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평택시 비전동 611-1
- 탐방로그
- 원심창 선생의 흉상은 성동초등학교 운동장 건너편에 있다.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원심창의사 조가 이은상 지음
1. 우리님 한평생 66년을 제한몸 부귀영화 다 버리고 꿈속에도 조국과 겨레를 위해 정도를 지켜사신 원심창 의사
2. 언제나 어디서나 불사조같이 원수의 옥속에서 호령하셨소 물불과 총칼앞에 두려움없이 의기로 살고가신 원심창의사
3. 통일을 못이루고 가시는 님이 눈인들 편안히 감으시릿가 님의 뜻 우리들이 받드오리다 비노니 고요히 잠드옵소서
(후렴) 뼈는 비록 이역땅에 묻히신대도 혼일랑 조국으로 돌아오소서 그 이름 그 정신 길이길이 우리들 가슴속에 깃드옵소서
1. 우리님 한평생 66년을 제한몸 부귀영화 다 버리고 꿈속에도 조국과 겨레를 위해 정도를 지켜사신 원심창 의사
2. 언제나 어디서나 불사조같이 원수의 옥속에서 호령하셨소 물불과 총칼앞에 두려움없이 의기로 살고가신 원심창의사
3. 통일을 못이루고 가시는 님이 눈인들 편안히 감으시릿가 님의 뜻 우리들이 받드오리다 비노니 고요히 잠드옵소서
(후렴) 뼈는 비록 이역땅에 묻히신대도 혼일랑 조국으로 돌아오소서 그 이름 그 정신 길이길이 우리들 가슴속에 깃드옵소서
원심창 의사 동상 건립 성금기록비
원심창의사께서는 1906년 평택군 팽성읍 안정리에서 출생, 1918년 평택보통학교 (평택성동국민학교 전신) 4년제를 졸업하셨습니다.
1923년 부터 1932년까지 중국 상해등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항일독립운동을 하셨으며, 1933년에는 육삼정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되어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셨습니다.
1946년부터 1971년까지 재일거류민단을 결성 단장을 역임하시면서 교포사회의 단결과 평화적인 남북통일 성취에 심혈을 기울이셨으며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통일의 일념으로 활약하시다가 1971년 7월 4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시어 그 휴해는 1976년 10월 2일 천원군 망향의 동산에 모셔 졌습니다.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원심창의사님께 건국훈장 국민장과 건국훈장 태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1923년 부터 1932년까지 중국 상해등지에서 조국의 광복을 위해 항일독립운동을 하셨으며, 1933년에는 육삼정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옥되어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자유의 몸이 되셨습니다.
1946년부터 1971년까지 재일거류민단을 결성 단장을 역임하시면서 교포사회의 단결과 평화적인 남북통일 성취에 심혈을 기울이셨으며 평생을 조국의 광복과 통일의 일념으로 활약하시다가 1971년 7월 4일 향년 66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치시어 그 휴해는 1976년 10월 2일 천원군 망향의 동산에 모셔 졌습니다.
1977년 12월 13일 대한민국 정부에서 원심창의사님께 건국훈장 국민장과 건국훈장 태극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원심창의사상은 평택성동국민학교 총동창회에서 전개하고 있는 '원심창 의사 추모사업'의 일환으로 의사님의 모교인 이곳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의사께서는 일산상의 영달과 명예를 초개와 같이 버리시고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러한 항일독립운동 정신과 평화적 남북통일을 성취하고자 진력하신 애국애족 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교훈으로 남겨주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성동출신이시며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독립유공 민족지도사이신 원심창 의사님의 위훈을 기로고자 모두의 뜻을 모아 정성을 바치는 바입니다.
의사께서는 일산상의 영달과 명예를 초개와 같이 버리시고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러한 항일독립운동 정신과 평화적 남북통일을 성취하고자 진력하신 애국애족 정신은 우리 모두에게 크나큰 교훈으로 남겨주셨습니다.
이에 우리는 성동출신이시며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독립유공 민족지도사이신 원심창 의사님의 위훈을 기로고자 모두의 뜻을 모아 정성을 바치는 바입니다.
교실 바로 앞에 있었던 원심창 의사의 흉상이 운동장 건너편으로 옮겨져 있었다.
원심창 의사 상
원심창 의사
일제 강점기 상하이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며 별칭은 훈이라고 한다. 1919년 3.1운동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3년 박열등이 결성한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24년 무정부주의 최최의 노동조합인 동흥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1925년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며 기관지 흑우를 발행 홍보하였으며, 1927년 흑풍회, 1928년 흑우연맹 결사에 참여하였다.
1929년 일본 도쿄유학생학우회 폭력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같은 해 정화암, 백정기, 이회영등과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하였고, 흑생공포단에 가담 텐진 일본영사관과 일본군이 있는 건물을 폭파할 것을 모의하는 등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흑생공포단 단원들과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를 암살하기로 계획하고 이강훈, 백정기등과 중국 상하이 조계 우창로에 있는 육삼정 부근에서 대기하던 중 일본 첩자의 밀고로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1945년 출옥하였으며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일제 강점기 상하이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이며 별칭은 훈이라고 한다. 1919년 3.1운동후 일본으로 건너가 1923년 박열등이 결성한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회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24년 무정부주의 최최의 노동조합인 동흥노동조합에 가입하였다.
1925년 베이징과 상하이 등지에서 무정부주의 운동을 전개하며 기관지 흑우를 발행 홍보하였으며, 1927년 흑풍회, 1928년 흑우연맹 결사에 참여하였다.
1929년 일본 도쿄유학생학우회 폭력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1931년 상하이로 건너갔다. 같은 해 정화암, 백정기, 이회영등과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하였고, 흑생공포단에 가담 텐진 일본영사관과 일본군이 있는 건물을 폭파할 것을 모의하는 등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흑생공포단 단원들과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를 암살하기로 계획하고 이강훈, 백정기등과 중국 상하이 조계 우창로에 있는 육삼정 부근에서 대기하던 중 일본 첩자의 밀고로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 1945년 출옥하였으며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