 독립선언 연설. 투옥 후 옥중에서 〈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를 발표
1923년 민립대학 설립운동을 주도하고,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
1926년 〈십현담 주해〉, 〈님의 침묵〉 발행.
1927년 신간회를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 겸 서울 지부장에 피선.
1933년 총독부와 마주 보기 싫다하여 서울 성북동에 북향집 심우장을 짓고 주석.
1940년 창씨개명, 징병, 학병 출정 반대운동 전개.
1944년 성북동 심우장에서 입적.
1962년 정부로부터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선학원 / 1933년 만해가 입적할 때까지 말년을 보낸 심우장. 만해는 이 집을 지을 때 총독부가 보기싫다하여 북향으로 집을 지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 백용성 / 송만공 / 신채호 / 김동삼
卍海堂(만해당)
卍海堂(만해당)
羅漢殿(나한전)
極樂寶殿(극락보전)
백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부복장유물(白潭寺 木造阿彌陀佛坐像 附腹藏遺物)
보물 제1182호 / 소재지 :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 2리
이 불좌상은 1748년(영조 24)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무를 깎아 만들었으며 크기는 87㎝ 정도이다. 오른손은 어깨까지 들고, 왼손은 다리 위에 올려 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손 모양[수인: 手印]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미타부처의 손모양이다.
아미타부처는 서쪽의 극락세계에 살면서, 중생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부처이다. 머리에는 마치 소라처럼 오른쪽으로 빙빙 돌려진, 꼬불꼬불한 머리카락[나발:螺]이 선명하다. 불상 머리 꼭대기의 커다란 상투구슬, 표정 없는 얼굴, 가슴 위를 가로지르는 내의(內衣) 표현 등은 조선시대 후기 불상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불상의 내부에서 이 상을 만들게 된 배경과 만든 시기를 알 수 있는 발원문(發願文) 4장과 노란색저고리, 보자기에 싸여진 유리와 수정 등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이 불상의 가치를 높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후기의 복식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화엄실은 만해가 ‘님의 침묵’을 탈고한 곳이라고 한다.
백담사(百潭寺)
백담사 : 전통사찰 제24호 / 소장문화재: 보물 제1182호 목조아미타불 좌상 부 복장유물
〈설악산 심원사 사적기 雪嶽山 尋源寺 寺蹟記〉와 한용운의 〈백담사 사적기 百潭寺 寺蹟記〉에 의하면 백담사는 서기 647년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한계리에 한계사로 창건하고 아미타삼존불을 조성·봉안 하였다. 한계사로 창건 후 1775년(영조51년)까지 운흥사, 심원사, 선구사, 영취사로 바뀌다가 1457년(세조 3년)과 1783년(정조 7년)에 최붕과 운담이 백담사라 개칭하여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백담사라는 사찰의 이름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절까지 작은 담(潭)이 100개가 있는 지점에 사찰을 세운 데에서 일컫게 되었다고 한다.
백담사는 내설악의 아주 깊은 오지에 자리잡고 있어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좀처럼 찾기 힘든 수행처였다. 수많은 운수납자(雲水袖子)가 불원천리하고 이곳을 찾아 백담사 계곡을 시원하게 흘러가는 맑은 물에 객진번뇌를 털어 내고 설악영봉의 푸른구름을 벗을 삼아 출격장부의 기상을 다듬던 선불장 이었다. 한용운이 편찬한 〈백담사 사적기〉에 의하면 부속암자로서 유지만 남아있는 곳으로 동암, 원명암, 백련암 등 8개 암자가 있었다.
만해 한용운(1879-1944) 선사는 1905년 이곳 백담사에서 머리를 깎고 입산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어 〈조선불교유신론 朝鲜佛敎維新論〉 과 〈십현담주해 十玄談註解〉를 집필하고 〈님의침묵〉이라는 시를 발표하는 등 불교유신과 개혁을 추진하였으며, 일제의 민족침탈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운동을 구상하였던 독립운동의 유적지로서도 유명하다.
1988년 5월 28일 자로 전통사찰 제24호로 지정된 백담사는 보물 제1182호(1993. 11.1)로 지정된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1928년 백담사의 복구가 끝난 당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사보(寺寶)로 현장의 유물로 전해지는 미타불상(彌陀佛像) 3위(位)와 소종(小鐘) 1좌(坐)가 있고, 인조의 하사품인 칠층옥탑이 있었다.
보물로 지정된 목조아미타불은 영조 24년(1748)에 조성된 아미타목불좌상(阿彌陀木佛坐像)으로 18세기 전반기의 불상 가운데 수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외 복장유물로는 불상신조성회향발원문(佛像新造成回向發願文) 1매, 다라니서입회향발원문(陀羅尼書入回向 發願文) 1매, 황참의 다리 연화방거 한글발원문 1매, 자식점지 한글발원문 1매와 만자소화문황단삼회장저고리(卍字小花紋黃緞三回裝赤古里) 1점, 유리와 수정등의 파편 수 백점을 보자기에 싼 복장물 1괄이 보관되고 있어 당대의 복식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되고 있다.
현재 백담사에는 법당, 법화실, 화엄실, 나한전, 관음전, 산신각 등 6개동의 기존 건물 외에 만해 한용운 선사의 문학사상과 불교 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만해 기념관, 만해 교육관, 만해 연구관, 만해 수련원, 일주문, 금강문, 만복전, 만해 도서관, 요사채, 양로실, 만해당, 헌다실, 적선당 등 16개의 건물로 구성된 한국의 대표적인 고찰의 하나이다. 백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기초선원으로 지정되어 갓 득도한 승려들이 참선수행을 하고 있다.
백담사 만해마을과 백담사는 많이 떨어져 있었다.
內雪嶽 百潭寺(내설악 백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