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소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397-5
사적지 사진 상세설명
장준하공원을 만들며
파주는 항전의 땅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삼국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지켜내려는 사투가 있었고, 근래 6·25전쟁에서도 자유를 수호한 도시입니다. 분단의 역사, 접경도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갑니다.
장준하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의 등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자 온몸을 불살랐으며,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에 헌신했습니다.
일본에 뺏긴 나라를 되찾고자 구국 장정의 길에 올랐던 장준하 선생의 굳은 의지를 파주에 다시금 살립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았음을 파주에서 가르치고, 일깨워 나가겠습니다.
연고도 없이 묻혀 계셨던 파주 광탄 나사렛공원묘지에서 이곳 통일동산으로 오신 이유는 수많은 호국영령이 선생의 안타까운 영혼을 부른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장준하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 의로운 기상은 우리 파주와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 40만 파주시민과 이인재 파주시장-
파주는 항전의 땅입니다.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삼국시대부터 삶의 터전을 지켜내려는 사투가 있었고, 근래 6·25전쟁에서도 자유를 수호한 도시입니다. 분단의 역사, 접경도시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지만 매우 역동적인 모습으로 평화로운 미래를 열어갑니다.
장준하 선생은 항일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사상계를 발간해 지식인의 등대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바로 세우고자 온몸을 불살랐으며, 분단된 조국의 평화통일에 헌신했습니다.
일본에 뺏긴 나라를 되찾고자 구국 장정의 길에 올랐던 장준하 선생의 굳은 의지를 파주에 다시금 살립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결코 거저 얻어지지 않았음을 파주에서 가르치고, 일깨워 나가겠습니다.
연고도 없이 묻혀 계셨던 파주 광탄 나사렛공원묘지에서 이곳 통일동산으로 오신 이유는 수많은 호국영령이 선생의 안타까운 영혼을 부른 때문입니다. 죽어서도 살아있는 장준하 선생의 애국애족 정신, 의로운 기상은 우리 파주와 영원히 함께할 것입니다.
- 40만 파주시민과 이인재 파주시장-
조국애를 몰라서 조국을 귀하게 여기지 못했고, 조국을 귀중하게 여기지 못하여 우리의 선조들은 조국을 팔았던가.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 돌베개 중에서 -
우리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으련다. 나는 또다시 못난 조상이 되지 않기 위하여 이 가슴의 피눈물을 삼키며 투쟁하련다.
- 돌베개 중에서 -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빛이 되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일 뿐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장준하 영결 미사에서 -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일 뿐입니다.
- 김수환 추기경, 장준하 영결 미사에서 -
GPS상의 주소는 경기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397-5 이다.
지성의 좌표 「사상계」
1952 : 피난수도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 발간
1953 : 종합월간지 「사상계」 창간
1959 :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 제하의 백지 권두언으로 정권 비판
1960 : 「사상계」 창간7주년 기념호 권두언에서 집권당 횡포 규탄. 4·19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됨
1961 : 대한민국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으로 활동
1962 :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부문 수상
1964 :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 초청연사로 전국 순회 연설, 정권 비판, 「사상계」 긴급증간호(한·일 회담의 제문제)를 발행, 매국 외교 규탄
1965 : 「사상계」 긴급증간호(신 을사조약의 해부)를 발행, 한·일협정 조인 반대
1966 :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 연설로 구속
1952 : 피난수도 부산에서 월간지 「사상」 발간
1953 : 종합월간지 「사상계」 창간
1959 : ‘무엇을 말하랴, 민권을 짓밟는 횡포를 보고' 제하의 백지 권두언으로 정권 비판
1960 : 「사상계」 창간7주년 기념호 권두언에서 집권당 횡포 규탄. 4·19혁명의 정신적 지주가 됨
1961 : 대한민국 국토건설본부 기획부장으로 활동
1962 : 막사이사이상 언론·문학부문 수상
1964 : 한·일 굴욕외교 반대투쟁위원회 초청연사로 전국 순회 연설, 정권 비판, 「사상계」 긴급증간호(한·일 회담의 제문제)를 발행, 매국 외교 규탄
1965 : 「사상계」 긴급증간호(신 을사조약의 해부)를 발행, 한·일협정 조인 반대
1966 : '특정재벌 밀수진상 폭로 및 규탄 국민대회’ 연설로 구속
민주혼의 숨결
1967 : 야권의 '4자회담' (유진오 윤보선 이범석 백낙준) 막후에서 주선, 5·3대통령 선거 후 선거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국가원수모독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동대문구 을구 신민당 후보 출마, 옥중 당선
1971 : 자서전 「돌베개」 출간
1972 : 「씨알의 소리」 (발행인 함석헌) 편집위원으로 활동
1973 :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양일동 씨와 함께 통일당 창당, 최고위원 취임,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주도
1974 :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 징역 15년·자격정지 15년 선고,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감
1975 :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 파주 광탄면에 영면
1991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5 : 제20주기 추도식 및 추모문집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 출판기념회
1999 : 금관문화훈장 추서
1967 : 야권의 '4자회담' (유진오 윤보선 이범석 백낙준) 막후에서 주선, 5·3대통령 선거 후 선거법 위반으로 또다시 구속(국가원수모독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서울 동대문구 을구 신민당 후보 출마, 옥중 당선
1971 : 자서전 「돌베개」 출간
1972 : 「씨알의 소리」 (발행인 함석헌) 편집위원으로 활동
1973 :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양일동 씨와 함께 통일당 창당, 최고위원 취임, 민주회복을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 주도
1974 : 대통령 긴급조치 위반 혐의로 구속, 징역 15년·자격정지 15년 선고, 심장협심증과 간경화 증세가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출감
1975 :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의 죽음, 파주 광탄면에 영면
1991 :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1995 : 제20주기 추도식 및 추모문집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 출판기념회
1999 : 금관문화훈장 추서
돌베개와 사상계
장준하의 저서 「돌베개」는 학도병으로 끌려간 날부터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책으로 1971년 5월 20일,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다음은 「돌베개」에 부치는 말이다.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4년부터 조국광복이란 감격의 깃발이 민족의 숨결처럼 펄럭이던 1945년까지 나의 20대는 '자랑스러운' 자부심으로 부끄러울 것 없는 젊음을 구가했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나고 또 한두 해가 얹혔다. 그리고 나도 50대에 들어섰다. 이제 나는 그 2년간의 체험을 중심으로 우리 현대사의 한 증언자가 되고자 이 수기를 발표한다. 당시 국내외를 통한 제반 사정과 우리 젊은이들의 저항을 내 눈으로 확인한 대로 기록해야 하겠다는 사명감까지도 느끼게 되는 오늘날의 정치현실은 나로 하여금 주저 없이 붓을 들게 했다.···
사상계는 1952년 8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였던 「사상」에서 출발하였다.
「사상」의 편집인으로 참여했던 장준하가 1953년 4월에 인수해 제호를 「사상계」로 바꾸고 월간종합교양지를 창간했다. 창간호 3천부가 발간되고 최고 발행부수가 10만부에 이르는 등 지식인층과 학생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민족통일문제, 민주사상의 함양, 경제 발전, 새로운 문화 창조,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을 편집의 기본 방향으로 삼고 다방면에 걸쳐 권위 있는 글을 실었다. 자유언론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정치 탄압의 수난을 당하였다.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五跋)'을 실었다는 이유로 당국의 폐간 처분을 받아 통권 205호로 명맥이 끊겼다.
장준하의 저서 「돌베개」는 학도병으로 끌려간 날부터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기까지의 과정이 담긴 책으로 1971년 5월 20일, 사상사에서 처음으로 발간되었다. 다음은 「돌베개」에 부치는 말이다.
···일제의 패색이 짙어지던 1944년부터 조국광복이란 감격의 깃발이 민족의 숨결처럼 펄럭이던 1945년까지 나의 20대는 '자랑스러운' 자부심으로 부끄러울 것 없는 젊음을 구가했다. 그로부터 4반세기가 지나고 또 한두 해가 얹혔다. 그리고 나도 50대에 들어섰다. 이제 나는 그 2년간의 체험을 중심으로 우리 현대사의 한 증언자가 되고자 이 수기를 발표한다. 당시 국내외를 통한 제반 사정과 우리 젊은이들의 저항을 내 눈으로 확인한 대로 기록해야 하겠다는 사명감까지도 느끼게 되는 오늘날의 정치현실은 나로 하여금 주저 없이 붓을 들게 했다.···
사상계는 1952년 8월 문교부 산하 국민사상연구원의 기관지였던 「사상」에서 출발하였다.
「사상」의 편집인으로 참여했던 장준하가 1953년 4월에 인수해 제호를 「사상계」로 바꾸고 월간종합교양지를 창간했다. 창간호 3천부가 발간되고 최고 발행부수가 10만부에 이르는 등 지식인층과 학생층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민족통일문제, 민주사상의 함양, 경제 발전, 새로운 문화 창조, 민족적 자존심의 양성을 편집의 기본 방향으로 삼고 다방면에 걸쳐 권위 있는 글을 실었다. 자유언론 투쟁에 앞장섬으로써 정치 탄압의 수난을 당하였다. 1970년 5월호에 김지하의 시 '오적(五跋)'을 실었다는 이유로 당국의 폐간 처분을 받아 통권 205호로 명맥이 끊겼다.
아마도 저 뒤의 계단이 장준하선생의 새롭게 이장된 묘소로 올라가는 길인가보다. 곧 다시 와서 탐방을 해야겠다.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은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 돌베개중에서 -
우리는 무기를 가졌습니다. 조국을 찾아야한다는 목표물을, 똑바로 겨냥한, 젊은이란 이름의 무기입니다.
- 돌베개중에서 -